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데뷔하고 만 40년이 되는 해에 펴내는 40번째 장편소설이 <소금>이고, 내 고향 논산에서 최초로 쓴 것이 <소금>이다... 라 말하는 저자 박범신C의 소설들 중 제가 읽어본 첫 번째의 소설이었습니다. 원래 '소설'이란 장르를 딱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도해서였겠지만, 아마.도 뭔가... '오래된'(?) 작가의 소설은 더더욱이나 나와는 맞지 않을듯 하다.란 선입견이 더 커다랗게 작용해서였을겁니다.

 

요즘 국문과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소설가가 박민규C라는 이야길 어디선가 들었었습니다. 저 또한 그 분 특유의 문법과 표현을 참 좋아하지요. 허나 제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오래된' 작가인 박범신C 또한 소설의 시작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햇빛의 칼끝에 눈이 찔려 얼른 검은 안경을 다시 썼다'라든가 '우리는 말없이 과수원 사이를 지났다. 너무 고요해서 과실들이 익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등과 같이 오래되지 않고 신선.한 표현들을 선보여주시더군요. 이러한 표현의 신선함이 소설의 가치를 나타내는 모든 것은 결코 될 수 없겠습니다만, 어쨌!든 대중소설은 항상 무언가 신선한 것을 원하는 (저도 포함되어 있는)대중들에게 그를 기억해 낼 만한 것 몇 개쯤은 남겨주어야할테니 그 요소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싶지요.

 

………………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여타의 문학작품들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아버지'라 표현해도 될 법한, 그야말로 희생의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사뭇 뻔한 캐릭터를 지닌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우리의 곁에) 있으나 없으나 한, 흐릿한 사람이 아버지였다. … "그 호텔에서 밥 먹던 그날 아빠도 거기 있었나?" 그런 식의 대화가 다반사였다.

 

● 박장대소 큰 소리로 웃는걸 보지 못했듯이 격하게 노여워하는 표정도, 특별히 슬픈 얼굴도 보지 못했다. 희로애락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늘 생각했다. …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이다,라고 누가 말하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의 어께나 허리를 오래 주물러야 했으며, 영양제나 기타 약들을 끼니때마다 한결같이 어머니에게 챙겨 먹었다. 아버지는 그럼 건강했던가. 그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와 병원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왜냐구 누가 물으면 그녀들은 이구동성 대답했을 것이었다. "아빠잖아!"

특히나 이 소설의 주인공격인 선명우C는 본인 스스로를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그러했었듯, 자신의 무언가를 위해 살지 못하고 아내와 세 딸들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는, 게다가 그 아내와 딸들 또한 그를 위와 같은 존재로만 여기고 있는 오로지 '아버지'이기만 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문학작품이기에 송호근 교수가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에서 이야기했던 현실 속 아버지들보다 더한 측은함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지요. 선명우C 뿐 아니라 소설의 화자인 시인의 아버지 또한 패전을 실감하면서, 퇴로가 없어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전사처럼, 그렇게 부두로 갈 수밖에 없었1던 존재로 그려지고 있으며, "애들이 있으면 죽을 권리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야!"라든가, '모든 아버지가 다 그래. 늙으면 무조건 버림받게 돼 있어. 과실을 따올 때 겨우 아버지,아버지 하는 거라고' 또는 '오늘의 아버지들, 예전에 비해 그 권세는 다 날아갔는데 그 의무는 하나도 덜어지지 않았거든' 등 처럼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전형적' 모습의 아버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다시한번 또한! 지금엔 '전형적'이란 단어를 그 앞에 붙여야만 할 예전의 소설들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든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그 마무리를 했었을꺼라 생각됩니다만, '오래된' 작가 박범신은 여기서 "<소금>은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취할 수 있는 소설 문법에서 비켜나 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써내고 있지요.

 

.

.

.

 

● 어머니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 그녀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종의 자본가였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자매의 몸종이나 청지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엄마 아빠'라는 이름이야말로 사람으로서 당신들을 이해하는 길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엄마! 아빠!'라는 말속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 엄마 아빠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절대적일 것, 일방 통행일 것이라고, 그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거역할 권리가 엄마 아빠에겐 없었다.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천리(天理)로서의 사랑을 지녀야 했꼬, 자식들은 그 사랑을 일방적으로 누릴 천리로서의 권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곁에 두고 살지 못한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곁에 두고도 다 갖지 못한 어머니가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이기 때문에 … 철저히 '사람'으로서의 정보를 제한하면서, 오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당신들의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아버지들에 대해 그 자식들의 후회(?) 혹은 아쉬움 또한 빠지지 않고 위에서 처럼 나타나고는 있지요. 허나 저의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이러한 후회는 언제나 그 후회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때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기에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니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와 그녀는 다르지 않았다'라는 표현마냥 후회의 당사자들에겐 그 후회의 무게가 더더욱 무겁게만 느껴지게 됩니다.

 

어떤 부류의 젊은 저들은 고아가 되는 게 단지 부모다 획득해 오는 과실이나 사냥감을 잃는 일이라고 착각할는지 모르지만, 만약 고아가 되는 게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녀는 단호히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잃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표현은 (사라짐 이전까지는) 딸들의 소비를 부족함없이 충족시켜주었던 아버지 선명우C의 딸, 시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잃'는다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 그런 경제적인 면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러하기에 딱히 일반화시키기엔 다소 많음 무리가 따른다.라 생각합니다만, 이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로 '과실을 따올 때나 겨우 아버지, 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들임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

 

 

딱히 극적인 반전.이라 부를 수 없는 과정을 거쳐... (허나 이 부분이 소설의 주요 포인트이기에 제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듣게되는 선명우C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내던지고 싶었던 메세지들이 아닐까싶습니다.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겠다고 해도, 핏줄이므로 아버지만이 비난받는 이 구조는, 체제의 입장에선 양보할 수 없는 규범이었다. 그 대신 자식들은 늙은 아버지를 돌볼 필요가 없었다. 여력도, 시간도 없다고, 그러니 늙은 아버지는 체제가 돌봐야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 특히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 핏줄이란 말엔 누대에 걸쳐 만들어온 이데올로기에 의한 어떤 속임수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핏줄이라는 이름의 맹목적이고 소모적인 관계망에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았다.

제가 제 임의로 짜집기한 문장들입니다만, 결국 작가는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근원적인 화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선명우C의 입에서 위와같은 말들이 나올 수 밖에 없었었으며, 더욱 직설적으론 이는 또한 자본에 대한 나의 '발언'을 모아 빚어낸 세번째 소설이란 표현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기도 하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주장만 하는 일을 결코 생겨나지 않을겁니다. 저자는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선명우C의 가정을 결국 파탄시킨 것이며, 선명우C의 선택은 그러한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양인 '가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일말의 저항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인 19세기에 마르크스를 통해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무자비해질 수 있는가를 보았었지요. '그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물론 '개인의 수준'에서 그러한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구조'에 대한 correction을 시도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한번! '그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현재'에 보여주는 일 해결(?)방안이란게 겨우(!) 가족으로부터의 도피로 그려지는 것에는 사뭇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개그는 개그일뿐"이란 말처럼 "소설은 소설일뿐"이고 그러하기에 현실에선 그려질 수 없는 것들을 그려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설은 소설일뿐"을 사뭇 벗어나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대리인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차라리 소설의 분량을 더 늘려서라도 더욱 정교하게 '이럴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상황을 묘사해준다던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생각을 약간만 더 애매(?)하게 표현해주었더라면 차라리 이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더 많은 생각의 여지를 남겨줄 수 있지 않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

 

뭐... 위와 같은 저 개인적 불만(?)과 지나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정 단어에의 두드러진 혐오(?)등만 제외한다라면 무척이나 빠른 전개, 참으로 다양하고 매력적인 등장 인물들(저 개인적으론...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그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응?) 마음속에 가져보았을 그런 '누나'인 세희라는 인물이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과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의 과거사 등 소설이 지닌 이야기.만으로서는 상당히 재미있고 흡인력 또한 짱짱.합니다. (저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자신없습니다만, 어쩌면 그러.하기에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한 것이 과도하다.라 느껴졌을 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로서의 이 소설은... 참 훌륭하거든요.)

 

 

염전을 하던 아버지가 결국엔 소금기 부족으로 죽게되는, 그런 기억하기 싫은 자신의 과거 탓에 '다시 남편이 되기보다 아버지가 되기 싫어 결혼은 안할꺼야'라 말했던 소설의 (이혼남인) 화자 시인은 허나 결국... "내게도 아버지가 필요해요!"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를 아니떠올려볼 수 없더군요. 제가 과연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려하니 아버지가 곁에 없다'라 말할 수 있는건지까지는 자신 없습니다만, 우스개 소리로 나란히 누워있는 종원군에게 '종원아, 너가 이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을 쯤에 어쩌면... 아빠가 니 곁에 없게될지로 몰라'란 나름 진지했던 저의 말에 '난 아빠 다 이해해. 근데 아빠는 지금 내 옆에 있잖아!'라 웃으며 말하는 녀석을 보며 그 순간!!! 정말이지... 소설 속 문장인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신맛,쓴맛,짠맛. ...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가 제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일어나더군요. 저 또한... "내게도 아버지가 필요해요!"라 마음으로 외치고 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허나 잊지 말아야 할꺼, 다시한번 저 또한... 이미 누군가에겐 그 '아버지'이더란 거.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