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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남자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중.
사학자에겐 역사적 상상력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요. 그러하기에 사학자에게 '상상'이란 기껏해야 접착제의 역할만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엄격함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소설가에게 '역사적 상상'이란 단순한 접착제가 아닌, 깨어진 청자 조각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되어지기도 하는 주재료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 접착제의 사용이 그처럼 과다하더라도, 반드시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충분히 수긍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난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 테구요.
비록 일부는 상상력으로 채워진 픽션이지만 이 소설은 이렇게 명백한 사실들의 연결고리 속에 탄생했다. 모든 이야기의 원형들이 역사적인 근거 속에서 태어났다.(p519)
누군가가 펼쳐놓는 "역사에 대한 상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 상상이 충분한 논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한낱 억지스러운 헛소리로만 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 "역사란 우연을 가장하여 때론 치밀한 각본을 만들어내기도 한단 말이야"(p265)라는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이 책 「한복 입은 남자」는 단지 몇 조각의 청자 조각들만을 가지고, 작가가 아주 작정하고 엄청난 양의 접착제를 사용해 완성해낸 작품임에도, 그 흐름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억지스럽다란 생각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작가는 아예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사용한 접착제가 청자의 주재료일 수도 있다는 착각까지를 주고싶어 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요. 헌... 데!!!
이 작품을 다 읽고난 후, 다시 되돌아보는 시점에서도 과연 그러한 생각들 - 억지스럽지 않다 & 착각하게 된다 - 이 유효하게 남아있게 되었을까요? --- 작가가 이 소설에서 사용한 몇 조각의 청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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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
이 소설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라는 그림에 대한 의문으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록에 의거, 그림 속 주인공이 노예상인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간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어린 소년이다란 것이 이제까지의 정설이었지요. 여기서! 소설 속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부터 자신만의 가설을 세워보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가는 와중에 안토니오 꼬레아가 어른의 의복을 소지하고 다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가설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이 서양으로 건너간 게 아니라 조선 초기에 누군가 서양으로 건너갔고, 그 후손 중에 하나가 선조의 옷을 입고 루벤스 그림의 모델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루벤스의 그림 모델은 안토니오 꼬레아가 아니라 제3의 인물인 것이다.(p19)
②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
다빈치의 스케치 중 많은 것들이 전대의 것을 확장하거나, 중국에서 건너간 물건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주장이 있다. 비행기라고 해서 그러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겠지. 비행기를 직접 만들었거나 만드는 법을 알고 있던 누군가가 유럽으로 건너가 다빈치에게 그 설계도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게 만약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이라면 <한복 입은 남자>가 품고 있는 복식이나 배 그림에 대한 의문이 일시에 풀리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적어도 50년, 혹은 100년 전에 누군가 또 한 사람의 조선인이 서양 땅을 밟은 게 틀림없다.(p28)
③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
세종 연간에 승승장구했던 장영실도 말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뛰어난 손재주로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도 세종대왕의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파면을 당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가마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세종 24년인 1442년 3월에 일어난 일이었다.(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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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진석의 의문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만, 이내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차 설계도의 유사점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장영실이라는 천재 과학자의 실종에 주목하게 되지요. --- 얼핏 보면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의 청자 조각들은 엘레나라는 여인의 등장과 그녀가 건네준 한 권의 고서(古書)로 인해 서로 이어지게 됩니다.
강배라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고서를 번역해 본 결과, 1443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쓰여지기 시작한 그 비망록의 저자가 다름아닌 장영실이었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1443년은 바로 장영실이 가마 사건으로 궁에서 쫒겨난 이듬해였지요. 하지만!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비망록의 저자가 장영실이라 해도, 과연 그 시대에 그가 어떻게 그 먼 곳인 이탈리아까지 갈 수 있었느냐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 장영실과 이탈리아, 그리고 훗날 레오나르도 다빈치까지 이어지는 연결의 핵심 고리로 바로 명나라의 정화 대장이 등장하지요.
조선왕조실록엔 장영실이 명나라에 여러 번 갔다는 기록에 나와 있는 걸 보면 그 당시 명나라의 유명인사였던 정화 대장과 접촉했을 개연성도 충분하고...(p352)
소설 속 주인공 진석은 마치, 이 소설의 작가가 그러했었을 것처럼, 정화 대장과 장영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상대적 나이가 맞아야 함을 다시 고민합니다만 이 역시... 역사적 사실과 추론에 근거해 보면 어렵지 않게 풀립니다. --- 1459년 어느 늦가을, 동양과 서양의 두 천재가 만났을 당시, 장영실은 50대 후반이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7살의 꼬마였었다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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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대장과 장영실의 관계가 급속히 가까와질 수 있었던 이유로 저자는 두 사람간의 여러 공통점을 들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노비 출신인데다가 조상이 귀화인이다. …… 둘 다 노비의 신분에서 세종과 영락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미스터리로 남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 둘의 인생이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다. 이것이 역사의 필연일까?(pp267-268)
작가는 이러한 '역사의 필연'이라는 장치를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만남에 다시 한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었기에 신분제의 사슬에 얽매인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었던 영실에게,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다빈치가 단지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자신의 그러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주었다라는 거지요. --- "동양이고 서양이고 어찌하여 신분제란 것이 있어 앞길이 창창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가."(p434)
다빈치의 스승으로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영실의 가르침을 받은 다빈치는 천문과 기계설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게(p436)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거의 모든 것을 장영실로부터 배웠었다라는, 사뭇 소설이니까나 가능한 파격적 주장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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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읽어가는 동안에는 거부감이 별로 들지 않는, 상당히 재미있는 역사적 상상이 펼쳐지고 있는 한 편의 소설이었습니다. 만만치 않는 두께임에도 술술 읽혀나가기도 했구요. 다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되돌아 짚어보니 문득...
● 역사에 대한 상상은 과연 그 한계가 어디까지여야하나에 대한 의문을 이 소설은 남겨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몇몇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자신의 상상'을 '개연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개연성'과 일치시키려면, 사소한 것에까지도 좀 더 신경을 썼었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구도야 작가의 유쾌하고 통 큰 상상력이라 재미나게 받아들여지지만, 소설 속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의 과도함은 자칫 전체적인 구도까지도 코믹한 판타지 소설스럽게 만들 여지를 가지고 있다 보여지기 때문이지요. --- 장영실의 뛰어난 재능과 그의 발명품들에 대해서는 상상의 부분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만, 이탈리아의 '피자'가 '동래파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부분에서는 웃지않고 넘어갈 수가 없더군요. 이런 사소한 건 그저 작가의 유머코드라 넘겨버린다 해도,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독자들이 진지하게 이 소설의 스토리를 이해해주길 바래었었다라면 (비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뛰어난 두뇌를 언급하는 걸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다빈치의 업적들이 장영실의 가르침 덕분이었다라는 해석이나, 심지어 "다빈치가 유럽에서 최초로 산수화를 그린 일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빈치는 장영실을 만난 게 분명했다"(p479)와 같은 부분은 결단코!!! 들어가서는 안 될 사족같은 부분이었다라 생각합니다.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서양 중심의 역사 해석을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저자 역시 뭔가 복수의 한풀이라도 하듯, 장영실의 공간을 너무도 확대시켜 놓는, 그 반대의 시각 - 사뭇 국수주의적이라 보여질 수도 있는 - 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라는 거지요.
영실은 물시계를 비롯하여 해와 달, 별자리를 이용한 천문 관측 방법, 화약을 이용한 총포 등의 성능 개량 방법을 알려주어 로마 기술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장영실에 관한 소문이 구라파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로마의 내로라하는 천문학가와 과학자들이 영실을 찾았다.(pp401-402)
심지어 장영실이 교황 앞에서 '지구는 둥글다'란 발언을 하여 교황청의 미움을 사게 되는 부분도 나오는데, 작가가 이 부분을 장영실과 다빈치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일 도구로만 사용하였다라 보기엔 할애해놓은 분량도 길거니와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장치도 아니기에, 역시나 작가의 과도한 반발이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사족스런 부분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 하나 정도는 반드시 삽입시켜야한다라는 것이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강박관념인 양, 이 소설에도 장영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한 여인과, 장영실이 다가갈 수 없는 또 다른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전자의 경우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수준으로, 게다가 소설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후자의 경우는 이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좀 과했다란 생각을 주지요. 아무리 2015년을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면들은 해당 시대의 사고를 분명 공유하고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노비와 공주'간의 러브라인이란 건 당췌... 이해할 수가 없지요. 좀 심하게 말해보자면 '애국심'과 '연정(戀情)'을 작가가 도통 구분하지 않은 채, 막 자기 맘대로 가져다 섞어쓰고 있다고나 할까요?
●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좀 더 심각한 문제점일 수 있는 점은 바로 장영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영웅화입니다. --- 그가 분명 천재적인 과학자였었음까지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 사실을 접한 각 개인의 몫이어야 하지, 누군가의 '교육'이나 '권유'에 의해 생성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훌륭한 인물이라 생각하게 되는 건 그 분들의 업적에 대해 스스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지, 교과서에 '우리는 세종 대왕을 존경해야한다'라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지요. 헌데!!! 작가는 (여기는 군대의 사상교재가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장(場)임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장영실이란 인물에 대해 '존경'을 해야하고 '재평가'를 해야한다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구조가 "명백한 사실들의 연결고리 속에 탄생했고, 모든 이야기의 원형들이 역사적인 근거 속에서 태어났다"라는 것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보니, 저자는 장영실이 로마에 간 것이 유럽에 종교개혁을 일어나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라는 이야기까지를 써놓으며 "이것이 역사적으로 단지 우연에 불과하단 말인가?"(p471)이란 과한 오바를 보여주다가 결국엔 "우리는 이때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런 천재를 우리 후손은 어떻게 잊어버렸단 말인가?"(p472)로 끝맺음하며, 우리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있지요. --- 작가는 정녕 이 작품이 계도의 목적을 지닌 일 도구로 사용되어지길 바랬던 걸까요? 이 작품을 독자가 그렇게 심각하게 읽어야만 하는 건가요? (좀 더 쎄게 나가보자면, <작가의 말> 말미에 나와 있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금 교과서에서 배우는 그 짧은 단면들이 우리 역사인가?"(p520) 부분은 사뭇 작가의 오만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 자... 대체 작가의 이 질문들에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작가의 소위 말하는 '문제의식'이란 것에 '문제'가 있다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가 남겨주는 교훈'을 일깨우는 역사 소설이 아닌, 새롭고 신기한 상상력을 펼쳐보이는 판타지스러운 소설의 말미가 왜 이렇게 갑자기 무섭게 돌변했느냐라는 거지요. 이건 흡사! 소설 「싸드」를 읽고, 그 내용에 홀딱 빠져 '미제국주의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라 광화문 한복판에서 소리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 아닐까요? 근데 그걸... 작가 스스로 하고 있다라는 게 더 웃긴다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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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 이야기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음모론으로 끌고 가려는 듯한 작가의 의도가 소설의 결말 부분에 너무도 티나게 보여지고 있다라는 아쉬움 또한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그거야 작가의 바램이 그렇다라 할 수 있다라 해도 --- 역사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아무리 사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자유스러울 수 있다해도 "이것은 역사적 가정이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다!"(p516)라는 작가의 말은 끝내... 작가 자신의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더라면 훨씬 더 이 소설을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로 기억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란 작가 김훈의 당당한 선언이 결코 제가 읽어본 그의 작품들 - 「남한산성」, 「칼의 노래」 - 이 소설이라 하여 그들에 대한 평가를 가볍게 만들지 못했다라는 걸 --- 이 작품 「한복 입은 남자」의 작가는 독자들에 대한 믿음, 결국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작가 김훈처럼 강하지는 못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實例)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그런 게 작가의 (소위 말하는) '클래스'란 걸까요?
※ 실재로 존재했었던 우리의 역사에 개입된 저자/작가의 상상들.
- 안소영 著, 「책만 보는 바보」
- 백승종 著,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 이문열 作, 「시인(詩人)」
- 문영숙 作, 「에네껜 아이들」
- 손정미 作, 「왕경(王京)」
- 김훈 作, 「남한산성」 · 「칼의 노래」
- 파전을 발음하기가 힘들어서 그녀는 항상 파전을 파자라고 불렀다.(p448)
- 「한복 입은 남자」의 작가는 이러한 사고방식 - 서양은 이성적, 합리적이고, 따라서 과학에 의해 대표되며, 동양은 감정적,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예술에서나 자기 거처를 찾을 수 있다 - 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수동적 모방자로서의 동양의 이미지를 전격적으로 뒤바꾸어 놓고자 한다.(p524)
- 「남한산성」의 '일러두기'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