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피가 갑자기 많이 팔려서 시디나 음원 판매를 앞지르는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엘피의 먼지를 닦으며 음악을 듣는 일도 없을 것이다.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옳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 (p172)
결혼하기 전, 아마도 대학원생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되는 어느 날 아침. 전날 마신 술로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눈을 떠 일어나 앉자마자, 침대 옆 테이블위에 있던 초콜릿 한 개를 우걱우걱 먹고, 그땐 너무도 당당하게 그러했었듯 곧바로 담배를 한 대 피웠고, 담배의 필터에 초콜릿이 묻어 나오는 걸 보고는, 휴지로 닦으려 했거늘...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던 크리넥스는 하필, 사용하지 않은 새 것이었고, 위의 뚜껑(?)을 뜯어내고 한 장의 휴지를 뽑아내려했건만 이게 당췌 --- 뽑아도 뽑아도 찢어지지 않은 온전한 한 장의 휴지가 나오질 않는 겁니다. 두 세장이 겹쳐진 채 계속 한 쪽은 찢어진 채로 나오고 막... 아, 정말 짜증나!!!
그건 아마도, 술에서 덜 깨었던, 게다가 니코틴의 영향으로 순간적으로나마 더욱 몽롱해진 제 육체적 상태로 인함이었을진데, 그 당시의 전 --- 기어이 크리넥스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어 도대체 제품을 왜 이따구로 만드는 거냐, 첫 장을 손쉽게 뽑아낼 수 있게는 도무지 만들어볼 생각을 안 한 거냐 등, 잠시 전의 니코틴이 지난 밤의 알콜기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나마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 신나게 상담원을 몰아 붙였었지요. (그 때의 그 분께, 진심 담아 뒤늦은 사과 드립니다.)
갑 티슈를 보며 시간을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닥치지 않은 가지런하게 쌓여 있는 시간들. 한 번 뽑히면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 (p46)
그렇더군요. 갑 티슈에 대한 기억이란 게 있어, 그걸 굳이 말해/써내야 한다면, 결국 사과의 글로 마무리 되어져야만 하는 위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저완 달리, ---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 겠다, 생각해"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역할/효용'에 딱 들어맞게, 작가 김중혁은 켜켜이 쌓여 있는 '갑' 속 휴지들을 우리의 미래와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더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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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였더랬습니다. 2014년 9월 19일에 발간된 '초판 1쇄'의 이 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가, 뜬금 없이(?) 이제와서야 꺼내들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 경제학을 공부했었었으나 사회 생활 내내 제조업에 내내 종사하고 있는, 그마저 소비재도 아닌 중간재나 기계류를 만들어 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제가 바라보는 '공장'이라는 것과, '제대로 된 관찰자'로서의 작가가 바라보는 '공장'은 과연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란 궁금증 때문이었던거죠. 그리고 예의,
지구본 공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꾸만 우주를 생각하게 되고, 창조주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란 게 무엇인지, 우주 속의 티끌보다 작은 우리는 과연 누구인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지구본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지.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지구본 속에 적힌 나라 이름과 도시의 이름이 무슨 소용인지. (p103)
지구본의 수요 추이는 어떠한지, 수요가 감속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지, 이처럼 줄어가고 있는 매출과 관련하여 회사의 재무 부서는 어떠한 대응을 준비해야 할른지, (경쟁사가 있다면) 그 경쟁사를 이길 수 있는 우리만의 차별점은 무엇을 내세울 것인지, 시장 자체가 쇠퇴기에 있다면 어떤 컨셉의 대체품을 시장에 선보여야 할른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기존의 지구본의 기능을 지니면서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차별화된 새로운 기능을 넣어 시장의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은 있을지 ……
제가 만약 지구본을 생산하는 회사를 방문한다면, 대충 뭐 이런 기초적인 것들을 머리속에 담았었을텐데, --- '제조업 종사자'가 아닌 '작가'는, (뭐 위의 인용구가 맘에 든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각을 적어내고 있더군요. 이와 더불어,
Viagra와 같은 발기 부전 치료제가 시판되기 시작했을 즈음의 콘돔 회사 매출은 그 전과 비교하여 명확한 차이점을 보였었을지, Viagra 류의 판매량과 콘돔 판매량 간에는 모종의 통계적 관계가 성립하고 있을지, 뭐 이런 것만이 <콘돔 공장 산책기>의 첫 장을 펼치며 들었었거늘,
콘돔의 발전은 … 무엇보다 물 샐 틈 없게 발전하고 있다. …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불량품 하나에 아이 한 명이다. (pp 36~38)
이 에세이로 처음 만나 본 작가 김중혁의, '기발함'이라는, 작가가 갖추고 있어야 한다라 생각하는 타입의 (저에겐 대체적으로는 별로였으나 종종은 저를 조금은 빵터지게 해준) 유머 코드를 만나볼 수도 있었었지요. 또한,
어른이 되어서 된장찌개를 먹고 있으니 된장찌개가 아니라 시간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어쩌면 모든 식사란 시간을 먹는 일인지도 모르지.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시간, 그 음식의 재료가 익어 온 시간, 그런 시간을 먹는 일인지도 모르지. (p78)
유독,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라 여겨지는 요즈음의 저에게, 그 '시간'이란 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을 선사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 김중혁의 유머와 작가적 관찰은, 다음의 구절에서 한데 합쳐져 저의 과거와 제 아이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금 바라보게 해주었지요.
남자는 어머니가 사주는 팬티를 입다가 자신의 팬티를 직접 구입하면서 어른이 된다. … 데이트를 앞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팬티를 고르며 어른이 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팬티를 벗으며 어른이 된다. (pp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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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피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계속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뭐 잊고 있는 건 없는지, 너무 많은 걸 줄이고 압축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까지 줄인 것은 아닌지, 우리가 한 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음악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p172)
이 감상문의 처음에 인용해 기록한 구절에 뒤이어지는 글입니다. 제조업 종사자로서 가졌던 궁금함으로 인해 펼쳐든 책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부모'의 관점에서 작가의 글을 받아들이게 해주네요.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나, 그 사랑을 혹 잘못된 방식으로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내 아이를 '행복한 미래'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라는 강요의 이유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그 '행복한 미래'란 걸 혹 아이의 의견은 무시한 채 나만의 그림으로 그려낸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 내 아이의 사랑은, 내 아이가 받아오는 성적표의 숫자에 따라 증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어릴 때 좋아했던 3색 볼펜을 열심히 쓰고 있다. …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 번에 하나씩이다. 3색이지만 세 개를 한꺼번에 사용할 수는 없다. 인간의 재능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