A는 어제 어느 동네에서 얼마짜리의 어떤 메뉴로 저녁을 먹었는가가 나도 모르게 문득 궁금해지게 되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나의 오늘 하루엔 어떤 일이 있어났었으며, 그로부터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가를, 혹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란 어떠한 각도로 자리잡고 있는가 등등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은연중에, 때로는 심지어 뭔 의무감스런 의도로 보여주고 싶다,란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 --- 이러한 '관음증과 노출증' 그리고 그 둘의 적절한 비율의 결합이야말로 제가, 그리고 당신이 여전히 이 곳, 블로그란 곳에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이웃을 맺고 클릭을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문학 작품이란 것이 독자 스스로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그것을 읽어 내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하며, 결국엔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우게 된다라는 관점이 문학에서의 (일종의/제 표현대로의) '관음증'을 표현하고 있다라면,
어느 시절에나 은밀한 비밀들이, 그 시절에 살아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었다 해도 겨운 추억들이, 지독한 악취가 끊이지 않는 골목에서도 포동포동하고 푸르스름한 눈빛을 한 아이가 자라고 있듯이, 피로한 푸른 작업복 속에서도 우리들의 가슴이 흰 토란같이 단단해졌듯이, 어느 시절에나 은밀한 추억들이.(p261)
이러한 일 개인의 은밀한 비밀과 추억들을 털어놓게만 되는/털어놓고 싶다란 마음이 드는, 그리하여 작가 스스로의 표현대로 "이 글을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p11,p511)로라도, 이러한 표현을 한 작품의 시작과 끝으로 적어놓았을만큼의 주저스러움을 결국엔 이겨내고, 그 비밀과 추억들을 세상에 털어놓게 되는 건 아무래도 '문학'이란 것이 작가/인간에게 강요하는/유혹하는 '노출증'의 일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관음증이나 노출증 같은, 뭔가 야사시한 표현이 저의 한계인 반면! --- 이 작품 「외딴방」의 작가 신경숙의, 추측컨데 그녀가 이 작품을 통해 펼쳐놓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 속 시대를 살았던 혹은 살지 않았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내어 놓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라 생각되었던 표현은 이러하지요.
미래소설이나 가상소설이라고 처음부터 작정을 해둔 게 아니면 글쓰기는 결국 뒤돌아보기 아닌가. 적어도 문학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들은 성찰의 대상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 아닌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에서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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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으로 걸어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p76) …… 나는 침묵으로 내 소녀 시절을 묵살해버렸다. 스스로 사랑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열다섯에서 갑자기 스물이 되어야 했다. 나의 발자국은 과거로부터 걸어나가봐도, 현재로부터 걸어들어가봐도 늘 같은 장소에서 끊겼다. 열다섯에서 갑자기 스물이 되거나 스물에서 갑자기 열다섯이 되곤 했다. … 오랫동안 나의 소녀 시절이 나에게 남긴 가족 이외의 타인과의 관계는 무(無)였다. (p509)
"어서 이 무료한 고장을 떠나 도시의 큰오빠에게로 가는 것. 거기에서 누군가를 만나 그로 하여금 너를 알게 돼서 기쁘다는 말을 듣는 것"(p13)이 꿈이었던, 일견 평범하다 말할 수 밖에 없는 열여섯 살의 한 시골소녀가, 그로부터 열여섯 해가 흐른 뒤 되돌아보는 자신의 열여섯 살부터 4년 간의 기간을 위와 같이 말할 수 밖엔 없다라는 건 결코 평범하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그 시절을 살아온, 대부분의 소년, 소녀, 청년들, 그리고 성인들 모두에게 '그때 그 시절'이라는 게 평범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 일반적으로 일컬어질 수 있겠는 '평범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의미가 아닌!!!
서로 다른 친구를 사귀면 토라지고 나뭇잎 같은 거 말려서 그 뒷면에 그애의 이름을 써넣고, 자전거 하이킹도 가고, 밤새 편지를 써서 그애의 책갈피에 몰래 끼워넣고 …… 내게는, 그리고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녀들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다. 토라질 틈도, 나뭇잎을 말릴 틈도 우리들 사이엔 없었다. 우리들 사이엔 봉제공장, 전자공장, 의류공장, 식품공장 들의 생산부 라인이 존재했다.(p23)
위와 같은 의미로서 '그런 시절이 없었'던 그녀들이, 여기에 더해 --- 경주로의 수학여행을 가서 서로에게 느꼈던 다음의 감정 역시,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곧 어색해진다. 햇빛 때문이다. 저녁에만 형광등 불빛 아래서만 보던 얼굴을 환한 햇빛 아래서 마주친 어색함. 낮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우리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어색하게 천마총이나 보고 있다. 첨성대나 보고 있다. 경주의 남산에나 오르고 있다.(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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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인) 소설 속 화자(話者)는 자신의 과거를 단순히 연대순으로 서술하지 않고, '그때 그 시절'인 과거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다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화려한 서술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작품 속에 담겨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화자 스스로의 문체, "단문. 아주 단조롭게.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 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 사진 찍듯. 선명하게."(p46)라는 기조는 (적어도 3부의 중반 무렵까지는) 계속 이어지지요. 암튼, 이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매력은 바로!
화자(話者)의 '그때 그 시절' 이야기 속에는, 결국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표현해내고자 했던 이야기들 속에는, 독자들에게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그 어떠한 가치판단을 요구함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심지어! --- 화자 자신마저도, 그러므로 작가 자신마저도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라고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저!
"이보다 더 일할 수는 없어. 하루는 24시간뿐이니까. … 이다음에 마당이 있는 이층집에서 살 수 있을까? 예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pp175-176)라는 현실과 (아마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소망을 지니고 있는 희재 언니나, 하루에 캔디 이만 개를 포장해야하는 안향숙이나, 스물여섯의 나이에 야간고등학교엘 다니게 된 김삼옥에게 "교복은 너무 소녀스럽고 그녀의 얼굴을 너무 피로에 젖었다"(p159)란 느낌을 받았었던 화자는, 자신 역시 컨베이어 앞을 떠나도 되는 오후 다섯 시를 사랑했었던 1979년 그때를, 그때의 그녀들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p209) 각자의 꿈을 가지고 살아내었을 뿐이라고만 말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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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의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 장 그르니에
"매일 잔업, 특근을 할 때가 나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컨베이어가 돌아갈 때가"(p328)의 구절만으로, 작가의 시대정신을 비판할 독자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 사회 전체적인 혹은 구조적인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고"(p209) 털어놓는 화자 개인이 그렇게 이후 그녀가 살아오며 이루어낸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었던 '그때 그 시절'을 살아낸 그런 이야기이지요. 그러하기에!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그때 연탄불을 잘 타고 있었는지, …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뭇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서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p245)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라든가, '그건 옳은 태도가 아니다'란 비판을 받게된다 해도 전 ---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만큼은 결코! 작가 신경숙과 '표절'이란 단어를 함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의도적 외면때문이 아닌, 그저 읽다보니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엄마를 부탁해」에선 '엄청난' 감흥이 아닌, '오래 갈 듯한' 감흥만을 느낄 수 있었던) 신경숙이란 작가를 「외딴방」만의 작가로 대하게 되었었기 때문이지요.
독자에게 작가가 대놓고 요구하는, 심지어 강요하기까지 하는 메시지는, 설혹 그것이 백번 옳다라 하여도 예의 적잖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무 것도 강요하는 것 없는 이 작품은 오히려! --- 1960~70년대 한국의 발전이 정녕 일 개인의 리더쉽 덕분에가 아닌, 수많은 민중들의 희생과 그러한 희생을 그래도/그나마 말없이 감내하고 이겨내 준 대한민국의 저력 때문인 것이었노라는 생각이, '세상의 어느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을 마시느냐'라 말하는 장하준에게, 그가 시바스 리갈을 마셨었던 건 검소해서도, (장하준의 주장처럼) '자본가의 소비를 규제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입맛의 수준이, 취향이 그러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라고, 이 작품을 읽기 이전에는 가지고 있지 못했던 이러한 대답들이 이 작품을 읽음으로 해 비로소 생겨나게되었다라는 바로 이 점! 이 점이야 바로 이 작품 「외딴방」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장점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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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일러주었네. 나는 난쟁이보다 더 크지 않고, 거인보다 더 작지 않음을, 나는 모든 사람이 만들어지던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 칼릴 지브란
자신만큼은!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생각했었던 지도자들을 가졌었던/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과거를 살아왔었고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어 주는 작가 신경숙의 "우리가 그 집에 살았을 때라든지, 혹은 옛날에 우리가 닭을 길렀을 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이 글 속에 그런 행복이 잠겨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긴다."(p471)는 소박한 바램은 정녕!!! --- 지난 일년 여간의 제 개인사(史)와 어울려, 심각하게 뭉클한 무언가를 제게 안겨주었더랬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역시! 'OO했었던 그때와 이때'를 행복하다라 말할 수 있을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꺼라 믿어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마치 전쟁과도 같고, 어쩌다보니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해왔었다 해도, 결국엔 참아낸 '그때 그 시절의 그들'처럼, 저 역시... 참아내고 참아내다보면 언젠간, 이기는 순간의 보람을 맛볼 수 있겠지,하는 희망을 예의 굳건히 믿어봅니다. (마무리를 지으려다보니, '글쓰기란 결국 뒤돌아보기이며 오늘 속에 흐르는 어제 캐내기'란 작가 신경숙의 표현 그대로...를 제가 따라하고 있군요. --;;)
※ 읽어 본, 작가 신경숙의 작품 : 「엄마를 부탁해」
※ 뭔가, 비슷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있다라 생각되는 작품들
- 성석제 作, 「투명인간」
- 이문열 作, 「아가(雅歌)」
- 이청준 作, 「당신들의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