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더운데... 상식(常識) 공부나 해볼까요? 이 책의 제목에 쓰이기도 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항목인데, 예의 날이 더우니...
'어린이 버젼'으로 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있었어요. 피그말리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고 싶었지요. 예쁘다는 여자들을 모두 만나 봤지만 아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기 시작했어요. 조각이 완성되자 피그말리온은 그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지요.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만든 조각에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갈라테아! 오늘따라 더 아름답군요. 잘 지냈소?”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아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기며 날마다 다정하게 말을 붙였어요. 그리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갈라테아와 같은 여자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아프로디테는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신전의 불꽃을 세 번이나 위로 솟구쳐 오르게 했지요. 집에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항상 그랬듯이 갈라테아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어요.
“갈레테아! 잘 있었소? 잠깐 떨어져 있었지만 보고 싶었소.”
그러자 조각의 뺨이 붉게 물들며 살짝 움직이는 게 아니겠어요? 어느덧 조각상은 사랑스러운 진짜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거예요.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감사드리고, 갈라테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어떤 일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불렀어요.
이왕 칼 뽑은 김에, 이 '피그말리온 효과'와 비슷한 내용의 '로젠탈 효과'라는 것도 마저 보도록 하죠.
이게 독후감이긴 하냐?란 핀잔을 듣는다 하여도 --- 좀 더 나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기록'이란 것이, (맥주와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훗날 언젠가 과거(의 경험, 지식 등)를 선택적으로 나의 과거를 되살려 보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란 핑계 좀 써보며 말이죠.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처럼 누군가 예언으로 하면 그 예언은 신통하게도 실현이 된다. 무언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나 기대, 예측이 그 대상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 이것이 '피그말리온 효과'이다. 누군가 그렇게 예언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예언을 함으로써 예언 자체가 실현되기 때문에 이때의 예언을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고 부른다.
···
미국의 일부 백인들은 흑인들이 게으르고 폭력적이며, 무기나 마약을 소지하고 있을 확률이 백인보다 더 높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흑인들은 직장을 얻을 기회가 더 적고, 경찰들에게 더 많은 검문과 체포를 당한다. 이렇게 해서 흑인들은 더 가난해지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역시 흑인들은 게으르고 폭력적이며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낙인이 찍힘으로 해서 더 나쁜 쪽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스티그마 효과 (낙인 효과)'라고 한다. 기대로 인해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피그말리온 효과와는 반대되는 효과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이 소설, 「피그말리온 아이들」은 위에서 소개한 여타의 '효과'인 '로젠탈 효과'와 '낙인 효과'까지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은 '낙인도'라는 섬이며, 낙인도에 위치하고 있는 학교의 이름은 '로젠탈 스쿨'이고, 로젠탈 스쿨이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 이념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형식으로 말이죠.
…………………………………………………………………………………
학교는 뭐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다. (p74)
이 의미에 대해 동의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적어도 현실적으로 그러하다라는 사실을 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얼마 전, 종원군의 책가방을 잠시 들어주어야 할 상황이 있었습니다. 받자마자 제 허리가 훅~하고 휘더군요. 지난 35년 여간, 대한민국의 교육은 제가 고1 때 메었던 가방의 무게에서 조금도 줄여주지 못한 겁니다. 이같은 표피적 무능 뿐 아니라, --- "국민이란 혼魂이며, 정신적 원리입니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국민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노력과 희생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오랜 과거의 결과입니다"란 19세기 프랑스 사상가의 주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국가관을 여전히 교육하고 있다는 실질적 무능함마저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p165~167, 민음사, 2015.
'국방의 의무'에 대해 반대하는 생각을 제가 가지고 있는가는 저 스스로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역사적/현실적 특수성'이라는 것 이외에 과연 어떤 설명이 대한민국 남자에게 부과되고 있는 '국방의 의무'가 지니고 있는 논리적 정당성이 궁금하기는 합니다. 국가의 법률로 정해져 있는 의무이기에, 그 위반에 대한 처벌 자체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부당하다 할 수는 없겠으나, 그 국가의 명령이란 게 분명,
"권력은 다른 집단과 개인들의 현재 또는 미래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막을 수 있는 능력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권력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여 그들이 하려던 것이 아닌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 모이제스 나임, 「권력의 종말」중 p50, 책읽는수요일, 2015.
국가가 지닌 '공권력'이라는 권력으로 인해 그 강제성을 띠고 있다라는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던 대로,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이 아닌 진정으로 그것을 믿는 (최소한) 일부의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대한민국(뿐만은 아니지만 좀 더 유별난)의 교육은 국가 혹은 집단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다라, 전 생각합니다.
"국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을 '국익'으로 파악한다. 국가주의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며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애국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는 이런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국가와 나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 하승우, 「아나키즘」중 p143, 책세상, 2008.
어느덧 '과거'가 되어 버린 저의 가치관 역시, '화장을 하고 다니는 여학생'과 '담배를 피는 남학생', 그리고 '연애를 하는 남녀학생'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당췌 그것이 왜 나쁜 것인가란 질문에 '공부에 집중하는 것에 방해가 되니까'라든가, '뼈 삭는다'라는, 역시나 쌍팔년도적 이유 이외에는 달리 설득력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주 크게 보아도, 또는 아주 작게 보아도 --- 대한민국, 그리고 저란 사람의 가치관은 예의, 다음과 같은 대전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게만 되지요.
"어떤 타자에게 충실하려면 다른 타자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중 p258, 책과함께, 2008.
·
·
·
【 칭찬의 강제성 】
'다른 타자'란 개념은 일반적으로 부모나 선생님같은 '(진정한 의미의) 타자'이겠으나, 또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자크 라캉의 말에서처럼, 지금 '하나의 나'가 원하는 것은 나가서 노는 것이지만,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는 '또 하나의 나'가 투쟁에서 이겨, 결국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행위를 하게 된다라는 것처럼 말이죠. 바로 이 지점에 --- 「피그말리온 아이들」이 묻고 있는 질문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타인에게 갖다 붙이는 행위에 성공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되고 나를 투사한, 내 뜻을 반영한 내 소유의 로봇이 된다. 그러나 보통은 그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타인이고 … 무엇보다 사람인 것이다. (pp246~247)
<작가의 말>을 통해 보여진 구병모의 위와 같은 견해는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아니면 그것조차 훈련된 결과인가'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합니다. --- '피그말리온 효과'를 말하고 있는 속담이 있지요. 바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 속담을 그저 (칭찬이 지닌) 긍정적인 면으로만 생각해 왔었었으나,
엄밀하게 말해 이는 전적으로 '춤추는 고래'를 보고 싶어하는 이의 시선에서만 바라본 시선일 뿐인 것이죠. 또 하나의 시선인 고래의 시선, 즉 고래 또한 춤추길 원하느냐에 대한 고려를 우리는 전혀 하지 않았었다라는 겁니다. 「어쩌다 한국인」의 저자 허태균 교수는 그 속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 즉 칭찬 역시 상황(고래)에 따라선 채찍일 수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속담은) 칭찬 때문에 춤을 추는 고래는 원래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진실과, 고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 고래를 춤추게 하려 한다는 강제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실 원래 춤추고 싶어 하는 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 없다. 춤추고 싶지 않거나 춤출 이유가 없는 고래를 춤추게 할 때만, 칭찬과 같은 외재적 동기가 필요하다. … 이 세상에는 춤추고 싶은 고래와 춤추고 싶지 않은 고래가 있는데, 이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고 칭찬과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학생들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서 너무나도 다양한데, 한국의 교육은 모든 학생이 비슷한 것을 해야한다고 강요한다.
- 허태균, 「어쩌다 한국인」중 pp324, 중앙books, 2015.
나의 아이가, 또한 당신의 아이가 지금 우리의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있긴 하나 그것이 그 아이들이 춤추길 원하여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 적어도 부모 앞에서는 춤을 추면 더 나은 가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상상의 질서'에 복종하기 때문인 것인지, 혹은 '부모와 나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스몰 버젼 국가관의 결과인지, 당신은 알고 있느냐라, 작가 구병모가 묻고 있다라는 것이죠. 나의 자녀가, 부모된 자격(?)을 지니고 있는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에 대해 차마 '아니야!'라 말하지 않아왔던 저에게, 그러나 실은 나의 자녀를 일종의 도구로 간주하고 있음/하여 왔음/가 되어주길 강력히 원하고 있음을 자백하라 권유하고 있는 겁니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반응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다."
- 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171, 와이즈베리, 2014.
【 무책임한 칭찬 】
결코 이 아이들을 그대로 놔둬도 되는 멀쩡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방치했을 경우 미래의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우리는 최선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최상,이라고는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최상인지는 견해차가 있을 테니까요 .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아이들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는 최선조차 경험해 보지 못하고 열외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소각되지 않는 구제 불능의 잔여물을 그나마 재활용이 가능한 형태로 복구하는 데 힘쓰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 사회가 버린 아이들을 사회에 다시 쓰이게 만드는 게, 그 방법상 모두의 동의를 얻기 힘들더라도 칭찬받지는 못할망정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충분한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듬는 일은, 이 아이들 자신의 역량 향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미래에 이 아이들이 악의를 품고 공격할지도 모르는 사회와 그 선량한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pp168~170)
로젠탈 스쿨 교장의 학교 운영 방침입니다. 아이들을 가리켜 '소각되지 않는 구제 불능의 잔여물'이라 표현하는 것도 놀랍고, 그 아이들을 '방치했을 경우 미래의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란 그의 신념(?)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 자신들의 교육이 없다면, 미래에 이 아이들이 악의를 품고 사회와 그 선량한 구성원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라는 그 (일종의) 숙명론적 가치관이었습니다. 백번 천번을 양보하여, 교장의 표현과 신념, 그리고 숙명론적 가치관을 다 옳다 / 그럴 수도 있다라 받아들인다 하여도!
마는 교육 용어 검색차 컴퓨터실에서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마침 예의 3대 일간지에서 다룬 싱글맘 소녀의 인간 승리에 대한 기사를 보고 온 참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틈 없이 아이를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며 낮에는 햄버거 패티를 굽고 밤에는 검정고시 준비까지 해낸 기특한 사례로, 주위의 따뜻한 이웃들이 품앗이로 아기를 돌봐 주면서 그녀의 합격에 기여했다는 스토리였다. 그녀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지만 실은 그 끝에 기다리는 거라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일 가능성이 크리라. (p71)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기 원하는 고래 조련사의 바람(願)에 부응/복종해 춤을 추었건만, 돌아오는 건 순간의 박수 뿐 결국 '고래가 춤을 추다니, 저 고래 정말 이상하군'이란 수근거림 혹은 '고래가 춤을 춰봐야 그 수준이란 게 결국 이 정도'란 비아냥이 고래에게 안겨지게 되는 상황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때, 조련사마저 고래에게 '하지만 넌 참 잘했고, 수고했어!'란 칭찬대신, 순간의 박수에 감동하지 않음을 타박한다거나, 춤을 왜 그렇게밖에 추지 못하는 것이냐란 질타가 이어진다면? --- '우리 사회'라는 거대함까지 거론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는 겁니다. 저 스스로조차, 이런 반성을 수도 없이 스스로 하였었고, 블로그에도 기록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아이에겐 질타, 아주 가끔은 순간의 박수만을 보내는 무책임한 칭찬만을 해왔었던 것이니까요. --;;
…………………………………………………………………………………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는 어쩌면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 떠밀 때, 옳아서 더욱 단단하고 마땅하여 배로 갑갑한 명제의 동아줄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된다."
- 김형민, 「그들이 살았던 오늘」중, 웅진지식하우스, 2012.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듯, 로젠탈 스쿨의 학칙에도 스스로의 합리성은 있었습니다. 작가 구병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지요.
연대를 못하게 하는 대신 구경만 하던 아이들에게 연대 책임도 묻지 않는다. 비정할 만큼 합리적이다. (p107)
오늘 아침, 제가 종원군에게 강요했던 가치관이란 게 알고보면, 위와 같이 표현되고 있는 로젠탈 스쿨의 교육관과 전혀 다를 바 없다라는 걸, --- '네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너의 몫이다'란, 투자에 대한 투자자의 책임을, 아직 사춘기를 완전히 벗어났다라 말할 수 없겠는 고등학교 1학년 아이에의 훈육으로 강요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훗날 언젠가 과거(의 경험, 지식 등)를 선택적으로 나의 과거를 되살려 보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랑 핑계'로 시작된 이 감상문마저 예의, '교육'과 관련된 여타 작품들을 읽고 난 후와 별반 차이 없이, 이 '차이 없음'이란 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저의 '변하지 않았음'에 대한 질타이어야 한다라는 걸 또! 다시 깨달아 보며,
부디 이번에는,
'느끼기만'하는 것으로 끝맺음되지 않기를, 저 스스로에게 강하게 질타/다짐하겠습니다.
※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작품들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 「빨간구두당」 · 「위저드 베이커리」 · 「한 스푼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