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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잡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지금 소비하고 있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아껴가며 일하며 여가를 즐기고, 초와 초 단위까지 쪼개서 아낌없이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후회한다.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통제를 할 수 있기를 바람에도 가속화되어 한참 뒤에 돌아보면 과거의 나는 작은 점으로 변하다가 이윽고 보이지 않는다. 더 열심히 충실한 자세로 시간을 사용하려고 하면 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버리고 의미는 사라기제 되는 것인지.
저자는 이미 현대인이 소유하고자 하는 시간은 휩쓸러 가고 현재는 덧없이 쪼그라든다고 표현한다. 인간은 적절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고 제때죽지 못하는 시간에 종속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이 현재(Present)는 불시성이 강화되어 인생 밖으로 와서 삶을 불시에 종결시키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삶을 의미 있게 완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유리는 우리의 소질, 능력을 발휘하여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이 삶의 전범이라고 착각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죽음이라는 것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시간의 개념을 나눠보면 여기에서 신화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신화적인 관점에서 시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질서 속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역사적 시간은 이와 다르다. 시간은 앞으로 달려가며 정적이지 않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미래로 변화되어 간다. 그리하여 목표를 향해 선을 그리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긴 하지만, 이 서사적 긴장 및 목적이 없어지면 이 선은 점으로 흩어질 뿐이다.
신화적 시간은 과거의 것으로 사라져버리고 역사적 시간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간의 가속화를 촉진시키고 현대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정보의 바다에 휩쓸리게 되면서 향기를 잃어버렸다. 그러면 선은 점으로 시간 사이의 간극을 만들게 되고, 이것은 의미 없는 시간을 인간으로 하여금 극한 공허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 공허감을 없애기 위해 각종 사건에 의미를 만들어 넣어 점을 잇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것은 사색적인 머무름 대신 불안정한 시간을 더욱 빨리 가게끔 촉진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역사의 실체가 사라지는 이유를 정보의 과밀화와 급변하는 사회와 정보가 존재감을 지워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에 의하면 가속뿐만이 아닌 시간의 감속에도 포함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고착화되어 밀려드는 정보에 의해 역사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을 더 이상 의미의 매듭으로 묶어 두지 않고, 점점 가벼워지면서 역사대신 아무것도 의미 없는 시간의 휘발성화를 발생시킨다.
근대로 넘어가면서 아직 시간의 서사적 특성은 없어지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삶을 실천하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고, 희망을 향해 달려가면서 시간의 가속화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시간의 가속화가 강화된 것이 아니고 시간적 중력의 부재가 삶에서 균형을 빼앗고 혼란을 초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간 속에는 모든 사건들이 무의미해직 난비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빨리 죽고 만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p65
“인간은 짧은 나비의 단계를 넘기고 다시 걷는 자로서 땅 위로 돌아올 것 인가? 또는 땅의 무거움, 노동의 무거움을 아예 벗어던지고 가벼운 유영을, 유영하는 듯 느긋한 방랑을, 그러니까 부유하는 시간의 향기를 발견 할 것인가?” p66
시간적으로 현재에서 미래를 넘어갈 때의 간극을 목표지향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 간격을 극복해야할 고난과 걸림돌로 표현이 된다. 오직 내가 할 일은 이 간격을 빠른 시간에 넘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 사이 점과 점을 잇는 선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이는 우리가 순례를 할 때 목적지를 향해 있는 길에서의 참회, 사색, 기도하는 시공간 적인 의미를 둔 장소와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가속화는 이 사이공간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즉 현대사회에서는 이 불필요한 간극을 극복하고 최대한 빨리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믿음이 되었다. 현대 사회의 모든 과학기술은 다 이 개념을 자양분으로 개발된 것이다. 간격의 사라짐으로 ‘사이’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그래서 생겨나는 것은 지향점이 없는 공간이다. 여기저기를 의미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웹에서의 브라우징을 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러면서 우리는 머무름의 미학대신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행위를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시간이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 핵심을 논의하였다. 지속성을 위한 프루스트의 전략은 시간을 향기롭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촉각, 시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의 힘을 빌려, 기억을 촉발시키고 이는 시간의 향기로 만들 수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기억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재생산하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시간의 지속성에 따른 그 순간의 조합의 혜택인 것이다. 내 시간의 사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게 하여 시간의 중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삶은 끊임없이 …… 사건들 사이에서 새로운 실을 자아내며, …… 그리하여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극히 사소한 지점과 다른 모든 지점들 사이에 존재하는 풍요로운 추억의 망은 우리에게 단지 그 가운데 어떤 연결선을 택한 것인가 하는 결정만을 허용할 뿐이다.”
p82 저자가 Marcel proust, Die wiedergefundene Zeit 에서 인용
시간은 흘러감에 따라 아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지속성을 가진 시간은 흘러가면서 향기를 남기고 이후에 오는 시간은 나름의 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의 향기들은 서사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좋은 시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비워낸 정신이 바로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준다. 시간의 깊이는 모든 순간을 온 존재와 그 향기로운 영원성과 결합한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 p100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접할 수 있는 미디어들은 이른바 세계의 탈거리 화를 일으킨다. 인터넷은 공간자체를 없애고 인간은 공간을 쉽게 머무르지 못하고 산만하게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빠름을 추구하게 되었고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시간이 없는 까닭은 노동에 의미를 두고 소비하며 일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유하지 못한 실존 속의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계에 빼앗기는 까닭에 시간을 잃어버린다. 단호하지 못한 자는 염려의 대상에게 분주하게 매달리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염려의 대상으로 인해 자기 시간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그런 이들은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p108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이 마구 산만하게 시간에 끌려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간에 닻을 내리고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을 역사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이 흩날리는 것을 방지 하지 않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역사적 시간처럼 서사에 이끌려 어떠한 목적성으로 달려가는 것에서 한층 발전하여, 왕복과 회귀의 이미지로, 목표로 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이야기와 사건들의 중심으로 두고 한 사색적 머무름의 장소로 놓게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현대인은 이와 같은 시간의 간극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어떠한 역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고, 이런 과도하고 결연한 태도에서 오히려 권태라는 부작용을 맞는다. 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잃어나야 권태가 없어지고 충만한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렇게 난비하는 시간 속에서 매일 동일한 행동과 선택을 맞이한다는 것은 권태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따르는 삶의 양식중 제일 높게 평가하는 삶 중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비오스 테오레티코스)을 최고로 꼽았다. 오직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노동은 삶의 욕구에 묶여있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에 관여되어 있지 않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한가로움과 신경 끄기와는 연습이 아니다. 사색은 진리를 향한 노력이라는 말로써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모습은 이런 사색적 삶과는 거리가 먼 소비사회에서 시간에 의해 버림받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시간의 향기는 사색적이고 정적인 활동이 아닌 노동 후 잉여 시간을 노동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휘발적인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가고 있다. 이러한 시간이 향기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로 들어섬에 따라 모든 사물과 정보는 가속화되고 의미가 없어지고, 현대인은 이러한 소비재에 길들여져 지속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노동의 시간은 지속성이 없다 소비된다. 내 삶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사색적 삶은 지속성을 실천한다. 노동을 중단시키고 또 다른 나의 시간을 정립한다. 사유 활동은 오히려 활동적 삶보다 한 단계 고차원적인 활발함을 가지고 있다. 사색하는 동안에는 좌우가 없고 깊이가 없고 높이 없이 무한하게 나아갈 수 있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사회에서는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과 근면이 미덕인 사회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만큼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 내 삶의 시간이 침잠하고 사색하지 않는 삶에는 이러한 노동에 대하여 수동적인 동물로 전락해버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마지막 부분의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무리를 짓기로 한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