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2년, 아니 적어도 3-4년 내내 한 방울, 두 방울, 아니 몇 방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땀을 흘린 다음에 겨우 그 인력거를 마련한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 이를 악물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애써 참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인력거는 그가 발버둥치고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물이자 보수로, 백전노장의 가슴에 달린 훈장과 같았다.(p10)
'샹즈'라는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가진 것 없이 시작해, 자신의 꿈이었던 인력거를 마련했고, 그렇게 시작된 그의 인생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져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 '희망은 대부분 허사가 되는 법이니, 샹즈도 예외는 아니었다.'(p21) --- 샹즈의 희망은 대체 왜! 허사가 되었던 걸까요?
그렇게 고생을 해 마련했던 인력거를 전쟁통에 빼앗겼고, 병에 걸려 고생을 했었어도 젊은 시절의 샹즈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있어 '소원이자 희망이며 심지어 종교와도 같았'(p69)던 인력거를 다시 장만하고자, 자신을 학대하는 수준의 절약을 해가며 살아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통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 사실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을 일반적인 당시의 중국인들이 선호한다거나 하는 직종은 아니었더랬습니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집 안에 더이상 팔 것도 저당 잡힐 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면서'(p7)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길'이었을 뿐.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가진 돈도 없었던, 그저 건장한 신체만 가지고 있었던 샹즈에게는 다른 선택이 주어져 있지 않았던거지요.
그에겐 인력거를 끌어 밥벌이를 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기개 있는 일이어서, 그가 인력거를 끌고 나가려 할 때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바깥세상의 뜬소문도 그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 제 인력거를 끄는 동안 어떻게 조심해야 할지는 잘 알았지만, 역시 시골뜨기였기에 도시 사람처럼 바람 부는 소리를 듣고 비가 올 것을 예측하지는 못했다.(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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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히 압축시킨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 성실하고 남을 속이지도 않는 누군가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기를 당하고,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며, 그러하다가 결국 낙오자가 되어갈 때 흔히들 이를 가리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거나 '자본주의의 폐해' 등의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읽어내려가도 될까싶을 정도로 잘 읽혀지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무심결에 독자는 예의 바로 그러한 결론으로 안내받게 되지요.
누구나 살아갈 방법이 있고, 어디나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독 샹즈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바로 인력거꾼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인력거꾼이라는 게 먹느니 허접한 끼니요, 쏟아내는 건 피밖에 없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돈을 벌지만 가장 낮은 보수를 받았다.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서서 모든 사람, 모든 법, 모든 고난의 직격타를 맞았다. …… 인력거를 사놓고도 인력거를 잃고, 돈을 모아도 다시 빼앗겼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모두에게 능멸을 당할 뿐이었다.(p189) ……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이에게도, 의롭지 못한 이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았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내리기 때문에... (p287)
결국 샹즈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아무리 악착같이 일했었어도 지금도 공평하지 않은 이 세상은 조금이라도 공평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돈은 결코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오직 애시당초 왜 그렇게 갖은 노력으로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았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후회할 만한 일도 다 사라져 버렸다.'(p358) 심지어 가난한 샹즈에게는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 여져지게만 됩니다. 그럼 대체! 샹즈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했어야 할까요? --- 다음의 구절들이 샹즈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그리고 어쩌면 작가가 생각했던 '공평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난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샹즈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가난뱅이가 개인의 자유, 그것도 정말 보잘것없는 약간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진 마음뿐이었다.(p309) …… 배려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피와 땀의 대가가 아닌가. 그는 더이상 손님들의 선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받은 만큼만 주면 된다. 먼저 가격을 분명히 한 다음, 힘을 쓰기 시작했다.(p329) …… 자기 목숨은 자기 손에 넘어갈 수 있을 뿐, 다시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또한 자신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었다.(p361)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개인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역자의 해석은, 최소한 이 작품 「낙타샹즈」에 한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는 옳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에게 개인주의란 서구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울타리 (그것이 운명이든 인과응보의 결과물이든지간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의 관념을 의미하는 듯하다. 아무리 애써도 악몽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 그것은 개인의 재앙이지 또한 사회의 비극이다. 그럴 경우 누구나 샹즈처럼 행동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거나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며 산다.(pp384-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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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 말하기도, 그렇다고 짧다 말할 수도 없겠는 지난 15년 간의 사회 생활을 겪고 나니 ---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시대의 관점에 비추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물론! 나의 아이에게는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언젠간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란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만, 아버지로서의 이 말이 그의 삶을 보증해주지 못한다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아니!!! 어쩌면
지난 15년간의 사회생활이 그 질문에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대답/반증이 아닐까란 의구심을 가지게만 되는 요즈음이기에 '정직하고 착실하게 산다'라는 것이 '행복한 삶'에의 보증수표이기는 커녕, 그 반대의 삶을 이끌어내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라는 걸, 그 스스로 언젠간, 큰 아픔없이 꼭 깨달아주었으면... 이라는 소망을 마음 속에 가져보게도 됩니다. 과연! 지금의 이 사회는 '일생을 정직하고 착실하게 살아보니, 반드시 응분의 보답이 주어지더라!'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복단마저도 자랄 수 있는 사막'같은 곳일까요? 샹즈가 바래었던 '합당한 대가'라는 것이 정녕, 그가 살았던 공평하지 않은 사회의 기준에서도 여전히 '합당한' 것이었던 걸까요?
경험은 삶의 비료 같은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사막에서 복단이 자랄 수 없다. …… 까마귀는 그냥 까만색이다. 그는 혼자 하얀 깃털을 갖고 싶진 않았다.(p330)
마음을 많이 아프게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중국의 시대적·사상적 교훈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저! (그러한 공간적·시대적·사상적 배경을 떠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시대의 관점에 비추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만을 떠올려 본다면, 이 작품은 그 어느 공간, 어느 시대에도 이처럼 아프게만 읽혀질 소설이 아닐까... 라 결론내려던 순간 문득! --- 백가흠 作, 「마담뺑덕」 속 주인공 학규의 다음 독백이 (그 원래의 작품 속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작용하여) 이 소설의 결론에 어쩌면 또 다른 메세지를 더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삶은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의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이라고, 불가피한 상황이 우연이라면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라고, 학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p45)
전, 이 두 줄 글이 소설 속 '샹즈'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줄 수도 있겠으나 실은!!! 그의 최종적 선택에 대한 (또한 지금의 저에게도) 따끔한 훈계가 될 것이라/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