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쓰고 풀어 쓰는 것."(p243)
[2] "책의 한복판에 있는 세번째 단편 <사랑이 한 일>은, 서사의 흐름에서 볼 때에도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건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중요한 사건인 것이 아니라, 그를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는 기적이어서, 구약의 믿음 체계에서 이념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 <해설> 중 p218.
[3] "이삭을 묶음" - 크리스틴 스웬슨, 「가장 오래된 교양」 중 p236, 사월의책, 2013.
[4] 주제 사라마구, 「카인」 중 p95, 해냄, 2015.
[5] 크리스틴 스웬슨, 위의 책 p236.
[6] 이런 관점의 비판은 또 있습니다. : "애초에 아브라함은 갈등을 하기나 했을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와 아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마침내 신앙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에게 축복받는다는 '이삭의 희생' 장면만을 보면 제법 감동적이지만 앞서 그가 해왔던 일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그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내를 왕에게 바칠 때도, 애인과 자식을 황야로 내쫒을 때도, 뒤를 이을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으니 고민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이 모든 시련을 아브라함이 겪는 것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항상 쓰라린 일을 겪거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나 첩이나 아들이었다!" - 나카노 교코, 「명화의 거짓물」중, 북폴리오, 2014.
[7] "나는 전쟁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언 중 일부.
[8] "여호와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지요.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 주제 사라마구, 위의 책 p163.
[9] 창세기 21장 8절 중.
[10] 창세기 21장 1절 중.
[11]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창세기 21장 12절은, 어쩌면 아브라함에 심적 고민조차 하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도 해줍니다.
[12] 이삭은 그저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제물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아버지의 중의적 답변을 듣습니다. (창세기 21장 7~8절)
[13] 성경이 이삭(이나 사라)의 감정에 대해 아무런 기술이 없는 것은, 어린 아이나 여자의 의견은 무시되어 마땅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에 의한 것일 수도 혹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는 체 번제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p223)라는 해설자의 의견처럼, 그것이 성경의 기자(writer)에게도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봅니다.
[14]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섞였다. 칸이 오면 성은 밟혀 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는 말이 부딪쳤는데,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밟혀서 끝나는 마지막과 말라서 끝나는 마지막이 다르지 않고, 열려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르지 않으므로 칸이 오거나 안 오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었다. 칸은 서쪽으로 명을 몰아 대고 있으므로 요동을 비우고 오기가 어려워 심양에 머물면서 소문만 내려보낸 것인데, 소문의 뒤를 따라 칸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므로 온 것보다 무섭고 오지 않는 것보다도 무서우며, 소문이 이미 당도하였으므로 칸이 오지 않더라도 이미 온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삼거리 북쪽 술도가 쪽에서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 " - 김훈, 「남한산성」 중 pp181~182, 학고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