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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ㅣ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은 '삶은 나의 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지만'이란 말을 했습니다. 경제학의 동학모형에서도 연구자의 의도대로 설정되어지는 initial point가 어디냐에 따라 그 모델이 되는 경제가 나아가는 길이 많이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일생,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세상에 태어나게 될 그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를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첫 initial point는 그 어떤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서울에서 태어났고, 교육의 중요성을 충분히 아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났으며, 다행히도 저의 부모님은 경제적으로도 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거의 모든 것을 뒷받침해주실 수 있으셨었다'란 저의 그 initial point야말로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가장 (어쩌면 '모든'일 수도 있겠는)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저는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간혹가다 "개천에서 난 용"의 이야기를 듣고 보게도 됩니다만, 모든 개천에서 다 용이 나오는 것이 아니듯, 또한 저 스스로 제가 만약 그 개천에서 태어났었더라면 '그래도 난 용이 될 수 있었을거야'란 호기는 도저히 제 것이 될 수 없다라 자인할 수 밖엔 없기 때문이지요.
요즈음도 그러할진데, 신분 사회가 개개인을 옭아매고 있었던 조선 시대에는 오죽했었겠습니까. 이 책의 주인공 이덕무 또한 서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이 품고 있는 뜻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도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는 신분 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살아야하는 '자신의 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닌 삶이 지닌 근원적인 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라나면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인 삼강오륜조차도 서자 출신인 자신에게는 지켜낼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됩니다.
● 군신유의 - 의리로써 임금을 대할 기회가 (서자인)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나에게 군주는 그저 아득히 먼 존재일 뿐이었다.
● 부자유친 - 아비로서의 지극한 정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 아버님과 나에게는, 그리고 나와 나의 아들에게는, 부자로서의 친근함 이전에 흐르는 감정이 있다. 서자의 처지라는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 장유유서 - 우리 같은 서자 출신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라도, 본가의 어린아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써야 한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듯이 그는 삼강오륜의 "붕우유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위로를 받지요.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륜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한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오직 이 항목뿐이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곳에서도 우리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이었다.
네... 이 책은 정조 시대를 살았던 이덕무란 사람의 자서전인 「간서치전」을 중심으로 이덕무와 그의 벗,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처럼 다져낸 책입니다. 예닐곱 살때부터 책을 가까이 했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등불을 마음대로 켤 수조차 없었던 빈궁한 삶이었기에 해가 드는 동안이면 방에 뚫린 동,남,서편의 창에서 들어오는 해를 따라 책상을 옮겨가며 책을 읽었다하여, 사람들로부터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란 별명을 얻게 되었지요.
이 책 「책만 보는 바보」의 저자는 어느 날 만났던 이 「간서치전」속의 이덕무에게 뭔가 모를 동질감을 느꼈고,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듯 이 책을 썼다라 말하고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도 또한 다 읽고나서도!!! 저자의 '창호지'가 너무도 은은하고 그윽했었다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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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은 사실 별 것 없습니다.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중심으로 근처에 살고 있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인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백동수, 그리고 이들이 스승으로 모셨던 박지원과 홍대용, 이들간의 우정과 이들이 품었던 이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조선 시대판 '성공스토리'라고나 할까요? 이덕문의 벗들은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서자 집안의 출생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출생 신분에 주저앉지 않고 요새말로 하자면 '끝없이 학문의 길에 정진하여' 드디어 관직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임금이었던 정조의 사랑까지 받는 그야말로 해피엔딩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안소영C가 입힌 '은은한 창호지'는 이 뻔한 스토리를 너무도 잔잔한 감동으로 받아들이게 해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네요.
벗들과의 '우정'이 주된 스토리이기에 책의 곳곳에는 그야말로 '남자들의 우정'에 가슴 찌릿한 부러움을 자아내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생계문제로 인해 이들을 떠나 혼자 북쪽 지방의 기린협이라는 산골로 떠나게 된 백동수를 보내며 박제가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은, '살기는 이루말할 수 없이 더 좋아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통로도 훨씬 더 많아진' 요즈음의 세상에 과연 이런 우정이 있을까싶은 생각을 하게 해주더군요.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 우리도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벗이었습니까? …… 벗이여, 떠나십시요! 저는 지난날 가난 속에서 벗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대와 저의 사이가 어찌 가난한 날의 벗에 불과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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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어디까지가 '문살'이고 어디부터가 '창호지'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저자가 다듬어낸, 일생을 마감하는 즈음 이덕무의 다음 고백은 이러한 선조들이 내가 태어난 땅, 몇백 년전에 살다갔었음을 자랑삼아 여길 수 있게, 그리고 또한 '살기는 이루말할 수 없이 더 좋아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통로도 훨씬 더 많아진'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그럼에도...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해주네요. 이 책... 참 좋습니다. 종원군이 중학생이 되면 아마도 이 책을 가장 먼저 그에게 건네주게될 듯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한번만 더 '다시 한번!!!' 이 책에 붙여놓으신 그 '은은한 창호지'의 매력에 푸욱~ 빠지게 해준 저자 안소영C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빼놓을 수는 없겠고 말이죠.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 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하셨던 이덕무 선생의 독백이 책을 읽는다라는 것이 나의 근심을 해결해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요즈음의 '저'를 옛 사람인 그가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건네어준 한 마디같아 나름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책만 보는 바보'까지는 될 수 없겠지만, 다시 한번... 왜 이제껏 이런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지내왔던건지 또 아쉬움의 후회를 가져보게 되네요.
옛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옛 사람들이 살아온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들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었을까, 나라면 그 순간 이런 마음이었을 텐데하며, 겪어 보지 못한 아득한 옛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오는건, 내 안이 이미 그 시간이 스며든 까닭일 것이다. …… 나도 옛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들의 소망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면, 옛사람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아버님의 시대보다 나의 시대가 더 나아졌듯, 나의 아들들의 시대는 좀 더 나아지리라. 머지않아 세상에 태어날 나의 손자의 시대는 더욱 그러하리라. 우리의 후손은 못난 조상처럼,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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