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를 제외하고도 460 페이지가 되어서야 끝이 나는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저는 다음의 문장들이라 이해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감상문 또한 아래의 세 문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결국엔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새로운 회사가 생겨난다. 단순한 진리다. 비즈니스에 있어서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거스르는 일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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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커플링이란? 】
우리가 TV를 구매한다 할 때, 그 과정은 대략 "여러 제조업체의 제품들에 대한 조사와 평가 - 그 중 한 제품을 선택 - 해당 제품의 구매 - 사용"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여타의 소비재들 또한 위와 거의 비슷한 과정을 통해 구매되어지곤 합니다. 멋지고 있어 보이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경영학은 위의 과정을 '고객가치사슬(CVC, Customer Value Chain)이라 표현하지요.
이 책,「디커플링」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기존의 의미와는 달리) 위의 네 과정 "조사와 평가 - 선택 - 구매 - 사용"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의미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지요. (이미지 출처 : 온라인 서점 '알라딘')

예전엔 하이마트와 같은 곳에 가서 위의 네 단계를 단번에 완료했었다라면, 이제는 하이마트에서 다양한 제조사의 TV들에 대한 설명을 신나게 듣고, 직접 본 후에 '다음에 또 올게요~'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양자가 다 알고 있는 약속만을 남긴 채, 집에 와 컴퓨터를 켜서는 결국 온라인으로 TV를 구매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지요. 이러한 '쇼루밍(Showrooming)'과 같은 소비자들의 새로운 구매행태의 등장에 대응하는 기존 기업들의 전략 또한 달라져야 한다라는 게, 진짜 간략하게 정리한 이 책의 주장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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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VS 고객 】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한 산업 내의 기존 리더 기업이 직면하게 되는 도전과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며, 이러한 현상을 초래한 새로운 기업/제품에 대해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리더 기업은 반드시 중요한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그 고객의 니즈는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므로 열심히 '기존의 기술이나 시스템'을 갈고닦아 점점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은 버린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나 시스템은 기존의 것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탄생해 급속히 (또는 천천히) 진화한다. 그리고 고객은 어느 날 깨닫는다. 그것이 자신들도 몰랐던 니즈를 만족시켜 주는 것임을. 물론 리더 기업도 동시에 깨닫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간 뒤다. 할리데이비슨의 경우 혼다의 슈퍼커브가 그런 존재였다. 크리스텐슨은 이런 이노베이션에 '파괴적 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더 기업으로서는 참으로 고민스러운 딜레마다. 고객을 지향하는 훌륭한 경영을 할수록 기업을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리야마 아키에,「경영학 수업」중 p313, 에이지, 2019.
즉, 기존 기업이 고객들에게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그 새로운 기술이 구현하는 새로운 효용에 기존의 고객들이 반응하게 된다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 TV 구매의 예에서와 같이,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쇼핑몰이 고객들에게 (TV 구매 과정에서) 구현해 보인 새로운 기술은 전혀 없습니다. 고객이 TV의 구매처로 하이마트가 아닌 온라인 쇼핑몰을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비용을 절감해주는 신생 기업에 빠져들지 않을 고객은 없다. … 고객은 항상 세 가지 '화폐'를 부담한다. 돈, 시간, 그리고 노력이다.(p149)
'돈, 시간 노력'이라는 형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신기술의 등장 같은 뭔가 거창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변화한 고객의 욕구에 발맞추는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가 더욱 중요하다라는 것이죠.
디커플링 현상은 단지 기술에 관한 문제도 아니고, 심지어 기술과 큰 연관도 없다. … 디커플러는 한 업계에서 지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혁신을 끌어낸다.(pp78~79)
저자가 "기술은 파괴를 일으키는 주범이 아니라 파괴를 가능하게 하는 조력자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p160)이라는 서술을 하였듯, 이 주장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소홀해도 된다라는 의미는 물론 아닐겁니다.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일본전산의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의 다음 일갈과 동일한 맥락이라 제게는 이해되네요.
"자사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이 아무리 디지털 시대 최첨단을 달린다 해도 그 제품을 팔기 위한 경영과 영업 행위는 아날로그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 가와카쓰 노리아키,「일본전산의 독한 경영수업」중 p126, 더퀘스트, 2018.
【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 : 가치의 확보 】
비즈니스 모델은 회사가 가치를 어떻게 (누구를 위해) 창출하고, 가치를 어떻게 (누구로부터) 확보하는지 구체적으로 명기한다.(p87)
저자는 유통업체의 예를 들며 가치 확보에 있어서의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전의 슈퍼마켓의 경우, 한 곳에서 많은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원스톱 쇼핑 방식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였으며, 매입가에 적정한 이윤을 붙여 판매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보'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운영되었었지요. 하지만,
현재, 월마트를 제외하고 미국 내 슈퍼마켓 체인에서 가장 큰 수입원은 매장 위치에 따라 제품 진열 비용을 달리 책정해 광고비를 받는 입점 수수료다. 상품 판매에서 나오는 이윤은 수입원 중 네 번째에 불과하다. … 슈퍼마켓은 그저 식료품을 들여와 중간 이윤을 붙여 판매하는 업체가 아니다. 브랜드에 대한 관심을 끌고 그런 관심을 판다는 측면에서 보면 소매 업체보다는 미디어 회사에 가깝다.(p90)
현재 (적어도) 미국의 슈퍼마켓 업태가 이처럼 더이상 유통업이 아닌 일종의 '미디어 회사'로 변신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하이마트같은 소매 유통업체인) BESTBUY 또한 '주요 가전제품 제조사의 전시실'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을 변경함으로써 고객들의 새로운 소비 행태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며 자신들의 가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치 '창출' 측면에서의 비즈니스 모델은 어떠해야 할까요?
【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 : 가치의 창출 】
마이클 포터 교수가 주창한 기업의 '가치사슬'은 "기업이 자사를 위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실행하는 운영, 물류, 마케팅 같은 일련의 행위들"(p31)을 일컫습니다. 기업은 이같은 '가치사슬'의 확장을 초래할 수 있는 시너지의 추구를 통해 자신의 성장을 이루려 합니다. 경영학계에서 마이클 포터 교수가 차지하고 있는 학문적 위치가 여전함에서도 보이듯, 이제까지 경영학의 기본적인 시선은 '기업'을 향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하기에,
"전쟁에서는 방법론에 상관없이 무조건 이기는 것이 최종 목적이지만 경영의 목적은 가치창출을 통해서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매우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 문휘창, "제로섬 전쟁 VS 윈윈경영, 창조적 통찰의 효용은 같다", DBR July 2012, No.109
기업의 최종 목표가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함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비즈니스 세계를 전쟁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하지요. 기업의 시선이 과도하게 경쟁자만을 향해 있다 보니, 소비자를 "단순히 전투에서 이긴 대가로 받는 트로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희생시켜야 하는 손실 정도로 간주"(p437)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종종 발생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기업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이 고객을 위해 창출하는 가치, 그 가치에 대한 대가로 기업이 고객에게 부과하는 요금, 기업이 잠식하는 어떤 가치"(p132) 등으로 구성된, 철저하게 '고객의 입장에서 바라본 비즈니스 모델'이며,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실례 또한 그러하죠.
기존 기업의 임원 대부분은 …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협하는 경쟁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는 좋게 말하면 생각이 부족하고 심하에 말하면 생각이 틀렸다. 에어비앤비는 포시즌스 호텔을 파괴하지 않았다. 파괴의 주범은 '고객'이다. 고객이 자신의 진화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취한 행동 변화가 포시즌스 호텔을 위협한 것이다. 고객은 침실에 만족하지 않고 가족 공간을 원했다. 진정한 여행 경험을 얻고 싶어했다. 에어비앤비를 비롯한 많은 유사기업들은 그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십 개 호텔 체인보다 더 완벽하게, 더 재빠르게 고객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원하는 것을 전달했을 뿐이다.(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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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지극히 일부만을 위에서 소개하였습니다만, 이 책은 '디커플링'이 어떠한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뿐만이 아니라, 디커플링을 당하는 기업의 대응책까지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영학자들이 극복해내려 노력하고 있는 외적 타당성의 문제를
"특정한 인과효과 추정치가 그것을 도출한 연구에서 대표하는 수준을 넘어서 다른 시간, 다른 장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예측력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는 외적 타당성(external validity)이라고 부른다."
- 조슈아 앵그리스트 · 예른 슈테펜 피슈케,「고수들의 계량경제학」중 p114, 시그마프레스, 2017.
저자 역시, 본인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이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디커플링 대응 방법에 대해 하나의 똑 부러지는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나는 그런 해답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 내가 제안하는 프레임워크는 궁극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해결책을 걸러내도록 고안된 '필터링' 가이드다.(p245)
이같은 '외적 타당성'의 부재를 들어 경영학을 폄훼하고자 하는 생각을 더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경영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주장하는 외적 타당성이 행동경제학 등으로부터 도전받고 있는 트렌드임을 감안하면, 외려 이러한 겸손함(?)을 갖추고 있음을 높게 평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엄밀한 의미에서 이 책을 '이론서'라고 칭할 수는 없겠으나, 담고 있는 통찰력 만큼은 제가 지닌 경험의 한도 내에서 그 어느 논문보다 뛰어났다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insight를, 제가 몸담고 있는 굴뚝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느냐, 어떻게 적용하면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로의 변신을 이루어낼 수 있겠느냐 등을 정말 1~2년 어디 처박혀서 공부해보고 싶다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러하기에,
독자층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표시를 아니붙일 수가 없네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