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 -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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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위해 굳이 전력을 다해야 할까?" - 제임스 F. 웰스,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중 p482, 이야기가 있는 집, 2017.

사전(辭典)적 의미에 따라, '역사'란 당연스럽게 과거의 사건(에 대한 해석)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프리퀄로 되돌아보는 방식의 과거가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과거의 특정 시점이 '현재'였었을 당시에 그려볼 수 있었던 '미래'가 (반드시) '현재의 모습'이 되리라,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은,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그런 점이 포함되어 ---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역사 발전 단계론'에 대한 위 인용구의 질문이 (혹자들에 의해) 이른바 '마르크스의 역설'이라 (비아냥 어리게) 불리우지요. 그렇다고, 

"역사에 있어서의 필연이란 예측에 따라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따라 소급된 예측으로 구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 이문열, 영웅시대 중 p675, 민음사, 1984.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음이 증명된 '현재'에서 주창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승리 - 즉, 자본주의로 인류 역사는 마무리지어질 것이다! - 가 애초부터 역사적 필연이었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어제까지의 데이터를 포함한 오늘에의 예측 모형을 이용하여 '과거들'의 모습이 옳게 그려진다고 하여, 그 모형이 '오늘'과 '내일'까지도 옳게 그려낼 것이라는 추측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측'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이 뒤바뀐) 'backward induction' (혹은 '소급된 예측') 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이와 유사하게,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p153, 김영사, 2015.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성석제, 투명인간 중 p364, 창비, 2014.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현재가 (그것이 각 개인에게 행복/불행 혹은 만족/불만의 대상이건에 상관없이) 지금과 같은 모습의 '현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노력 혹은 방해가, 각 시대에 맞는 형태로 뒤섞여 깃들어 있다라는 (즉, system에의 변화가 부정기적으로 발생했었다라는) 점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잊고, '현재'가 마치 과거들로부터 생성된 당연한/필연적 디폴트 값이라 여기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시점에서야 '현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했었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에 의한 노력/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 이걸 계속 잊지 않고 새겨내기 위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겠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문자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 …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 여기에 소개된 사람 전부를 20세기 한국사의 주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최소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생을 크게 변화시키고 감정을 격발한 존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성숙한 제도와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주역이며,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가장 앞선 곳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존재들이다.(pp5~6)

책을 읽기 전, 목차에 표시되어 있는 스물 여섯 명의 인물들을 ①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②이름을 알고 있으나, 생애에 관해선 기본적인 내용마나알고 있는, ③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 의 세 카테고리로 먼저 분류해보았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①~③의 분류 속 인물들의 이력이 아닌, 그들이 왜 우리의 역사에 (가장자리에라도)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하는에 대해 , 읽기 전보다는 당연히 (어떤 면에서건)  잘 알게 되었다라는 ('만족'이나 '기쁨'이라고는 표현하지 못하겠는) '사회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졌음'을 스스로 느껴보았고, 

성석제가 '노력하고 있는 누군가'로 지칭했던 스물 여섯 명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이 책의 부제(副題) 속에 '가장자리'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 속의 "스스로 빛나는 별은 없다. 어디선가 빛을 받아서 빛나는 거다"란 대사처럼, 중심부가 중심부이기 위해선 반드시 가장자리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겠죠. 혹은 그 당시엔 그들이 가장자리였을 수 있겠으나, 그들의 존재로 인해 현재의 중심부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 그렇게 책은, '가장자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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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 -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 중 p123, 다산책방, 2016.

2022년 현재 시점에서도 놀라움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해갔었던 1900년대 초중반 시절 김향안의 삶, '물 좀 주소'라든가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로만 인지되고 있는 한대수의 삶 속의 파격적인 모습, 이전엔 알지 못했으나 이 책을 통해 보다 적확한 문장으로 새로이 다가온 '전태일' 이란 이름이 지닌 의미등을 비롯, 이 책에 담겨 있는 스물 여섯 명의 삶이 --- (일 개인으로서는 거스른다거나 바꾸어낼 수 없었던) 각기 당시의 삶에 주어진 조건들에 (저와 같은) 범부(凡夫) 마냥 그저 순응한 것이 아닌,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때로는 사회가 용인한 '범위'를 뛰어넘으며, 최선의 (감히 '노력'이란 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는) '무엇인가'를 행동에 옮겼던/'전력을 다했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이라는 규정 받기에 그 어떠한 부족함도 없겠으나... 

스물 여섯 명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이 책의 지닌 진짜 의미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진짜 의미는 아마도, 


"기억되지 못한 기억엔 늘 기억해선 안 되는 '역사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 - 역사채널 e, 역사 e의 김진혁이 쓴 추천사 중, 북하우스, 2013.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

대학입시에서의 낙방이라는 '인생 최초의' 실패를 겪은 후, 혼자 설악산과 동해안을 돌았던 그 때 그 시절,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감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감추고 제거하겠노라 다짐했었던 저의 그 때 그 시절. --- 제가 살던 목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천의 고강동에선, 저와 비슷한 연배의 한 사람이 가슴 속 감정을 차마 다 내뱉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라는 사실을, 저와 그가 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즐기지 못했었으나, 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라는 점에서) 너무도 달랐었다라는 점을 알게되었다라는 것 ---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 감춰져있던/감춰질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역사에 대한 안내가, '가장자리'라는 단어로 수식되어 있는 이 역사 속 인물들에게 주어졌던 '현재'로서의 당시에 대한 (다른 점에서는 '이해'일 수도 있겠을) 반성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이지 싶습니다.

법치의 근간은 누구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 없도록 법률이 사회와 그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법은 무섭고 어렵고 멀리 있는 것이기만 했다. 음습한 사회일수록 법은 강자의 '장난감'이거나 시민들을 억압하는 '몽둥이'로 사용되었다.(p135)

"그 모든 일들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라는 한 역사가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필요치 않은 상황인) '시민들을 억압하는 몽둥이'로 기능했던 대한민국 법치의 현실이 --- 제가 존재했었던 시절의, 제가 알지 못했었던 우리의 역사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는 사라졌겠으나) '기록'되어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건네주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의 일 가르침일 것이라 생각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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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중 p109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의 서문 중 재인용), 위즈덤하우스, 2012. 

'사회적' 존재란 것이, 일 개인만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될 수 없다라는 점은, 앞으로도 제가 더 배우고 깨쳐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단순한 머리 속 이성으로만 이해해왔던 위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바였던가를, 보다 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 수많은 '노력했던/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책이자, 가볍게 읽어낼 수 있었으나 여운만큼은 가볍지 않게 남는 책입니다.




[1] 네이버 국어사전은 '역사'를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2] 진화학자 스티븐 제이굴드는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어보라.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을 것이며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 예견했었죠.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의 치환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와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3] 이를 역설이라 규정하는 주장에 대해, '전력을 다한다'라는 전제 하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날/나는 것이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의 '전력을 다한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계급들 사이의 투쟁'으로 표현될 수 있겠죠. 이 역설에 큰 의미가 없음은 다음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마르크스는 '대체로 말해', 인류 사회가 원시공산사회 →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 (하지만) 모든 나라나 지역이 이런 단계들을 밟았다든가 밟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 pp142~143, 돌베개, 2014.

[4]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에 필연이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p342, 김영사, 2015.

[5] 회귀 모형이 비교적 정확한 '오늘' 혹은 '내일'에의 예측값을 산출할 수 있으려면, '과거-현재-미래' 로 이어지는 time-series 상에 그 어떤 system의 변화도 없어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대부분 깨어지곤 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질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6]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7] 저자가 쓴 '대문자 역사'의 의미는,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엘리트의 이야기"란 유발 하라리의 규정과 같은 맥락이겠죠.

[8] "혼인을 반대한 부모와 연을 끊고자 그녀는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다. 서양의 풍습을 따른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김환기의 성을 따오고 이름은 김환기의 아명을 가져다 썼다. 김향안의 결혼과 개명은 여성의 사랑마저 봉건적으로 통제하려는 전통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고, 사랑을 위해 어떤 장애물이라도 뛰어넘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의 발현이었다. 단호한 결심과 폭풍과도 같았던 실천을 통해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었다."(p32)

[9] "다른 남자와 재혼한 전 부인이 이혼한 뒤 딱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한대수는 (재혼해 함께 살고 있었던 당시의 부인인) 옥사나에게 전 부인의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한 뒤 셋이 함께 한집에서 산 적도 있다."(p80)

[10] "1970년대 한국 노동 운동을 이끈 핵심 세력이었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된 것도 그의 죽음 직후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남긴 전태일의 분신 이후 청계천에서도 비로소 기계와 사람을 구별했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는 물론 한국 사회의 시민 모두가 전태일에게 일정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p210)

[11] "역사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기 기록한 이야기"(p9)

[12]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중, 2010,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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