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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교회 - 우리가 다시 모일 때
문화랑 외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0년 6월
평점 :
이번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된 책 회복하는 교회(우리가 다시 모일 때)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공동기획자와 6명의 저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어 포스트 코로나 또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다시금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 무언지에 대해서 연구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총 6가지 주제를 3가지로 신앙의 중요한 뼈대구성하였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예배, 말씀), 둘째 ‘사람과의 관계’(공동체, 양육과 훈련), 셋째 ‘세상과의 관계’(세계관, 사회적 책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면 분명 종식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의 목회 상황과는 다른 국면이 전개될 것이다. 앞서 수개월 동안 온라인 예배를 가정에서 드렸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에 공적 예배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는 그간 실시한 온라인 예배의 경험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또 다른 습관으로 형성된 부분에 대해서 신학적이며 실천적 질문들을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앙생활의 심장이며 영혼의 호흡과도 같은 예배를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 것인가?
공예배의 소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원하는 분이라고 강조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삼위하나님이 함께 한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기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깨닫게 된다. 결국 성도는 공예배를 통해서 신앙의 정체성과 신앙생활의 리듬을 형성하여 세상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굳건히 지키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이어서 예배의 쌍방향성을 회복하라 예배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형성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말아야 할 예배의 원리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되도록 하라 또한 예배의 하나님 중심성을 회복하라 한국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을 통해서 부흥회 형식의 예배가 형성되었다. 이는 교회에 처음 오는 이들이 느낄 수 있는 부담스러운 요소들을 제거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교회를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옮겨놓았다. 실제로 한국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이 좋아할만한 콘텐츠를 찾는 훈련을 시켰다. 이제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 후에 소비자적 마인드를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마지막으로 예배와 사회윤리를 연결하라 세상의 시선은 한국교회를 향한 호의적이지 않았다. 세상은 교회를 더 엄격한 기준으로 바라본다. 이제 교회는 교회됨을 통해 예배의 가치, 신앙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돈 샐리어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예배가 인간의 존재의 현실과 분리될 때 우리는 그 예배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는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적 삶에 대한 가르침 및 실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라고 아주 잘 설명해 주었다.
한국교회는 현재 위기 속에서 재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가장 먼저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와 언약이 갱신될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이야기했다. 예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있다. 이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예배를 지향하며 다양한 예배에 대한 이슈들을 하나씩 점검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말씀의 회복은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에 대한 오해는 많은 상처와 아픔을 애기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고통의 때를 보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분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고통은 자주 우리를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 시간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기 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그 위대하심과 성실하심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 주일이 없어지는 시간적 경험을 하였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공산독재치하에서 예배가 금지되고 사라진 상황이나 일주일을 7일 주기가 아니라 10일 주기로 바꾸고 형식적 미사와 예배 정도만을 허용된 탈기독교화의 프항스 혁명정부 치하의 상황 정도만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우리의 경험은 초유의 경험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는 아주 생소하지만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신앙공동체기 지금도 동일할 수는 없지만 당시 신앙공동체가 경험한 유사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유다멸망과 이스라엘 성전의 파괴사건이다. 성전이 파괴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만 했을까? 또한 제물과 제사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소용없어진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위기가 그들로 하여금 성전중심에서 율법중심으로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둘째 스데반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호에 전면적으로 불어 닥친 박해사건이다. 이 속에서도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교회에 안겨준 두 가지 핵심 이슈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장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그 분은 예배당의 영역에 제한될 수 없는 분이다. 이제 그 분은 우리의 가정, 일터 그 곳의 주인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다주었다. 우리의 시간을 대다수 보내는 가정과 일터에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 실시하고 있는 영상예배가 독이 될지 성배가 될지는 코로나19 이후에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영적 다가서기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겼다. 사실 우리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영적 거리두기를 하였다. 지금의 시간이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교제와 사귐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장래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성격과 성숙에 적잖은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이후 신앙공동체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앞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신앙공동체를 송두리째 흔들만한 두 사건을 살펴보았다. 위기 때에 교회는 본질을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신앙공동체는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시중함과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와 함께 양육과 훈련의 회복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수고하는 이유를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과거에 교육은 상당부분이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현재 교육이 상당부분이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온 상태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가정과 부모의 역할과 권위가 매우 약화되었다.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다시 한 번 가정이 학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았다. 부모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자녀들을 영적으로 돌봐야 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모가 정기적으로 교회학교 교과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또한 신앙훈련과정을 통해서 자녀신앙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며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특이 가정예배의 회복이 시급하다. 가정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가족 간의 친밀감을 높이고 신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기도하는 장으로 세워야 한다.(p.96) 교회는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다시 모여야 하지만 동시에 흩어진 교회로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도를 세워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양육과 훈련을 교회 내 신앙생활에서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분을 예배하며 증거하는 삶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대다수가 역행으로 인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숨어 있을 때에 병자들을 돌보고 죽은 자들을 위해서 장례를 대신 치러주었다. 이런 모습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께 돌아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달리 요즘 교회 안에 성도들의 관계는 점점 피상적으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성도 간에 진실된 사람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훈련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교회가 현재 물리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가까워지는 시기가 되기를 소망해야 된다.
코로나19의 원인을 찾고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를 살펴보아야 한다.(p.121-2)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4월에 팬데믹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예방의학과 홍윤철 교수는 전염병의 원인을 사람들이 들짐승의 서식지를 침범하여 그들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이 전염병이 팬데믹이 된 것은 병원균이 전파에 안성맞춤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p.123) 코로나19 이 후 이전에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반문하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코로나19를 절망이 아닌 긍적적 기회로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전보다 더 강력한 신뢰와 발전을 가져온 분야가 있다. 바로 과학이다. 코로나19는 과학시술의 필요성을 가장 화려하고도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말과 21세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과학기술은 인터넷 기반의 모바일기술이다. 연세대학교 사회학자 김호기는 2020년 4월 21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서 제 3의 자리는 현실세계(오프라인)와 가상체계(온라인)의 연결되는 공이라고 특징지었다. 제 3의 자리는 온오프라인의 중첩되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기니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과거보다 과학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며 더 나아가 신앙의 대상처럼 여기는 과학주의가 강화될 자리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흐름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전에 구소련의 정보기관도 하지 못했던 전 국민 감시가 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점점 과학기술의 진보만이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과학주의적 세계관이 전면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세대를 통해서 보여준 과학기술은 더욱 더 과학기술의 낙관주의에 큰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다.
코로나19의 도전 앞에 대다수 사람들은 정부와 전문가들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소리를 높였다. 이와 달리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여러 종교기관들은 문제해결의 걸림돌로 여겼다. 이 와중에도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주장한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었다. 그는 죽음 앞에 인간의 한계를 직면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회가 답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현존재를 경험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면 염려라는 감정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했다. 이때 인간은 의미 있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기투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인간존재를 찾는 여정을 죽음 이전까지로 보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죽음 이후 생명의 초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과학주의 세계관은 최종목적은 인간의 모든 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 조절의 대상은 인간의 생명이다. 코로나19를 통해 이 세대가 깨달은 것은 세상의 본질적 지향은 죽음을 제거한 생명 즉 오직 생존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도구이자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와 달리 교회는 죽음을 준비시켜야 한다. 과거에 성과 죽음은 가장 거룩한 의식으로서 삶에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은 엄밀하게 말해서 지연된 죽음이다. 교회는 죽음과 싸워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정면으로 직면해 세상에 죽음을 들여온 죄의 실상을 폭로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승리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죄의 실상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현재 기독교는 승리주의적 경향성으로 인해서 교양 없는 무례집단으로 시민사회에 비쳐지고 있다. 즉 선한영향력 뒤에 남겨진 무례함의 그늘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과 시민교양의 관계성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을 기초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삶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사유의 발전시킨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를 삶의 체계라고 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권을 기독교세계관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 동안 각 영역에 기독교라는 딱지로 수놓았던 승리의 깃발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각 영역의 주인을 바뀌어야 한다. 이는 세계관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 단어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전쟁은 적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데 현실은 비그리스도인과 어울려 싸우기도 한다. 물론 그들 속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양립할 수 없는 죄가 분명히 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세계관은 대중의 폭력적 무례함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다. 그 분의 주권 아래서 기독교 세계관의 역할은 제한된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죄의 불의함에 대해서 밝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승리주의 도취되어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겸손과 따뜻함으로 세상을 위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코로나19 이 후 어떻게 섬겨야 될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코로나19 이 전에도 한국교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회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섬겼다. 이제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섬김의 방향성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섬김이라는 표현 속에는 협력한다는 의미와 함께 가까이 해야 된다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본업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동역자와 함께 협력해야 된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섬김의 방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는 적실성이 있어야 한다. 즉 현재 당면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사실 섬김의 시작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특별한 계기와 장소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 맡겨주신 상황 속에서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섬김의 방법은 효과를 극대화시켜 준다.
우리가 속해 있는 지역교회의 구성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지역만이 감당할 수 있는 주제를 나누어야 한다. 섬김의 주제가 지역에 맞게 개발되면 자연스럽게 섬김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 특별히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과 효과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과제이다.
누가복음 2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떡과 잔을 나누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자신의 발자취를 따를 제자들을 향해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이웃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가까운 이웃과 협력해야 한다. 지역성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서 계셨다. 즉 그 분은 섬기는 분이셨다.
마무리하면서 공동기획자와 6명의 저자들은 코로나 19 이후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들의 고민이 흔적들이 책에 담겨져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고민과 노력 위에 노력해야 한다. 이들의 노력에 대해서 아무런지도 않게 판단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코로나 또는 위드코 로나와 상관없이 거친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길을 함께 가기를 소망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자신있게 소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