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투자의 귀재들 --- 물론! (타고난 감각이란 걸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런 개인적/천부적 부분은 배제시키고) 실제 현장에서의 배움이 더 크다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 시작은 예를 들어 경영·경제학과에서의 수업이었었다라는 것에 그리 강한 반대를 표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나라 대학들은 등록금 문제로 그다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커다란 비약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저 매우 단순한 논리로 보아) 결론에 이르르게 됩니다. 주식 투자의 귀재들을 가르쳤던/길러내는 경영·경제학과 교수들이 직접 나서서 등록금으로 주식 투자를 하는데, (이 간단한 논리 구조의 결과로는) 어찌 수익이 아니 나겠습니까.
국문학과 교수가 쓴 소설이라면,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쓴 소설이라면 일단!!! --- (최소한 국문학과 출신이 아닌) 독자로서는 몇 수 접히고/접어주고 들어갈 수 밖엔 없습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작가들이 국문학과에서의 배움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했었을진데, 그 작가들을 가르치는/쳤던 선생이니 오죽 잘 써냈겠냐라는, 마치 상경계열 교수들이 주식 투자를 하면 어김없이 (+)의 수익을 올리지 않겠느냐라는 추론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라는 거죠. 이 작품, 과연... 그러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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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방민호의 '작가관'에 관하여 】
'늦둥이 딸 - 곽 부인의 죽음 - 심봉사의 헌신 - 삯바느질 - 장 승상댁 마님 - 개울에 빠진 심학규 - 공양미 삼백석 - 인당수 - 용궁 - 엄마 곽 부인과의 재회 - 연꽃 - 황제의 아내 - 봉사 잔치 - 모든 봉사들이 눈을 뜸' --- 원작 <심청전>의 대략적인 흐름은 이러하다라 알고 있습니다. 예의 '알고 있다'라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거늘, 누군가 저에게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그 줄거리를 말해보라 한다면 사뭇 더듬거려질 수 밖에 없는, ('그러하니까/그러하기에' --;;) '고전'들 중의 하나죠.
'심청'이란 인물 앞에는 언제나 '효녀'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으며, 우리는 마치! '효녀'란 단어만이 심청을 설명하도록 허락된 유일한 수식어인 양 배웠더랬습니다. --- 이 '효녀'라는 수식어는 물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천재'라는 단어는 그 스스로/지향하는 대상 없이도 '천재'일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니고 있으나, '효녀'라는 단어는 내생적으로 그 지향하고 있는 대상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상정한 뒤에라야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연인 심청」의 작가 방민호는, 그 제목에서부터 보여지듯, 심청이 앞에 붙는 수식어의 지향점을 아버지라는 늙은 남성(효녀)으로부터 윤상이라는 젊은 남성(연인)으로 바꾸어놓고 있으며, 이 전환이야말로 작가가 원작 <심청전>과 자신의 작품 「연인 심청」간의 결정적/유일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밖에도, 약간의 작가의 철학과 더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긴 합니다만, 그것들만으로는 원작과 이 작품간의 뚜렷한 구별을 설명해낼 수는 없다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작가란 황무지에 자기만의 꽃을 심는 존재가 아니었다. 길고 깊은 문학의 전통 속에서 나타나 그것에 한 줌 흙을 더하고 사라지는 존재였다. 나 또한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p397)
제가 국문학과 출신이 아니어서일까요? 위와 같은 작가의 '작가관'을 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 작품처럼 (이미 존재하여 왔던 어떤) 원작을 바탕으로 그 원작을 뒤틀어/변형시켜 또 다른 버젼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작가관'이 성립될 수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이외의 문학 작품들에까지 이것을 적용시키는 일반화는 어불성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완전한 100%의 창작이란 있을 수 없다라는 말에도 딱히 반대를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 하여 작가 일반을 가리켜 '꽃을 심는 존재'가 아닌 '한 줌 흙을 더하고 사라지는 존재'라 표현하는 것은 비평가/시인/작가/교수 방민호의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교만이라고 밖에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 '되어야 했다'라는 위의 표현은 마땅히! (첫 장편소설을 써내는 작가로서 자신은 이런 - '한 줌 흙을 더하는 - 작가가) '되는/될 수 밖에는 없었다'가 되었어야한다라 생각합니다.
【 「마담 뺑덕」에의 오독(誤讀) 】
여전히 지금도 원작 <심청전>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하기에 개략적인 줄거리만으로는 각 등장인물들의 심성까지를 알고 있지 못합니다만! --- 이 작품 「연인 심청」에서의 심학규는 매우 탐욕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무능, 육체적 결함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다. 오늘 가진 것보다 늘 내일 가질 것을 꿈꾸는 아버지다.(p100)
● 심봉사는 돈보다도 애랑이가 그렇게 일찍 떠나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 짝이 없다. 애랑이가 쓸어가버린 돈으로 더 많은 계집을 섭렵하며 즐기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깝다.(p253)
만약 이러한 심봉사의 성정(性情)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 백가흠 作, 「마당 뺑덕」을 읽고, 작가는 원작으로부터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이름만을 빌려왔다라 했던 저의 독해는 일단 완전히 틀린 것이 됩니다. 거기에 더해 만약 원작을, 또한 이 작품을 '욕망으로 지은 죄'에 관한 이야기로도 이해할 수 있다/이해해도 된다라면 역시나! 「마담 뺑덕」에서 보여졌던 각 등장인물들의 행동/생각/말들은 모두... 작가 백가흠이 창작해낸 것이 아닌, 역시나 단지 원작에 '한 줌 흙을 더해놓은' 욕망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게 되지요. 결국... 이 소설을 다 읽고나니, 「마담 뺑덕」을 이해했던 저의 독해가 기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었었다라는 걸 시인할 수 밖엔 없게 됩니다.
시선을 이렇게 바꾸고 보니 --- 「마담 뺑덕」과 「연인 심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질 수 있는 정서랄까? 혹은 심학규를 위한 변명이랄까? 그런 게 바로 다음의 문장에 표현되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은 사람을 눈멀게 한다. 보통 때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한다. 세상의 선과 악을 넘어서게 한다.(p240)
【 숙명론(宿命論) VS 조명론(造命論) 】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헷갈렸던 부분입니다. 저의 얕은 독해로부터 기인된 것이 크겠지만, 그 얕은 독해로는 작가가 이 '숙명론'과 '조명론'에 대해 (저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해보라면) 사뭇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란 표현을 쓰고 싶을만큼, 이야기의 전개과정과는 완전히 상반된 결론을 내놓고 있다라고 밖에는 결론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우선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숙명론'과 '조명론'을 살펴 볼까요?
사람이 하늘이 정한 운명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숙명론(宿命論)이라 한다면, 정성과 의지로써 타고난 운명조차 바꾸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조명론(造命論)이라 할 수 있다.(p399)
작가가 써놓은 다음의 글을 읽어보고, 이것이 과연 숙명론과 조명론 중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왔나. 왜 이렇게 춥고 배고프고 외롭게 살아야 하나. 이 고통과 슬픔의 수렁에서 어떻게 해야 헤어날 수 있나. …… 실로, 인간은 자기가 처한 상황보다 항상 더 큰 것을 욕망하며, 현대는 그 극심한 욕망이 충돌하는 아비규환의 쟁투장이다. 여기에 나오는 심봉사는 바로 우리 현대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이타적 사랑밖에 없다. 「연인 심청」은 이타적 사랑의 이야기다. 그것을 실현해가는 운명 개척의 이야기다. …… 이 소녀가 무슨 운명을 타고났으며 어떻게 자기 운명을 바꾸어갔는지를 이 이야기는 말해보고자 한 것이다.(pp398-399)
애매... 하지 않나요? 전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분명히 '조명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라 생각했습니다. 심청이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갔는지, 그 운명 개척에 관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표현에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렸었지요. 헌데 말입니다!!! --- 이 작품 그 어느 곳에서도 심청이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가겠노라 하는, 그 '조명(造命)'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발견해내지 못했다라는 데에서, '작가의 말'과 '작품의 말'이 다르다/다르지 않는가라는 혼란을 겪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 등에 업혀 동냥을 다니던 때부터 청이는 과거 급제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걸 이루기만 하면 이렇듯 구차하게 목숨만 이어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다. 청이는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다. 아직 어리지만 자기 앞에는 막막한 내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p10)
오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과거 급제가 신산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라 믿고 있는 이 망상 속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에게 죽어라 고생만을 요구하는 현실의 청이에겐 이미! 밝은 미래에 대한 환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구절만을 가지고 제가 이 작품의 주제가 '숙명론'이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좀 더 보시죠.
윤상이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청이는 윤상이의 존재만으로도 고된 자신의 현실에 대한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뿐이죠. 청이는 스스로 자신과 윤상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 : '하지만 자기에게는 앞 못 보는 아버지가 있다.'(p27) --- 그렇기에 고민과 한탄을 하게 되지요. : '나는 어느 별에서 여기로 온 걸까. 아버지는 또 어디서 와서 나와 이렇게 아비와 딸이 되었을까.(p44) …… 아비가 지붕이 되고 울타리가 되는 것이 순리인 세상인데, 자기는 거꾸로 아비를 봉양하며 살아가야 한다. … 무슨 뜻이 있겠지. 사람마도 운명이 다른 것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하늘의 뜻이겠지. 아,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어떻게 살라는 하늘의 뜻일까.'(p46)
장 상서 댁 마님마저 이러한 숙명론에 한 수저 크게 더해주고 있습니다. : '그럼 네 이름은 물속에 들었다 나와 깨끗하니 새 삶은 산다는 뜻이로구나. …… 청이의 성인 심자는 본래 가라앉을 침(沈)자다. 큰마나님은 이를 염두에 두고 이름풀이를 한 것이다.'(p69) --- '물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날 운명'이 아예 이름에 박혀 있다라는 거죠.
게다가! 개울에 빠졌던 심봉사를 건져줬던 스님이 말했다는, 눈을 뜨기 위한 공양미가 삼백 석이었거늘, 중국 뱃사람들이 인당수에 바칠 (바로 청이의 나이인) 열다섯 살 처녀를 사며 내놓는 돈이 또 삼백 석인 겁니다. : '청이는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는 느낌이다. … 삼백 석이라니. 그건 아버지가 몽운사 화주승에게 약속했다는 그 삼백 석이 아닌가.'(p82) …… '운명이라면.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p94)
하지만 무엇보다! 저에게 청이가 '숙명론자'임을 보여주었던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다음의 구절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청이나 윤상이나 똑같이 이 세상에서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로 자랐다. 뜻을 만들기도 전에 운명이 자기들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다른 점이 있다면 윤상이가 자기 운명을 바꾸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면 청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 밤하늘을 보면 청이는 저 너머 깊은 곳에 자기보다 더 크고 높은 힘이 있어 자기를 마음대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겠지. 복사골에서 태어나 복사꽃처럼 없이 스러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의 몫이겠지.'(p129)
위의 인용에도 나와 있지만, 윤상이란 인물은 작품 속에서 내내 확실한 '조명론자'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만약! 작가가 이 이야기를 가지고 누군가가 '어떻게 자기 운명을 바꾸어갔는지'를 말하고자 했다라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당연히 심청이가 아니라 윤상이가 되었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작가는 분명히 심청이가 '어떻게 자기 운명을 바꾸어갔는지'를 말하고 있는 이야기라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작가는 뜬금없이 몇몇 곳에다 심청이의 의지가 깃든, 그러니까 심청이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겠노라 결심하는 장면들을 넣어놓고 있습니다만,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이기만 하는) 그것들로는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어보이기만 합니다. 즉! 작가 스스로가 (심청이가 숙명론자이냐 조명론자이냐 /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심청이가 되어야 하냐 윤상이가 되어야 하나에 대해) 작품을 써가는 도중에도 여전히 막!!! 헷갈려하고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거지요. : '공양미 삼백 석에 내 생명을 바쳐야 하나?' 오매불망 눈 뜨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위해 자기를 송두리째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삶을 결말지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이유가 되는 게 아닐까.(pp90-91) --- 이러한 고민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만으로 심청이를 '조명론자'라 분류하는 건 너무도 고민없는 단순한 결론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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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빌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까. 세상이 열린 이래 사람들은 그럴 수 있기를 바라왔다. 사람의 의지를 떠받드는 이들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게 없다고들 했다. 사람은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만을 제출하는 법이라고, 제법 그럴 듯한 논리를 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즐겨 하늘에, 하느님께, 상제께 빌었다. 자기의 불완전함을 믿고 그 결핍을 채워줄 초월적 존재를 믿었다. 사람들은 그 바람만으로도 그 사이에 이루지 못했던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발원에는 그것은 자신의 내적 신념으로 바꾸어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었다.(p363)
작가 스스로가 '조명론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가치관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 이 소설의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자체가 모두 '숙명론자'들 뿐입니다. 기껏해야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인 윤상이만이 (작가의 의도를 100% 작가의 뜻대로 표현해/따라주고 있는) 유일한 '조명론자'이죠. 게다가!!!
작가가 원작에 (한 줌 흙마냥) 더해놓은 판타지적 부분은, 마치 (우스운 꼴의) 자가당착처럼, 이 소설 「연인 심청」이 '숙명론'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도록 한번 더!의 망치질을 하고 있습니다. --- 그 판타지의 핵심인 심봉사와 심청이의 관계라든가, 작품의 중간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화라는 인물 모두 결과적으로는 딱!!! 거스를 수 없는,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의 그런 '숙명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분... 계속 헷갈리고 있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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