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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평점 :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뭔가 우리말 어법에 들어맞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제목입니다만,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도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도, 세(勢)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 등의 의미로 사용된 '바깥'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저자의 의도가 오롯이 드러나게 되지요. 저자는 이 책 속 '바깥에서 만난 이들(때로는 공간 혹은 장소)'을 가리켜 '꿈을 꾸는 이들'이었고, 자신은 그 꿈을 엿보며 멋대로의 해몽을 해보았다라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모든 밀려나고 사라지는 것들에는 사연이 있고 맥락이 있다. 사연이 안타깝고 논리가 부조리해도 거기에는 도덕과 당위의 맥락으로 치환되지 않는 시스템의 힘이 있다. 어떤 것을 밀어내고 사라지게 하는 데 앞장서는 것(혹은 사람 혹은 논리)들은 그 시스템의 내력벽(耐力壁) 뒤에 숨어 도덕적 부담을 덜고, 그러면서 시스템을 두껍게 한다. 시대의 조류(潮流)라고도 부르고, 지배적 가치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데카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보편 이성에 닿아 있었던 때와 경우를, 서글프게도 우리의 역사책은 소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인류는 부조리를 견디는 내성을 다윈의 비정한 가르침처럼 키워와야 했고, 그것이 때로는 맹목의 행복으로 보이기도 한다.(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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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상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타이틀은) 기자들조차 자극적이나, 기사 내용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제목들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그렇게나마 '억지로라도 1등 곁에 얼씬거려야 버틸 수 있는'이라, 이 책의 저자 최윤필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현실/현상을 「자발적 복종」의 역자 목수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자발적 복종」을 읽으려 펼쳤던 때가 올 2월 17일이었더랬습니다만, 아래의 인용문이 담겨 있는 <역자 서문>을 읽고는 차마! 더 이상 읽어나갈 용기가 선뜻 못내어 그 책을 접었던 기억이 나네요.)
영원한 을(乙)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甲)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이런 현상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 줄 사람에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자에게선 내가 떠나온 비참한 출신 성분의 향기가 풍긴다. 중요한 건 누가 가장 힘이 센가,이다. 비밀투표일지언정,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시에 著, 「자발적 복종」의 <역자 서문> 중 pp10-11. 생각정원刊
'바깥'에 속해 있는 어떤 부류들은 이처럼 '링크에서의 낙오'를 아쉬워할 수도, 혹은 그러한 현재의 상황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 아직까지는/여전히 링크에서 낙오되지는 않았다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전, 최소한 (저자가 구분지어 놓은 카테고리 중)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세(勢)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의 경우에는 단지 (비록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아주었으면 한다해도 결국엔) '추억이나 향수의 오브제'의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안타깝다'라거나 '측은하다'라는 인간적 감정이 ('당위'가 아니라!)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저/단지 딱! 거기 뿐이라는 거지요.
누군가 말했듯,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p294) …… 어떤 사람이 한 공동체에 편입된다는 것은 … 그 성원들로부터 특정의 기호(記號)로 인지되는데서 완성된다.(p32)
- 이문열 作, 「아가」 중. 민음사刊
헌데 말입니다!!! --- 저자는 느닷없이 '바깥'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지나치게 일반화시켜버려 결국엔 예의 '기-승-전-자본주의의 그늘/폐해'로 이끌어가는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손 모델 최현숙>의 장(章)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세상에 나설 때는 그의 손이 아니라 이영애나 김연아의 손으로 등장한다. 그의 손은 이영애의 손보다 예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영애는 손도 저리 곱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비애란 거래의 다른 이름이어서 그가 느끼는 서운함은 공식화할 수 없는 서운함이다. 요컨데 육체의 미와 그 사용, 교환가치에 구현된 자본주의적 지배 - 종속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그와 그의 일에서 쉽사리 감지하게 된다. 사회적·경제적 과실에 대한 응당한 보상이나 권리, 지분 따위를 따지는 일이 자본주의적 정의이고 운영의 핵심 원리라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주 완곡하게 표현해서, 누군가의 서운함을 당당하게 전제하고 있다. (p227)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이라는 의미로 선택되어 있는 <손 모델 최현숙>편을 읽자라면, 이 인물의 '바깥일 수 밖에 없음'에 (안에 있건 바깥에 있건) 우리가 그 어떤 감정 - 예를 들어, 애잔함이라든가 안타까움이라든가 혹은 부러움이라든가 - 을 느껴야하는 건지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심지어 (<손 모델 최현숙>의 글을 읽고)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껴/가져야한다라 은근히 강요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가 불쾌하기까지도 하더군요. 이런 류의 글이--- '자본주의적 정의와 운영 원리'란 것이 제 아무리 '누군가의 서운함을 당당하게 전제하고 있다'라 할지라도, 그 서운함이라는 감정의 주체가 결코!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손 모델'이 될 수는 없는것인, 저자가 끝내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누군가의 서운함'을 말하고자 했다면, 자본주의의 본질 상 품어 안을 수 없는 다른 '바깥'을 선택했었어야 한다라는 겁니다. 게다가! 이로부터 '자본주의적 지배-종속의 메커니즘'을 이끌어낸 것은 그야말로 악수(惡水)중의 악수라 밖에는 생각되지 않지요. 암튼!
이처럼 잘못된 설정의 '기-승-전-자본주의의 그늘/폐해'는 이 책의 꽤나 여러 곳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막걸리>편에서 저자는
경쟁의 논리란 본래의 의미와 달리 힘센 자들이 사후적으로 펼치는 패권의 논리인 경우가 많고, 그 논리는 문화의 본래적 의미에 비춰 비문화적이거나 반문화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가령 민족(국가) 문화의 경쟁력을 위해 지방 문화의 희생은 사소하다는 식의 발상이 그런 것일 텐데, 우리에게는 거대한 규모의 경쟁력에 눌려 질식해버린 것이 머무 많았고 그 중에는 한때 700여 종에 달했다는 빛나는 가양주(家釀酒 : 집에서 빚은 술) 문화도 포함될 것이다.(pp324-326)
'자본주의(Capitalism)'를 채택하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사회의 구성요소에 대한 '자본(capital)'의 (사전적이건 사후적이건) 우위를 부인할 수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 '자본들' 사이에서의 (사후적이건 사전적이건의 경쟁의 결과를 통해 보여지는) 우열 관계 역시 분명 존재하며, 아무리 그것이 꼴보기 싫다한들 그러한 역학관계 자체를 외면할 수는 없는 겁니다. --- '자본'이 선택해낸, 그리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 심지어 강화시켜나가고 있는 것들과, 이젠 겨우 '추억이나 향수의 오브제'로만 존재할 뿐인 것들이 각각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자본주의'하에서 일상을 영위해나가고 있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자본의 힘'이 '가양주'들을 질식시켜 버렸다라는 저자의 논리는, 최소한 저에게는 전혀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가양주의 사라짐이 무언가(자본)에 의해 초래되었다라 지적하기 앞서, 그렇게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가양주 스스로의 원인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어야하는 것이 순서 아니었을까요? (이 단계를 생략한 채, '무언가'(자본)을 먼저 비난한다면 그건 단지 궁색한 면피에 지나지 않다라 생각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자본의 힘이 교육의 영역(예를 들어, 대학교의 인수)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그리하여 대학 본연의 기능마저 자본의 힘이 굴복하고 있다'라는 주장이 당당하게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 '자본의 힘'이 더해져 대학 순위가 급부상한 모 대학의 존재, 즉! '자본의 힘'이 초래한 '소비자들의 선호 증가'라는 현상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논리적으로 설명/해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겁니다. '선악에의 판단'을 말하기에 앞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분석과 그 분석에의 근거를 먼저! 밝혀놓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이니까요. 물론!!!
소비자의 선택이라는 것이 항상 '옳다'라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상황하에서만큼은 최소한 특정한 '소비자의 선택'에 대해 '자본주의의 그늘/폐해'로(만) 몰아갈 수는 없다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라는 걸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는 이 책의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어 보이기도 하기에, 독자로서는 헷... 갈릴 수 밖엔 없기도 하지요.
마패나 봉화가 그러했듯, 우표라는 소통의 얼굴도 늙고 잊히고 사라질 수 있다. …… 어쩌면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의 소통의 얼굴이 바뀌어가는 순간의 역사를 경험하는 중인지 모른다. …… 한마디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는 이야기다.(<우표> 중.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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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안'과 '바깥'은 상대가 존재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지요. 그러한 상대성은 다시 특정 '바깥'에조차 또다시 '안'과 '바깥'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기준에서는 손 모델이 '바깥'이 될 수 있겠으나, 다른 기준, 예를 들어 '부분 모델'의 영역에서는 '손 모델'이 엄연한 '안'의 자리를 움켜쥐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이처럼!!! --- 특정 관점에서 바라 본 '바깥'에 대해 호의적 시선을 반드시 가져야 할 당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시선이 무관심을 넘어 '냉소적'일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냉소적이어야 한다가 될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라는 작가 김훈의 당당함에 비교해, '이것은 역사적 가정이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라는 호언이 역설적으로 그 작가와 그의 작품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어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안'이 존재하는 한, '바깥'의 존재 역시, '2등'의 자리가 반드시 '1등'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듯이, 일종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결코 '안'과 '바깥'의 존재함이 서로를 향한 적대적 감정을 필요조건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라는 수준에서의, 그저 한 신문사 기자의 '바깥'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담은 잡문(雜文)으로서 스스로의 성격을 한정지었더라면 훨씬 더 잔잔하나 깊은 울림을 독자들에게 안겨주지 않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더랬습니다. 온전히!!!
<직업혁명가 이일재>편만이,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하고 있는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도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도, 세(勢)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이란 의미의 '바깥', 그 모든 카테고리 속에 들어맞는 글이었다라 생각되네요. 그 글 속에 있는, <후손들에게>라는 한 편의 시는 정녕 --- 시점을 고정해 놓은 채 사회의 '안과 바깥'을 바라보는 횡단면적 시선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계열의 시선만이 현재의 '안과 바깥'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헤아릴 수 있게 해주지 않나하는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때로는 '관대한 마음으로'으로도, 허나 대부분에선 '복잡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인 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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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러지며 흘린
피 속에서 떠오른 그대들은
우리의 허물을 말하지 전에
모쪼록 기억하라
우리가 헤쳐 나온
그 어두운 시대를
(…)
우리는 부드러움의 바탕을 마련하고 싶었으나
스스로는 부드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사람이 사람을 돕는
그런 때가 도래할 때
우리를 기억해다오
관대한 마음으로
- 브레히트 作, <후손들에게>
▶ 짧은 몇 마디 : '바깥'이 항상 선한/옳은/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그러하기에 '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역시 분명 경계해야할 편견일 뿐.
※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깥'을 (시계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라 생각되는 책들 :
- 김형민 著,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조은 著, 「사당동 25시」
- 본문 p5.
- 본문 p6.
- 이 표현이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1등에의 부정적 시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본문 p296.
- 본문에서는 이 '정의'에의 한자가 따로 병기되고 있지 않아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 '정의(正義, justice)'라기보다는, '정의(定義, definition)'이리라 생각합니다.
- 논리구조 자체 뿐 아니라, 대상의 선택마저도 잘못된.
- 실제 이야기하고 있는 막걸리는 '가양주'가 아닌 '국순당'입니다. 이쯤되면 '안'과 '바깥'의 구분이, 최소한 이러한 주제하에서는 그야말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 김훈 作, 「남한산성」 중 '일러두기 1번'. 학고재刊
- 이상훈 作, 「한복 입은 남자」중, p516. 박하刊.
- 본문 p36, p40.
- '재야(在野)'라는 단어가 우리 정치에서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는 호의적 시선을 떠올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