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재활용하는 행동은 흔히 미덕으로 여겨진다. 나무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재활용 덕분에 적어도 당분간은 나무를 보호하게 된 세상을 상상한다. 재활용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이 상상하는 세상에는 나무가 무성하다. 그런 믿음은 잘못된 것일뿐더러 사실과 정반대다. 종이를 재활용하자는 주장에는 분명 타당한 구석이 있지만 오늘날 미국에서는 나무의 숫자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미국에서 종이를 만드는 목재 대부분은 애초에 종이를 만들려고 기른 나무에서 얻는다. 하지만 재활용은 펄프재 수요를 감소시킨다. 그리고 일단 수요곡선이 내리막을 그리면 가격은 내리고 수량은 줄어든다. 나무를 기르는 데 적합했던 땅은 가격이 바뀌면서 이제 더는 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가격 차이만큼의 면적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채식주의자가 늘면 소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활용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무가 줄어든다."
- 데이비드 프리드먼,「데이비드 프리드먼 교수의 경제학 강의」중 pp242~243, 옥당, 2015.
대략의 뜻은 짐작이 갔으나, 막상 영어 사전에는 나오지 않아 사뭇 당황했었던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책,「팩트풀니스 Factfulness」를 통해 저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저에게 요약하라면,
① "수치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p182)
②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p315)
③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걱정할 대상을 제대로 알자는 뜻이다." (p344)
라는 답안지를 내놓겠습니다. 세 문장 모두, 우리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알려주는 것도,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 어느 신문이나 잡지 등지에서도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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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언제가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중 pp165~167, 민음사, 2015.
그것이 권력의 강제로 인함이건, 미디어의 교활한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건, 혹은 스스로의 확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건, --- 일 개인의 믿음/가치관이란 해당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 또는 퇴보에 어느 정도, 어느 방식으로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현실이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당위론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나아가 현실도 결국에는 당위를 향해 움직여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거니와 앞으로도 당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 류동민,「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p169, 위즈덤하우스, 2012.
물론! 우리 모두는 '지금 보다 더 나아진 미래'를 원합니다. '더 나아진'의 정의(definition)이 경제적인 면에 국한되건, 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과 같은 보편적 가치로까지 확장되건 어쨌든! --- 모두가 원하는 '이상(ideal)'으로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합의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이 세상에는 전쟁과 테러가 빈번한 것이고, 국가간 · 집단간 · 개인간의 마찰에는 왜 끊임이 없는 걸까요.
이 책의 저자들은 그 이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p23)어 있기 때문이라 지적해줍니다. 그렇다하여, 우리 스스로를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잘못'은 특정 개인, 집단의 무지 때문이 아닌,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10가지의 '본능'으로부터 기인되는, 제거하기 쉽지 않은 일종의 필터들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 】
며칠 전 퇴근길에, 일산 교보문고에 들러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일부를 읽어보았습니다. 이미 읽었었던 저자의 두 권의 책과 그리 크게 다른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아 보였기에, 구매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영훈 (전)교수의 연구 방법론에 동의합니다. 역사라는 것을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 당시의 정치 · 사회적 배경의 렌즈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으나, 거기에는 반드시 데이터에 기반하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라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통계적으로 연구하는 그 분의 학문적 결과들은 나름의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해에 사로잡힌 사람을 설득할 때는 그의 의견을 데이터와 비교하는 방법이 매우 유용하다. (p42) … 오해를 추적해 찾아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데이터다. 데이터를 보여주고 그 이면의 현실을 설명해야 한다. (p69)
이영훈은 결국, 자신이 찾아내고 분석한 수치들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가 이것에 동의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로지) 본인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그에 대해, "이런 구역질 나는 책을 낼 자유가 있다면, 시민들은 이들을 '친일파'라 부를 자유가 있다"라는 식으로 비난한 조국 전 민정수석의 발언에,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국의 발언은 "위안부 문제를 반일 민족주의 운동의 소재로 삼고자 한다"라는 또 다른 반론을 불러낼 뿐, 이영훈의 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죠. 조국의 발언은 흡사,
그 당시엔 편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도 꼭 친구들은 '넌 어떤 편이야?'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나뉘어 대립해 있던 시절이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라는 남과 북으로, 운동회에선 청군과 백군이, 영화에선 좋은 놈과 나쁜 놈이. …… 소련이 언제 핵을 쏠지 모르고, 북한은 연신 땅굴을 파대는 이 불안한 세계 속에서, …… 정의는 늘 승리했다.
- 박민규, 「지구영웅전설」중 pp27~28, 문학동네, 2003.
본인이 정의(justice)의 편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은 악(evil)이다라는 규정을 통해 인정받아내려는 것과 다름 없는 겁니다. 암튼, --- 저 그 둘의 논쟁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 논쟁이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에만큼은, 우리 스스로가 조심하고 있어야 하겠죠.
"빈곤층을 악의적으로 모함하는 정치가나 가난한 이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신문 기사들이 목적하는 바는 뻔하다. 경제적 상황을 불문하고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연대의식을 발휘해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 인권 수호와 연대의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이다. … 어쩌면 그 뒤에 또 다른 음흉한 의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 중산층의 관심을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에게 돌리는 것이다."
- 게르트 보스바흐 · 옌스 위르겐 코르프,「통계의 거짓말」중 pp216-217, 작은책방, 2016.
【 한국, 한국인의 비난 본능 】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한국 기성세대들은 …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 없이 지난 6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구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
- 허태균,「어쩌다 한국인」중 p79, 중앙books, 2015.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인「어쩌다 한국인」에서 저자 허태균 교수는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여섯 가지 특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관계주의'라 명명된 위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한국인의 분노는 예의 그것의 해소를 위해 항상 '나쁜 놈' 하나를 찾아내 그 '나쁜 놈'을 때려잡아야만 풀리노라 주장하고 있지요. 현실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사고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인재(人災)'라 불리우는 것 역시, '나쁜 놈'을 기어코 찾아냈기에 만들어진 조어(造語)라는 겁니다.
"설사 기계나 시스템의 잘못이라고 밝혀져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찾는 데 더 집중한다. 만약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날씨나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것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사람을 찾는다"
- 허태균, 위의 책 p178.
허나 허태균은 위와 같은 한국인의 특성 자체를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책임자를 때려잡았으니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그놈이 충분히 처벌받는 것을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라는 것이죠. 이러한 특징이, 우리 한국인만의 문제일까요?
뭔가 잘못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으려니 생각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가 그걸 원해서 그리되었다고 믿고 싶고, 개인에게 그런 힘과 행위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히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항공기가 추락했을 때 잠깐 졸았던 기장만 탓하면 재발 방지에 도움이 안 된다. 기장이 왜 졸았는지, 앞으로 졸지 않으려면 어떤 규제가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기장이 졸았는지 알아내느라 다른 생각을 못 하면 발전은 없다.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pp294~295)
이 책의 저자는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p294)를 '비난 본능'이라 명명하며, 이 또한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이해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라 지적해줍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2008년 우리나라를 휩쓸었었던 '광우병 사태'가 떠오르더군요.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선택했는가, 그리고 지금 어떤 부분을 무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이야기가 있는 정보, 즉 극적으로 들리는 정보다. (p148)
당시의 논란이 정확한 사실에 기반하여 진행되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명명하고 있는) '공포 본능'과 그의 해소를 위해 '비난 본능'이 발현된, 거기에 --- '이명박'이라는 특정인에 대한 반감이 어울어진, 그리하여 결국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또한 '인재'라는 결론이 지어지길 원했었던 현상이 아니었던가라 생각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진지한 문제에는 진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p271)
당시의 문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논의해보려는 정치인이, 언론이, 과학자가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있었었겠죠?
【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 】
공항 곳곳에서 눈에 띄는 보안 요원은 테러 위헙을 그 어느 때보다 낮춰주지만, 언뜻 보기에는 위험이 더 커진 느낌을 준다. (p172)
이 책의 저자들은 "세상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다"(p27)라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느낌'이 그러하지 않은 것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p95) '주목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주목 본능'이 줄어들지 않고 외려 더 강해지는 것에 대해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나쁜 뉴스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이 좋아졌기 때문일 수 있다. (p108)
여기에 더해, 뉴스 소비자 (즉, 우리들)의 '주목 논리'는, 이전에도 있었었던 일들을 마치 새롭게 생겨난 사건인 양 바라보게 만들기도 하지요. 한동안 시끄러웠던 차량 급발진 뉴스가 매일 같이 9시 뉴스의 첫 꼭지를 장식하던 때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한 두대의 차량에 급발진 사고가 난 뉴스가 나오기 전에도 분명 급발진 사고는 발생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종의 '팔리는 상품'이 아니었기에 묻혀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초미의 관심사가 되자, 이후 매일 같이 '오늘도 또 급발진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그 상품을 판매했었을 뿐. 어쨌든,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아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 세계의 현 상황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p103) … 연간 변화가 1%에 그쳐도, 너무 적고 느리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p256) … 더딘 변화도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p262)
저자들은, 이 세상이 분명 나아지고 있다라는 것 자체만큼은 이처럼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시리아 사람들에게는 물론 이런 추세가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곳은 지금도 미개하다"(p161)라는 (일종의) 위안 또한 잊고 있지 않습니다만, 예의 '세상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라는 결과 자체, 그리고 그 결과를 입증하는 것에 대한 저자들의 강조는 자칫,
"생활인으로서의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네 삶의 조건을 둘러싼 '해석의 투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누구도 이러한 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우리가 맑스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며, 주류적인 해석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이 원래 길이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균형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는 물질적 삶의 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잊지않기 위함이다."
- 류동민,「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중 pp 6-7, 창비, 2009.
만들어낸 성과에 만족함으로써, 그 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다른 문제점들, 예를 들자면 --- "간극 본능은 분할을 연상케 하지만 알고 보면 완만한 다양성에 불과하고, 차이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수렴하는 차이며, 갈등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합의에 이르는 갈등"(pp60~61)의 과정 속에서 존재하였었을 '분할'과 '차이'와 '갈등'의 피해자들을 잊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의 만나는 점에서 균형이 이루어지고 경제가 균형에서 벗어나더라도 결국에는 균형점을 찾아간다고 이론적으로는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균형으로 돌아가는 데 한 세대가 걸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부동산 가격폭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꾹 참고 30년만 기다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 류동민, 위의 책(2009)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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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가 미국의 모든 대학교와 대학원 졸업생들에게 선물한 책이라는 문구가, 제가 이 책을 구매했던 가장 큰 이유였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말이죠. 저에게 이 책을 분류하라 한다면, (통계적 기법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일종의 통계학책이라 말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통계 용어로 이 책의 메시지를 표현해보자면 결국 --- 횡단면 분석(cross-section analysis)만 하지 말고, 시계열 분석(time-series analysis)도 함께 곁들여 보면, 적어도 '수치화될 수 있는 면들에서의 삶의 질'은 예전보다 분명 나아졌고,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다라는, 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굳이, 큰 돈 써서 그 많은 수의 졸업생들에게 선물할만큼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지 않나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