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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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실려 있는 다섯 편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패러프레이즈'격의 소설들입니다. 비교적 (비신앙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①소돔과 고모라("소돔의 하룻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유명할 듯한) ②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사랑이 한 일"), 그 외에도 ③야곱이 형 에서를 가장해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가로채는 이야기("허기와 탐식"), ④아브라함의 아이(이스마엘)를 가졌던 하갈의 이야기("하갈의 노래"), 마지막으로는 ⑤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이야기("야곱의 사다리") 들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해낸 패러프레이즈의 소재들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이 소설집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의 일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났다. …… 나는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이나 그 요구에 순종하는 아버지 대신 그 요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지는 아들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믿으려고 했다.(p244) - <작가의 말> 중

비기독교인에게는 물론이고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에게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의 기준에서 평가한다면) 결코 쉬울 수 없을, (그래서 가장 유명하기도 혹은 가장 악명 높기도 한) '아케다'에 대한 이해가, 작가 스스로에게도 하나의 도전이었던 듯 합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창세기의 다섯 이야기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면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단연코)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은 설정 측면에서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보다 현실적인 감정 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도, '과연 아브라함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일까?'란 도전적 질문을 던져 주고 있지요. 

우선, 이 '아케다'에 대한 후대인들의 (제가 읽어 본) 비판들을 적어 보자면 ---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카인을 통해 "대단한 개자식"이라는 짧은 욕설 한 마디를 적는 것으로, 외려 그 황당함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스틴 스웬슨은 "사라와 이삭이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라며, 행위의 주체자인 아브라함이 아닌 (직접적 피해자였던) 이삭과 (간접적 피해자였던) 사라의 입장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모두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신을 비난하고 있지요.

"결국 신이 농담을 했던 것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유혹하고' 믿음을 시험했을 뿐이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중 p365, 김영사, 2007.

위와 같은 비난/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공식적인 답변이 있을 리 만무할 듯 하나, 일단 (모태신앙인이시자 여전히 성경을 매일 읽고 계시는) 제 어머님께 여쭤본 바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을 보다 더 굳건케하시려는 뜻을 보이신 것이라라는 (제 이해가 정확한지는 자신 없으나) 설명을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공식 의견은 아니겠으나, 한 목사님의 설명을 링크 걸어놓겠습니다. " "'아케다'와 하나님의 외면")

"성서의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 성서는 신앙의 책으로서, 삶의 모든 경험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신앙인들이 쓰고, 베끼고 편집한 것이다. 성서가 말한 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실에 가깝든 가깝지 않든, 성서의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신앙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크리스틴 스웬슨, 가장 오래된 교양 중 p56, 사월의책, 2013.

제 어머니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신앙의 눈을 제가 갖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비신앙인들에게도 (적어도 그럴듯하게정도로는) 이해시킬 수 있는 어떤 인간적 관점의 설명/해석이 궁금했었었고, 작가 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로부터 기어이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이해'의 일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 - 백승종,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중, 지식의풍경, 2000.

기에 실린, 다섯 편의 창세기 속 이야기들에 대한 작가 이승우의 '패러프레이즈'가, 성경의 한 구절과 그 다음 구절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큰 간극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상상력은 과연,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브라함의 '아케다'를, 더 구체적으로는 주제 사라마구가 제기했던 의문에 대한 (답변이 있을 수 있다면) 답변에 어떠한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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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매력적인 표현인 '사랑이 한 일'이라는, 이 작은 소설의 제목은 우선! --- 자신의 아들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이에 순응했던 아브라함의 결정,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지 않았던 이삭의 순응 모두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는 작가 이승우의 해석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더라도 조금만 사랑했다면 신은 나에게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더라도 조금만 사랑했다면 너를 바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p100)

창세기에는 그저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라고 단순하게 아들의 출산을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정도만 기술되어 있습니다만, 100세가 되어 낳은 독자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었을지는 쉽기 짐작할 수 있지요.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 적음으로써, 애초부터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임을 미리 독자들에게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이 하나님의 진짜 요구인지 혹은 자신을 시험하시려는 일종의 테스트인지 알 수 없었을 아브라함의 고뇌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지요. 그냥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진행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시점과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는 시점인) 두 행위 간의 간극 도중, 아브라함의 내면에서 있었을 수도 있을 심적 고뇌를 결국에는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작가의 상상은 '사랑'으로 꼽고 있는 것이죠. 

신은 나에게 나를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 그랬겠느냐. …… 나에게 속한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걸 알았기 때문이다. …… 신이 원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었다. 지나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해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그것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 덜 사랑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불가능한 요구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p101) ……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신이 어디 있겠느냐.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가 어떻게 시험이 되겠느냐.(p98) …… 사랑하지 않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p99)

여기까지만 보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 했던 하나님의 명령이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일 뿐, 아직은 '사랑이 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행여,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 자식 이삭을 향한 사랑보다 더 컸기에, 이 역시 '사랑이 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두려움'이 가미되었을 수도 있겠는) '경외'일 수는 있어도 '사랑'이라는 단어로 쓰여질 수는 없다고 이해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어린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의 배를 갈라 불 위에서 태우는 번제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를 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비난처럼)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라고도 표현되는 '아케다'의 피해 당사자인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번제의 제물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삭의 감정을 성경을 단 한 줄도 적고 있지 않습니다만, 작가 이승우의 패러프레이즈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나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 적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p102) …… 신은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 분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아들에게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 분이지요. 신이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거라고 나는 생각해도. ……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려워요. 더 어려워요.(p103) …… 사랑하는 무엇이나 누구를 바치라는 요구 또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이가 바치는 것을 받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무에게나 바치라고 요구하는 않는 것은 아무에게서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바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의 표현이에요.(p104)


브라함과 이삭이 각기 토로한, 자신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가치관/생각으로 인해 거부감이 드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제가 풀어내지 못했었던 (각주 [8]에 기술되어 있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지적에 대한 의문은 ('신뢰'의 문제가 아닌, '사랑'의 차원으로 이해함으로써) 해소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제목이자, 이 작은 소설의 제목인 '사랑이 한 일'이라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매우 매력적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시험 대상자들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었어야 했던 일들은, 그들이 보기엔 그저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일 뿐이죠. 

인간만큼 축소된 신은 우리들이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를 시험에서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그 자리에 시험하는 이는 없었다.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p118)

제가 이해한 바 이 소설의 제목은 --- 명령자로서의 신/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 여겨지는) pp113~115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왜 이런 시험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상상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성립될 수 없었던) '사랑이 한 일'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기어이 완성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이 부분을 인용하지 않는 건, 여기가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해서이지만 그보다는, 앞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감정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하등의 무리가 없었었거늘, 작가가 풀어놓은 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시험하는 행위나 시험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사랑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으나, 그 시험의 (출제자로서 혹은 수험자로서) 당사자가 된다라는 것/되기로 결심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한 일' 이라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사랑의 매'라는 단어가 떠올랐었습니다. 작가 이승우가 말하는 의미를 지닌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매'와 같은 되도 않는 용법으로 사용된다라는 것에,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는 짜증이 올라오더군요.)


"성경은 …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인식 내용(cognitive contents)'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비춰서 내 속에 있는 내 자신의 어떠함을 보고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다. 매일매일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도록 도와주는 '일깨움(evocativeness)'을 위한 것이다. 한 가지 시각으로 고정된 절대적 해석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전통적 용어로 하면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매일매일 성경의 더욱 새롭고 깊은 뜻을 찾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 오강남, 「예수는 없다」 중 p124, 현암사, 2017.

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소설들은 아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낯설고 지루한 사변으로 읽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문인 성경을 읽지 않고, 이처럼 소설이나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사뭇 위험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서) 해볼 수 있는 (의도에는 없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성경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을 떠나, 소설이라는 형식의 문학으로만 보아도, 

이 성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손님은 없다. 오는 사람이 누구일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올지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릴 수 없고, 올지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p16) …… 롯은 나그네가 혹시 올까봐 걱정하며 기다리고, 그래서 조마조마하고, 그러니까 그의 기다림은 기다림이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다림이고, 성안의 남자들은 나그네가 자기들 앞에 나타났을 때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기다리고, 그래서 느긋하고, 그러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기다림을 선취한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은 안절부절못하지만, 기다리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은, 흥분을 예열하고 있다.(p19)

<소돔의 하룻밤>과 <사랑이 한 일>에는, 위의 인용구와 같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만나보았었던 문체의 문장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런 류의 만연체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으나, 주제 사라마구 / 구병모의 만연체와 김훈의 음조(rhyme)를 너무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전에 읽었던 생의 이면 속, 현재에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문장들로부터 받았던 어색함이 언제 있었냐는 듯한 반가움을 이 두 소설에서 찾을 수 있기도 했었죠. 특히,

위에 인용해 놓은, p100에 실려 있는 문장은,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매력적이지만, 소설 속에서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정말 엄청났었었습니다. '올해의 딱 한 구절'로, 아직까지는 단연코 선두!


※ 읽어 본, 작가 이승우의 작품 : 생의 이면

※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들 : 가장 오래된 교양 · 만들어진 신 · 카인」 · 예수복음


[1]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쓰고 풀어 쓰는 것."(p243)

[2] "책의 한복판에 있는 세번째 단편 <사랑이 한 일>은, 서사의 흐름에서 볼 때에도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건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중요한 사건인 것이 아니라, 그를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는 기적이어서, 구약의 믿음 체계에서 이념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 <해설> 중 p218.

[3] "이삭을 묶음" - 크리스틴 스웬슨, 「가장 오래된 교양」 중 p236, 사월의책, 2013.

[4] 주제 사라마구, 「카인」 중 p95, 해냄, 2015.

[5] 크리스틴 스웬슨, 위의 책 p236.

[6] 이런 관점의 비판은 또 있습니다. : "애초에 아브라함은 갈등을 하기나 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와 아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마침내 신앙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에게 축복받는다는 '이삭의 희생' 장면만을 보면 제법 감동적이지만 앞서 그가 해왔던 일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그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내를 왕에게 바칠 때도, 애인과 자식을 황야로 내쫒을 때도, 뒤를 이을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으니 고민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이 모든 시련을 아브라함이 겪는 것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항상 쓰라린 일을 겪거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나 첩이나 아들이었다!" - 나카노 교코, 「명화의 거짓물」중, 북폴리오, 2014.

[7] "나는 전쟁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언 중 일부.

[8]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지요.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163.

[9] 창세기 21장 8절 중.

[10] 창세기 21장 1절 중.

[11]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창세기 21장 12절은, 어쩌면 아브라함에 심적 고민조차 하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도 해줍니다.

[12] 이삭은 그저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제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아버지의 중의적 답변을 듣습니다. (창세기 21장 7~8절)

[13] 성경이 이삭(이나 사라)의 감정에 대해 아무런 기술이 없는 것은, 어린 아이나 여자의 의견은 무시되어 마땅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에 의한 것일 수도 혹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는 체 번제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p223)라는 해설자의 의견처럼, 그것이 성경의 기자(writer)에게도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봅니다.

[14]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섞였다. 칸이 오면 성은 밟혀 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는 말이 부딪쳤는데,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밟혀서 끝나는 마지막과 말라서 끝나는 마지막이 다르지 않고,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으므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다. 칸은 서쪽으로 명을 몰아 대고 있으므로 요동을 비우고 오기가 어려워 심양에 머물면서 소문만 내려보낸 것인데, 소문의 뒤를 따라 칸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므로 온 것보다 무섭고 오지 않는 것보다도 무서우며, 소문이 이미 당도하였으므로 칸이 오지 않더라도 이미 온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삼거리 북쪽 술도가 쪽에서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 " - 김훈, 「남한산성」 중 pp181~182, 학고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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