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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가 막히도록 멋진 열 일곱편의 단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일일이 그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인상 깊었던 몇몇 구절들과 그 소설로부터 생겨난 저의 생각들을 간단하게 적어보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대신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천천히. 여러 번. 자근자근. 그리고 깊게 더 깊게 읽고 생각해보아야 할, (다시한번만 더) 그야말로... 사람의 속마음에 대해 써놓은 것으론 "이건 정말 예술이잖아!!!"라 소리치고 싶은 소설들이네요.
…………………
【 라쇼몽 】
『하인은 무엇보다 당장 내일 먹고살 궁리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즉 어찌할 바가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더듬어가며 아까부터 주작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었다. …… 어찌할 바가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면 수단을 가릴 겨를이 없다. 그러다간 토담 밑이나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뿐이다. ……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면 ……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시간이 흘러가도 끝내 '......않는다면'에 머물렀다. 하인은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이 '......않는다면'을 완결하려면 당연히 그 뒤에 붙어야 할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 선과 악의 갈림길. '자신의 생존을 위함'이란 이유는 그 갈림길에서 악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을 정당화 시켜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자신 스스로는 그렇다 할 수 있을지언정, 한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혹은 저지르고자 마음 먹은 죄에 대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당성을 과연 타인의 시선에서도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걸까?
◀ '어찌할 바가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이 문장에서 문득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가 떠오르다.
【 코 】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행을 어떻게라도 극복하게 되며, 이번에는 그것을 바라보던 쪽에서 웬지 섭섭한 마음이 된다. 조금 과장하여 말하자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긴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소극적이기는 하나, 어떤 적의를 그 사람에게 품게 된다.』
◀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만족하고 있는가? '과거'의 내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에 비해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 더 행복해져 있나, 아니면 오히려/안타깝게도 더 불행해져 있는걸까.
【 의혹 】
『아내는 산 채로 불에 타 죽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나는 거듭하여 무언가 외쳤습니다. "죽어!"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죽을게"라는 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주위에 떨어진 기와를 들어 아내의 머리를 계속 내리쳤습니다. …… (하지만) 저는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 불과 연기에 쫒기면서 언덕처럼 길을 막아버린 집들의 지붕 사이를 빠져나가 간신히 위태로운 목숨을 건졌습니다. …… 대지진 때 내가 아내를 죽인 것은 과연 어쩔 수 없던 것이었을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내를 죽인 것은 애초부터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죽인 것은 아니었을까? 대지진은 단지 나를 위해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 그때 내 기억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당시 내가 아내 사요를 내심 미워하였다는 저주스런 사실이었습니다. …… 대지진과 같은 흉변이 일어나 일체의 사회적인 속박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춘 때, 어찌 그것과 함께 내 도덕심도 균열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내 이기심이 불길을 올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기에 이르러 역시 아내를 죽인 것은, 죽이고자 죽인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혹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 이광수의 「무정」, 그 비극적 결말의 버젼.
【 귤 】
『터널 속의 기차와 시골뜨기 소녀와, 그리고 또 진부한 기사로 가득 찬 석간..., 이것이 상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해할 수 없고 저급하며 지루한 인생의 상징이 아닌 무엇이겠는가. …… 나는 이때 비로소 알 수 없던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고 저급하며 지루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 하루의 피로는 박카스 한 병을 마시면 해결된다는 걸, 하지만 일상의 피로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때로는 약국에나 가야 살 수 있는 박카스보다 더 쉬이 나의 주변 어디에서나 찾아지기도 한다는 걸... 다시한번 더, '하지만' 그 방점은 예의 "잠시나마"에 있을지도.
【 지옥변 】
말하자면 그 그림의 지옥은, 일본 제일의 화공 요시히데 자신이 언젠가 떨어질 지옥이었습니다. …… 불은 순식간에 수레 지붕을 휘감았습니다. …… 무의식중에 수레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 남자, 요시히데 …… 의 얼굴에는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두려움과 슬픔과 놀라움이 역력히 드러났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적이라도, …… 그렇게까지 괴로운 얼굴은 아니었을 겁니다. …… 병풍이 완성된 다음 날 밤에, (요시히데는) 자기 방의 들보에 밧줄을 매달고 목메어 죽었던 것입니다.
◀ 이 세상 <그 어떤 것,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그렇게 해서라도 꼭 얻고 싶은 그 '무엇'. <그 어떤 것,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 된다면? "만약" 그 상황이 "어쩌면.하며"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이라면"?
◀ 이 세상 <그 어떤 것, 그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는, 그렇게 해서라도 꼭 얻고 싶은 그 '무엇'. <그 어떤 것,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 된다면? "설혹" 그 상황이 "차라리.하며" 자신이 원했던 것"일지라도"?
【 미생의 믿음 】
나는 현대에 태어났지만, 뭐 하나 의미 있는 일을 이루지 못했다. 밤낮으로 멍하니 꿈만 꾸는 세월을 보내면서, 그저 무엇인가 다가올 불가사의한 것만 기다리고 있다. 마치 미생이 어두컴컴한 저녁에 다리 밑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렸던 것처럼...
◀ 올 것은 기어이 오고, 오지 않을 것은 여하하여도 오지 않는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 놈의 로또... --;;)
【 가을 】
입 안의 비린내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 노부코에게는 기다린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렴풋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 …… "자고 있네. 달걀을 사람에게 빼앗긴 닭이..." …… 노부코는 잔혹한 기쁨을 느끼면서 ……, 테루코의 눈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이 ……
◀ 남자는 잘 모른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자고 있네. 달걀을 사람에게 빼앗긴 닭이..."
◀ 남자는 모르는 척을 잘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자고 있네. 달걀을 사람에게 빼앗긴 닭이..."
【 덤불 속 】
◀ 약간, 아!!!주 약간만의 위치 변화로도 내가 찍은 사진은 다른 색감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물며... 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그들만이 아는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야...
【 남경의 그리스도 】
금화는 털투성이의 손님 입에 그녀의 입을 맡기면서, 단지 타오르는 듯한 연애의 환희가, 비로소 알게 된 연애의 환희가 강렬하게 그녀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아직 한 번도 중국요리를 먹은 적이 없단다." 남경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하자마자, 천천히 자단목 의자에서 일어나 멍하게 앉아 있는 금화의 볼에 어깨 너머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였다.
◀ "Sometimes,
Something wonderful
Happenes to
Somebody who really deserves it ... like YOU!"
고딩 시절, 연애편지에 많지는 않지만 한두 번은 아니게, 적어도 너댓 번쯤은 족히 썼었을 작업 문구였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는 건... 아마도, (후~) 여전히!!! "나만" 아는... 거라는 거. 허나 정말 중요한 건... (다시 한번 더) 여전히 그녀.들은 그녀 자신이 위 문구가 적힌, '나'를 발신인으로 한 편지... 의 유일한 수신인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거라는 거.
【 오도미의 정조 】
글쎄, 몸은 맡긴다는 것은 말이야, 여자 일생에 아주 큰 일이지. 그런데 아가씨는 고양이 목숨과 바꾸려고..., 그건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행동 아닌가? …… (그거야) 나비도 사랑스럽고, 마님도 생각한 건 틀림없지. 그래도 단지 나는 말이야... 뭐리고 하면 좋을까? 단지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말이야. …… 20년 전의 비 오던 날의 기억은, 이 순간 오도미의 마음에 애절할 정도로 확연히 떠올랐다. 그녀는 그날 무분멸하게도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신공에게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 동기는 무엇이었던가...? 그녀는 알지 못했다.
◀ 남자도 모르는데... 여자도 모른다 한다. (아무도 없는 동네, 어두컴컴한 집 안에 젊은 남녀 둘이 마주쳤다. 더구나 밖에는 비가 내린다... : <작품 해설 중>)
하지만...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도 다 알고 있을꺼라 미루어 짐작한다. 최소한!!! 남자가 모르는 건 사실일거다. 왜? ... 나는 남자.밖엔 되어보지 않았으니까.
【 인사 】
어느 여자의 기억..., 오륙 년 전에 마주친 어느 여자의 기억은 그 냄새를 맡기만 하면 굴뚝에서 내뿜는 불꽃처럼 곧바로 되살아났다. …… 그의 마음은 그녀와 마주칠 때의 기대로 가득했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말하자면 그의 마음은 강적과의 시합을 눈앞에 둔 권투 선수의 마음가짐과 같았다. ……………… 그렇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 '강적과의 시합을 눈앞에 둔 권투 선수'... 경기 전 작전은 15라운드까지 짜놓지만, 실제 경기는 대개!!! 2-3라운드에서 끝이 나고만다. 원래... 그런거.라고들 한다.
'돌아갈 없는 지난 추억의 다리...', 이를 이 책을 옮긴이는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 흙 한 덩어리 】
오스미는 아들의 죽음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 어쨌든 첩첩산중에 길이 하나 뻥 뚫린 기분이었다. …… (며느리인) 오다미의 죽음은 확실히 그녀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 오스미는 아직 일생에서 이 정도로 마음 편한 기억이 없었다. 이 정도로 마음 편한...? 그러나 기억은 확실히 9년 전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에도 이제 한숨 놓았다고 한 것을 생각하면, 거의 오늘 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피를 나눈 아들의 장례식이 끝난 밤이었다. 오늘 밤은...? 오늘 밤도 손자 하나를 낳아준 며느리의 장례식이 막 끝났다.
◀ 그렇게... '지금의 불행'도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그나마 행복했던 어느 한 때'로 기억되는 거고, 그렇게... 그런 생각은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난 후에야 드는 것이고.
【 세 개의 창 】
말하지 않아 슬픔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깊은 슬픔이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 슬픔은 그저 두 눈빛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든 혹 저렇게든... 사람이든 혹 사물이든... 모든 것에는 그 '끝'이 있나니, 그 모든 '끝'은 오로지 모두 아쉬웁기만 할 뿐.
…………………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그의 나이 35세 때, 부인의 동창생과 동반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의 변심으로 실패하고는 그 3개월 후, 자택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유서에서 자살의 이유를 '그저 막연한 불안'이라 썼다 하네요. 우리 대부분이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을 그 '그저 막연한 불안'이 우리에겐 자살의 충분한 이유가 결코 될 수 없겠지만 어쩌면, 이런 작품들을 써낼 수 있었던 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면 어쩌면...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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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일생을 지배한 심정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수(愁)'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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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개의 창> 작품 해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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