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 에른스트 H. 곰브치리, 「곰브리치 세계사」중, 비룡소, 2010.
제가 읽어본 역사책들 중에서,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문구들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운 이유는 아무래도, 그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그 사건이 발생했었던 당시 사람들의 시각과 많이 다르기 때문일 꺼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하기에 --- 이 때의 '흥미롭다'란 의미 속에는 정말로 '흥미롭다'란 의미도 있겠으나, '어처구니 없다'란 의미도 또한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죠.
………………………………………………………………………………………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
-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상실의 시대」중 p24, 메디치, 2016.
'이상'이 일종의 '지향점'으로서 역할을 해야한다라는 위의 주장을 (제가 동의하듯, 당신도) 받아들인다면, 이 때의 '지향점'은 발전의 방향과 (남아있는) 정도를 보여주는 (아마도 유일한) 지표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이를 (발전의 방향은 거의 정해져 있는) 비즈니스의 영역에서 보자면 --- 그 '목표'란 것은 대부분 매출이나 이윤 등과 같은 (객관적인) 계량적 수치들이 되겠지요. 예를 들어,
'사업 계획서'란 건, 미래의 여러 상황들에 대한 simulation을 통해 발생 가능한 결과들에 대한 조사를 한 후, 그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가능한 (또는 바람직한) 결과에 대한 보고서이어야 하며, 이를 테면 1월부터 12월까지 회사의 성과가 그 사업 계획서가 제시했던 바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계속 확인하며 단기적인 전략들을 유지 또는 수정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하는 게 맞는 겁니다. 허나!
(달성 가능한 최대치로서의) 950억 원의 매출이 예상되는 사업 계획서를 받아든 사장이, '우리 좀 더 열심히 해서 1,000억까지 함 해보자!' 라는 독려가 아닌, '사업 계획서'라는 본래의 의미를 곡해하여, '950억 가지곤 안돼! 최소 1,000억 할 수 있는 사업 계획서 만들어 와!'라는 본말이 전도된 요구를 해버린다면 이는 그저 --- ①현재의 현실, 그리고 ②발생가능성이 가장 높은 미래의 모습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 뿐인 것이죠. 여기!
"아주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항상 고생스러웠나 보다고 쿤타는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 알렉스 헤일리, 〈뿌리 상권〉중 p62, 열린책들, 2009.
18세기 중반 무렵, 영국 런던에,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를 믿지 않는 한 남자가 있었었으니, 이 책의 주인공인 토머스 데이란 인물이었죠. 일찍이부터 자신만의 확고한 이상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 자신의 미래가 자신의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반드시 다르게 만들어낼 것이라 결심했을 뿐만 아니라,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 사실 18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 ……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는 일들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 하진, 〈기다림〉중 pp454~456, 시공사, 2007.
또한 자신의 이상형을 찾아내는/만난다라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아온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만은 않기로, --- 다가오지 않으면 스스로 다가가겠노라는 계획을 세우지요.
완벽한 아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p26) …… 그렇다면 완벽한 아내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p52) … 만약 여성이 교육받는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그가 이상적인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다면, 그 역할에 맞는 소녀를 양육하면 되는 것이었다.(p52) … 만약 다른 데서 영향을 받아 편견을 갖기 전에 소녀를 교육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만의 완벽한 여성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결론내렸다.(p52)
곰브리치가 언급했었던 바와 같이, 이 책은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내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1818년 발표된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원리'라는 육신적 영역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면, 그보다 50여 년전에 이미! 토머스 데이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도전을 이미 감행했던 것이죠.
데이는 인간의 정신을 다루고 있었다. 소위 실험의 시대로 여겨지던 때였지만 이는 최고 수준의 실험이었다. (p196)
·
·
·
에지워스가 루소의 「에밀」을 그의 후계자를 키우는 방법으로 붙잡고 있을 때, 데이는 그 교육 시스템을 완벽한 아내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p75)
'Nature VS Nurture'라는 두 단어의 비교에서도 볼 수 있듯, 특정 시점, 예를 들어 '현재' 특정 개인의 모습/성향 등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냐 아니면 후천적으로 입혀진 것이냐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토머스 데이의 경우에는 거의 전적으로 Nurture의 힘(만)을 신뢰하고 있었죠. 그러나! 작가 구병모가 그의 소설 「피그말리온 아이들」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타인에게 갖다 붙이는 행위에 성공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고 나를 투사한, 내 뜻을 반영한 내 소유의 로봇이 된다. 그러나 보통은 그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타인이고 … 무엇보다 사람인 것이다.
- 구병모, 「피그말리온 아이들」중 pp246~247, 창비, 2012.
'사람'을 대상으로 한 토머스 데이의 실험 또한 결국 실패로 끝맺음되고 맙니다.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 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은, 구병모의 소설이 지적했었던 <칭찬의 강제성>과 <무책임한 칭찬>이라는 두 비판을 예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요.
·
·
·
'간절하게 바라면 결국 이루어진다'라는 의미의 '피그말리온 효과'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그저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알아서 이루어진다가 아닌, 간절히 원하는만큼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역시나 간절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목적 달성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라면, 타인의 간절한 노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칭찬'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면 훨씬 더 효과적이다라는 게 '로젠탈 효과'일 테구요. 여기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구절 뒤에 숨겨져 있는, '과연 고래는 춤추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도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토머스 데이 역시, 고아원에서 데려온 두 어린 소녀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 가게 될) 그녀들의 미래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희망 사항의 실현만을 강제하고 있지요. 또한!
'춤추는 고래'에 대한 관객들의 비난과 같이, 토머스 데이는 자신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여 두 소녀에 대한 미안함이라든가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저 ---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사느라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류의, 즉 자신에 대한 위로/안타까움만을 가지는 겁니다.
………………………………………………………………………………………
"누군가를 만나면 그의 본모습을 보는 대신 그를 흥미로운 인물로 만들려고 애쓰지.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만드는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은 것 덧입히지. 그를 멋있게 보려고 두 눈을 감는 거야. … 당신의 젖가슴이 처진 것을 보고 그는 개성적이라고 여겨. 그가 촌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그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가 무식하게 여겨지면 당신은 자신에게 두 사람 몫의 교양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해. 그가 줄곧 그걸 하고 싶어 하면 당신은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가 그걸 별로 잘하지 못하면 당신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 명백한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갖은 애를 다 쓰는 거야. 너무나도 명백한데도 말이야. … 그러다가 서로 거짓을 꾸며내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지면 슬픔, 원한, 증오가 되는 거야."
- 로맹 가리, 「여자의 빛」중 pp41~42, 마음산책, 2013.
토머스 데이의 일생 또한, 로맹 가리가 설명해주고 있는 '환상'의 말로 그대로 진행됩니다. 그가 '만들어 내려' 했던 이상형의 아내는 끝내 만들어지지 못했으며, 그러나 어쨌든 완벽한 아내를 '만나는' 소원은 이루었으나, 이 또한 꿈꿨었던 모습의 결혼 생활은 되지 못했었지요. 여기서! --- 토머스 데이의 일생이, 2018년 9월의 첫 날을 대한민국 일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에겐 그지없이 '불행'하기만 해 보입니다만,
"신자들이 그저 자신의 믿음만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예배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거죠. 그러면 종교는 신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답니다."
- 로맹 가리, 위의 책 p146.
현실에서 만들어내지 못한 '완벽한 아내'라는 대상을, 「샌퍼드와 머튼」이라는 소설을 통해 '완벽한 소년 두 명'을 기어이 만들어 내었듯, 자신이 그리는 이상형의 소울메이트로서의 아내를 만나고 싶어했던 애초 그의 희망은 결국 ('아내' 대신 '소설 속 아이들'로 대체된) '완벽한 피조물'을 만들어 내겠노라는, 다시 말해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예배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종교의 모습과 비슷하게 귀결된, --- '불행'이 아니라 말은 할 수 없겠으나 그로 인해 그의 삶까지가 파탄난 것은 아닌, 나름의 타협에 성공했다 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
·
"근대적인 대중교육은 바로 이러한 '길들이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제도다. …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한 노동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학교 교육으로써 길러지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이다. 바로 노동자를 훈육하는 것, 즉 길들이는 것이다. … 잘 길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이 의미하는) 지배 계급이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p31~34, 웅진지식하우스, 2013.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라는 이 책의 부제 중, '피그말리온 신화'와 관련된 부분만으로 이 감상문의 내용을 제한했습니다만, ('여성 혐오'에만 국한되지 않은) '교육'에 대한, 더 크게는 (예의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 생각하는) '권력(의 작동)'의 문제를 끝내 배제해버리기엔 위 류동민 교수님의 글이 너무도 아른거립니다. --- 마르크스적 용어로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이란 게, 현대 사회에서는 뚜렷하지 않아졌노라 생각합니다. 좋은 의미로서의 '노동 시장의 유연성' 때문이 아닌, '선택지의 제한'이 낳은 현상이지요.
글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류동민 교수님의 위 책 제목이 말하고 있듯, '일하기 전엔 몰랐던', 다시 말해 노동자가 되기 전엔 몰랐었던 사실을 '노동자'가 되어보니 알게 되듯, 자본가가 된 후엔 자신이 노동자였었을 때 비난했었던 자본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고려 가능한 모든 경우를 다 합하여 보았을 때, --- 완벽한 아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두 소녀의 일생에 완벽하게 개입했던 18세기 중반, 영국의 한 남자의 행태와 사고방식이, 2018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관리자 혹은 자본가, 더 나아가 이 사회의 '권력',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는 전혀 없다라,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어차피 과거의 사례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쌓아나가야 하는 건 과거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래죠. 전례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됩니다."
- 야마다 무네키, 「백년법 하권」중 p350, 애플북스, 2014.
(만족의 수준이야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세상은, 현재의 기준으로 보아 불합리하다라 여겨지는 과거의 허물들을 참으로 많이 극복해왔었었기에, --- 열일곱 살의 종원군이 바라보고 있는 2018년의 대한민국은, 제가 되돌아보는 저의 열일곱 살 적인 1985년의 대한민국이 제게 각인시켜주었던 검열/격렬/경직 등의 단어가 주는 살벌했던 잔상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아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부터 위안을 받습니다. (1969년생인 제가 생각하기에) '2018년의 현실'은 '1985년의 현실'보다는 훨씬 더, '이상'에 가까워져 있다라는 건 확실하니까요.
글이 길어졌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쓸 말이 많았었나 봅니다. 암튼! --- '완벽한 아들 만들기'란 저의 목표를 위해, 종원군의 성정(Nature)을 무시한 채 일방적 양육(Nurture)만을 해왔었고 하고 있는 건 아닌가,란 반성은 예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어김없이 추가되는군요. 대체... 제가 잘하고 있는 게 뭘까요? --;;
※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한 책
- 「피그말리온 아이들」 (구병모)
-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류동민)
- 「상실의 시대」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 「동물농장」 (조지 오웰)
- 「O 이야기」 (폴린 레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