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의 힘은 매우 강합니다. (p83) …… 북한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자유입니다만, 북한을 연구하는 학문적 태도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p10)
우리의 소원이 왜? 통일이어야 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이 아빠에게 어제 저녁, 종원군이 묻더군요. '통일이 정말 될까요?' --- 통일이 되면 뭐가 좋아질 것 같냐라는, 대답을 갈음하는 아빠의 질문에 녀석은 '통일이 되면 국토가 넓어져서, 일단 땅값이 좀 내려가지 않을까요?'란 순진한 답변을 내놓더군요.
전쟁이 없는, 전쟁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 '신뢰'가 있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대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대화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p10)
저의 입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도, 제 머릿 속 김일성의 모습은 도무지 좋은 점을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지상 최악의 악마로만 그려지게 만들어놓았던 지난 날의 교육이란 게, 실제 북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라는 저자의 아래 설명에 제 고개가 끄덕여졌던 것이 --- 단지 요즈음의 분위기가 이러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군부독재라는 '내부'의 괴물은 그렇게 북한이라는 '외부'의 괴물을 이용해 국민들을 길들이고 윽박질렀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북한은 자신들의 악행을 가리기 위한 손쉬운 알리바이였습니다. (p310)
…………………………………………………………………………………………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 속엔 북한의 (기존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설명해주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역시 그 편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말할 수 없는 저에게 저자가 꼽은 12가지의 질문들 모두가 다 흥미로웠었습니다만,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아무래도 --- '북한 비핵화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란 chapter가 가장 눈에 뜨이더군요.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북한에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북한은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p222)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북 조정관을 지냈던 윌리엄 페리의 이 한 마디 속에, 북한이 그간 보여온 행동들의 원인에 대한 단초가 들어있다라, 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북한이 핵무기를 왜 개발했을까요? 바로 안전보장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핵 개발을 하게 된 발단은 미국의 핵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북핵 문제는 북미 적대관계가 낳은 어두운 유산인 셈입니다. (p222)
학교 짱이 들고 있는 칼이 무서워, 나도 몰래 칼을 하나 만들어 혹시 모를 짱의 위협에 대비하고 있었었거늘, 너 안찌를테니 가지고 있는 칼 먼저 버려!라고 학교 짱이 계속 (또 다른 버젼의) 협박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죠. 저자가 제시하는 북핵 문제의 해법은 간단합니다. 미국이 먼저 위협을 멈추라는 것이죠.
북핵 문제 해법을 위한 기본 전제가 분명해 집니다. 바로 미국의 핵 위협 제거, 즉 북한의 안전보장입니다. (p222) …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라는 조건 설정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p225) … 북한이 보기에 카다피는 미국에 안전을 보장받고 무장을 해제했다가 뒷통수를 맞아서 몰락한 경우입니다. (p236)
·
·
·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에서 저자 함규진 교수는 국가간의 조약(treaty)에 대해 ①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약속이라는 점, ② 그 약속은 1:1 간의 약속뿐 아니라 다자간 약속일 수도 있다라는 점, 그리고 ③ 그 약속은 상충하는 이기심들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점 등을 강조해주었었습니다.
"A commitment by a sovereign state is credible only when that state’s self-interest dictates honoring it."
이처럼, 국가간의 약속이란 것 역시 각자의 이익에 부합될 때에라야 유지되는 것이라면,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에게 과연 손실일지 아니면 이득일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하겠죠. 일단 이론적으로 보아, 북한은 핵의 보유로 인해 가장 확실한 안전보장을 확보하게 됩니다. --- "a country's best safeguard against nuclear war was to protect its weapons, not its people"
일본은 어떨까요? 북한의 핵이 역설적으로, 일본의 군사 현대화와 자위대의 활동영역 확대, 더 나아가 평화헌법의 개정 등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러시아와 중국 역시, 대미 방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북한의 핵이 오로지 밉기만 할까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유일한 이해 관계자(?)인 미국은 과연?
북핵 문제야말로 미국 군수산업의 마중물을 뜻합니다. 더구나 남북 간의 긴장은 한국을 미국의 최대 무기 수입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군산복합체는 북한의 '악마' 이미지가 필수인 셈이며, 북한은 한국과 일본에 무기를 팔아먹기 딱 좋은 알리바이에 불과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북한이야말로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p 238~239) … 동구권이 붕괴되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 군수산업체 쪽에서는 실제 북한이 붕괴되면 어쩌나 우려하는 기류도 있었습니다." (p18)
위와 같은 논리의 주장에, 가타부타를 언급할 만한 정치적 지식과 판단력을 저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만, 뒤이어 나오는, 북핵 문제를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본 입장에 대한 저자의 주장엔 그럴듯한 개연성이 매우 높아보인다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악마화함으로써 얻을 이익과 북한과 거래를 함으로써 얻을 이익을 끊임없이 저울질을 할 것입니다. (p220) … 이전 대통령들과는 다르게 비핵화보다는 북한을 상업화시키는 데 더 흥미가 있다고 봅니다. (p221) …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아마 흥정을 할 것입니다. 원산이나 흥남 항구 개방이라든가, 원유 탐사와 지하자원 개발 같은 이야기부터 할 것입니다. (p219)
·
·
·
'통일'이란 것이 여전히 '당위'의 개념인가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는'이란 답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위의 개념에, 손익의 개념을 들이대는) 남북한 통일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들이 천박한 발상이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 '통일은 대박'이란 (박근혜의 입을 빌린 최순실의) 생각은 '자본주의 체제로의 흡수'를 기정사실화/내심 강요하고 있다란 점에서 천박하기도 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것이었었죠. 반면,
이 책의 저자 박한식 교수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대북제재에 대한 경제적 관점은 매우 유용합니다. 현재 북한에서 생산된 광물자원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북한으로서는 달리 팔 곳이 없기 때문"(p272)이라고, "대북 제재는 북한을 중국 품에 안기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p34)할 뿐이라는 것이죠. ---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해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배제된 채 만들어 낸 '한반도의 평화'라는 것이, 왜 위험한 것인가, 왜 결국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는가... 에 대한 힌트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네요.

(종전도 결국 미국과 미국인의 덕분?)
…………………………………………………………………………………………
"미국이 북한에 대해 체질적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우리와 대화를 해보면 내가 남쪽이나 태평양상으로 핵을 쏘거나 미국을 겨냥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 … 앞으로 자주 만나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終戰)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
김정은이 금번 정상회담 중에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결국 "휴전 상황을 평화 체제로 전환하고, 북미 수교와 불가침조약 체결"(p223) 등을 원한다라는 뜻이겠죠. 근데 말이죠, 그의 발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분명 무리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 돈 없어서 빌리러 온, 근데 가오가 있어 '돈 좀 빌려달라'란 표현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는, 대신 '내 맘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었어, 내가 미쳤냐 그런 생각을 하게...' 와 같이, 빙빙 돌려 (약간은 구질구질도 하게) 말하는, 그런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체제가 붕괴하는 것은 그 체제를 유지하는 정통성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 북한의 정통성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항일 무장투쟁을 지도한 김일성 주석과 조선노동당, 그리고 미국 등 외세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p21)
비핵화하겠다는 김정은의 발언이 진심으로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것이 그의 진심이라면 --- 대한민국과 미국이 앞장서서,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 옮기려는 김정은을 (참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심히 오바스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작금의 흐름을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으로 판단하는 일부 노장 세력, 또는 자신들의 기득권 포기를 우려하는 북한의 군부에서 김정은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
·
·
저자는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선 동질성의 회복이 아닌 "이질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p279)이 더 중요하다라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
북한 입장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란 남한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예민한 문제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씁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월남한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p247)
(물론 월남한 가족이 있다라는 사실이 앞으로는 '정치적으로 좋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닌 게 되게 하는 북한 당국의 실질적 조치는 당연히 있어야 하겠죠만) 위와 같은 속내를 알지 못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북한의 태도가 미온적이라 비난하는 건 서로간에 오해만 더 커지게 만들게 되겠죠. 이 책을 읽으며 --- 책 속 저자의 주장이 다 최선의 것들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북한에 대해 참으로 모르는 것이 많았었다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과 북의 통일이라는 것이 어쨌든 우리 민족의 일이라 생각해왔었었다라는 게, 참으로 창피하네요.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전략과 전술은 한국의 국익과 민족적 이익에 중심을 두고 우리 머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정치 전략적 판단을 미국에 맡겨서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p187)
...금연 377일째
※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들 :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싸드」,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편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