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나름의 일관성 있는 논리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사회과학이라면, 경제학도 예외일 수 없다. … 경제학은 가치와 분배, 성장이라는 문제를 논리정합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학문이다. 어떤 이야기냐에 따라 기존의 사회경제 질서를 옹호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 결국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는하는 경제학자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p37)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에 대한 각기 다른 해답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다름아닌 '경제학자 개인의 정치적 견해'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이죠. 뭐 그런 판단의 주체일 수 있는 권리가 오직 경제학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들 각자의 정치적 견해, 더 나아가 (개인들의 총합이 만들어 낸) 시대적 상황 등도 또한, 해당 사회의 다수들이 성장을 선택하게할 수도, 혹은 분배를 선택하게할 수도 있을 겁니다. <주류경제학자와 비주류경제학자, 불평등을 이야기하다>란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바로 --- 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위와 같은 '정치적' 면모의 (사회적) 변화, 즉 "경제학이 분배와 성장에 관해 과거 200여 년 넘게 지녀온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p9)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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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분배 문제를 가격결정 문제로 바꿔 생각한다. 더구나 그 가격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생산에 참가한 사람들끼리 분배몫을 둘러싸고 대립하거나 갈등할 이유가 없다. (p54)
미시경제학 교과서 속에는 이처럼 '평화로운' 세계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란 다름아닌 '능력주의'를 의미하고 있거늘,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인 까닭은 능력주의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질 때 힘 있는 이가 힘없는 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움직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p73)
「21세기 자본」을 통해 토마 피케티는 "권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기여를 제대로 주장하기 어렵"(p67)기에, 그 '순수하게 기술적인 관계'란 것이 미시경제학 속 구절들처럼 자연스럽게 성립되지는 않는다라고, 오히려 능력주의란 것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p74)로서 작동하게 된다라 주장합니다. --- "이러이러한 것을 능력이라 부르자며 판을 짤 수 있는 힘"(p57)이 결국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어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결국 "모든 것이 수요·공급의 논리로 굴러가게 마련"(pp29~30)이란 냉담한 주장만을 계속하고 있는 경제학은, (맬서스 시대의 인물인) 칼라일의 '우울한 과학'이란 지적을, 그렇기에 21세기에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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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시작하는, '성장이론'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24년 전 쯤인 그 어느 한 때, 제가 저의 전공으로 삼고도 싶어했었던) 정치(delicate)한 이론 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성장론에 대한 (경제학을 전공했다하더라도 성장론을 수강하지 않았다면 쉬이 이해되지 않을/이해하기에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내용을 이 책도 역시 담고 있지요. 어쨌든 --- '성장의 이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어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닙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출현한 이래 200년이 흘렀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지지한 전통경제학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들이 말한 경제성장으로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졌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0년 동안 전 기간에 걸쳐 빈부 격차가 좁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대되어 왔다. …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중세 시대 때 공동토지에서 일했던 평범한 농부 한 사람이 연간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래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중세시대의 소작농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 데이비드 보일·앤드류 심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중, 사군자, 2012.
역시나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는 이것이 결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중세시대의 소작농이 지녔던 욕망과 현대 시대 우리가 맘 속에 품고 있는 욕망의 차이(gap)가, 경제 성장의 결과 즉 두 시점의 GDP의 차이보다 더 크다한다면 이는 (정당성이야 어쨌든)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단지)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중 p63, 더숲, 2014.
(욕망의 지나친 급성장 때문이 아닌 오로지) 경제성장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이 중세시대의 소작농들보다 더 죽어라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와같은 불평등한 분배가 왜 / 어찌하여 / 누구에 의해 발생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어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까지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가 곧 --- 그 책이 묻고 있는 질문이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저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어지간해선 읽어볼 엄두까지는 내지 못하고 있는) 「21세기 자본」 --- 출간 당시의 열풍 덕분에(?) 직접 읽어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관심이 있기만 하다면) 그 내용을 대충은 알 수 있게 되었죠. 앞서 읽었었던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의 저자인 저스틴 폭스는 HBR의 article <Piketty's "Capital," in a lot less than 696 pages>에서 (article의 제목도 사치스럽다 느껴질만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①Capital (which by Piketty’s definition is pretty much the same thing as wealth) has tended over time to grow faster than the overall economy. ②Income from capital is invariably much less evenly distributed than labor income. Together these amount to a powerful force for increasing inequality."
① ('r > g' 라는 유명한 공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자본의 증식 속도가 전체 경제의 성장 속도보다 빠르다는 점과 ② 자본 소득의 분배의 불균등이 노동 소득의 불균등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 쉽게 말해 --- "일해서 돈을 보는 속도로는 결코 돈이 돈을 버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p10) …… "'이마에 땀 흘려' 돈을 버는 이보다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재산을 늘릴 수 있다."(p18) 라는, 결국 이 논리의 끝엔...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다."
- 와타나베 이타루, 위의 책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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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 「21세가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능력주의'라는 것을 떠올려 볼 때 개인의 능력이 반영되는 비중이 (자본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는 노동소득에의 불평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저항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 "시장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과 개인들에게 더 많은 구매력(돈)으로 투표함으로써 우수한 경제 주체들에게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데, 그런 경제적 불평등이 부 창출 경쟁을 유인한다"라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측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또한 감성적으로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의 세습으로부터 나오는 자본소득의 차이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능력주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속은 저축보다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적다."
- 이왕휘,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부활 아닌 불평등한 자본에 고민을 요구한 것이다', DBR 167호, 2014.12.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능력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에만/있기에 그 정당성이 발휘된다라 할 때,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인, '이 불합리하게 조성된 불평등의 교정'에, 경제학이 일조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 "음울하고 무감각하며 우울하다"(p105)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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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 파이를 키워서 분배한다는 경제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낡고 틀에 박힌 패러다임이다"(p306)란 저자들의 주장이 옳을 수도, 혹은 "파이를 키우면 공정하게 나누지 않더라도 더 많은 파이를 가질 수 있다"라는 주장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1953년 28%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6년 12%까지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 <IBK가 만드는 중소기업 CEO report> 중 p1, April 2018, Vol.158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역사적으로 계속 줄어왔다,란 사실(史實)은 (일정 수준의 단순화를 허한다면) 결국, (우리가 '돈' 자체를 식량으로 삼을 수 없듯이, 서비스 산업이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을 만들어주지 못하듯) '더 이상은 파이를 키우는 것이 어려워졌다'라는 암울한 사실(事實)을 말해주고 있다라는, 그리하여 이같은 불평등이, --- 체제의 강요가 아닌, (합리적인) 체제 속 구성원들에게 현재와 같은 상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design된 mechanism 자체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무기력한 불안의 일면을 이 책,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념을 실행으로 옮겨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어떻게든 생겨난다라는, 이게 어쩌면 '종교'가 권하는 믿음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는, 그와 비슷하게라도 --- "원래 경제학은 …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이다. 이것이 경제학의 본질"이란 점을 우리가 잊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낼 수만 있다면,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p308)
이 책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위와 같은, 일종의 자기 최면적 잠언이,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인류가 정체과 불평등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길은 있다"(p308)라는 바람을 실행으로 옮겨낼 수 있는 동인이 되어줄 것이라, (뭐 어쩌겠습니까, 이제 고딩인 제 아들 종원군과, 아직은 상상 속의 존재인 종원군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모습일 것이라 희망적으로) 믿어봅니다.
※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드리는 책
- 경제 성장 이론에 관해 알고 싶다면 : 「지식경제학 미스테리」
- 주류 경제학에 관해 알고 싶다면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 조금 다른 경제학에 관해 공부하고 싶다면 :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 경제학의 철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애덤 스미스 구하기」
- 자본의 힘 : 「금융의 지배」, 「죽은 경제학자들의 만찬」, 「불편한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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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372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