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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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결국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이다.

전전 정권 시절에 들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역시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구독의 계기가 되었다.

점차 다른 팟캐스트를 듣게 되면서 이 책의 저자도 알게 되었다. "나는 꼽사리다". 팟캐스트 대화 내용을 묶어 펴낸 노란 색 표지의 책도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 읽은 책의 표지도 노란색이다.

생각해보니 나름 저자의 책을 좀 읽었더랬다.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책의 이름이 '88만원 세대'일 것이다.

태엽이 달린 인형의 모습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표지. 내용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표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자는 책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좋은 일은 누군가 말을 꺼내고 그 말이 여기저기로 전해지지 않았는데도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변화 특히 좋은 변화는 말로부터 온다. 그게 우리가 계속해서 얘기하고 떠들고 수다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의 말' 중에서

'저자의 말'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조금은 있을 것이고, 직접적인 비판을 피해가는 것은 아마도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고, 남은 기간 동안 더 잘해주기를 바라면서 평가를 유보한 까닭일 것이다.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특히 더 할 말이 있어보이나, 여기서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정권 비판이 아니다.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냐는 제안이다.

'출근이 덜 괴로운 직장'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저자의 말' 중에서

직장 내 조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약자의 조건이 나아지면 결국 차상위의 조건도 나아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성의 조건이 나아지면 남성의 조건이 불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 중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조건도 어느 정도 개선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출근이 덜 괴로운 직장이 되려면 자주 부딪히는 조직 실무라인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큰 권력은 무섭지만, 작은 권력은 끈적끈적하다.

2장 팀장 민주주의 중 팀장님 나빠요 82쪽 참조

일상적으로 접하는 갑질이 있다. 회장님이나 사장님은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대면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TV에서 접하는 것만이 갑질이 아니다. 세상이 변하니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일들이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할 일들로 변화를 하는 것이다. 변화에 뒤쳐지면 단지 불편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곧 직장에 나가지 못하는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읽다보니 정말로 신선한 분석이 눈에 띈다.

그런데 진짜 산업 차원의 변화는, 룸살롱 가지 않는 감독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젠더민주주의 중 김영란 법과 주 52시간 근무, 여성들의 경제 시대 110쪽

중요한 감독들이 룸살롱에 가는 걸 싫어하고,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영화 산업에서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단다. 룸살롱에서 영업하는 관행이 줄어들면서 여성들이 움직일 공간이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산업에서 우연히 룸살롱 비지니스가 퇴조한 것과 유사한 흐름이 사회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접대를 제한하는 김영란법이란다.

사회적인 변화는 우연한 것에서 출발하고 제도에 의해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예전 법학개론 수업을 들을 때,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무엇인가? 라는 주제가 있었다.

교과서적인 답변은 "깨어 있는 시민의 양심"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추상적이라 "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공허한 답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결국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선후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듯 하다.

결국 제도란 사회적인 합의의 산물이고, 제도가 만들어지면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

기업(민간)에서의 복지 문제.

저자가 직장생활하면서 보았던 낙하산에 대한 경험. 갑질 문제.

취업때 발생하는 비리를 막는 법에 대한 간단한 해결방법 - 면접볼 때 감사실 직원을 대동하면 해결된다고 하니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나는 늘 작아진다. 가끔은 불의와 타협하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고 넘어가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적폐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고 말을 하면서 살자. 그래야 언젠가는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고, 어렵지 않은 용어와 설명을 사용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맞게 쉽게 읽힌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 읽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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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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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 중 최신작입니다.

전작을 읽어보진 않았는데, 책장 넘기던 중간중간 검색까지 해보았습니다. 조만간 찾아서 읽어볼 예정입니다.

이용 중인 리디셀렉트에 '지옥이 새겨진 소녀'가 있더라구요. 주인공 자비네와 슈나이더가 연방범죄수사국의 학생과 교수로 만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전작이 궁금해져 같이 읽을 정도로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먼저 흥미로운 캐릭터들.

20년 전 사건. 아내와 아이를 방화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을 마친 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과거 동료들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하디(영화 매드맥스에 출연하고 최근 베놈으로 등장했던 상남자 "톰 하디"가 그려지는 인물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복수일까요. 진실일까요.

출소한 이후 그가 찾아간 사람들 중 여러 사람이 자살(?)하게 됩니다.

장에 등장하는 특이한 방식의 자살(무려 고속도로 역주행입니다). 슈나이더에게 보낸 문자의 의미.

과거 어느 시점의 6월 1일 이라는 단서.

20년 전 사건. 6인그룹.

진실. 도청. 조력자. 자살로 위장된 연쇄살인.

감각적인 수사기법. 기밀로 분류된 과거의 기록을 찾아내게 되는 방식.

등장인물시각을 달리하며 보여주는 과거와 현재.

자비네. 티나. 슈나이더는 저마다의 수사방식을 보여줍니다. 특히 슈나이더가 자비네를 찾기위해 움직이는 부분은 그 특이한 성격에 비추어봤을 때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하디가 과거의 동료들을 하나 둘 찾아갔을때 그들의 반응과 단서들을 따라가며 다가가는 진실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요?

6인그룹 관련자들의 죽음은 누구의 짓일까요?

20년이나 아내와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야 했던 남자와 그를 유죄로 만들고 모든 기록을 기밀로 만들고 주변지인들을 감시해야만 했던 자들의 이유는 무엇이고, 하디가 출소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토록 애를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흥미로워 책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 소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죽음의 론도" 였습니다.

시리즈물의 특성상 다음 권을 기대하도록 만든 마지막 장면까지. 버릴 게 하나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츤데레 매력이 있었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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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성, 건축가입니다
데스피나 스트라티가코스 지음, 김다은 옮김 / 눌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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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여성 건축가는 어디에 있을까?
혹은 어디로 갔을까(사라졌을까)?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 소설에서 여성 의사나 변호사 혹은 검사 같은 강인한 여성들로 묘사되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히로인이 등장하는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영화나 소설이 아닌 뉴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간 이름 있는 건축상 수상자를 찾아보아도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인 듯 하다.

역사란 단지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된 과거의 기록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여성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클레오 파트라 혹은 대처 정도일까? 그마저도 남성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름 난 여성건축가를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일응 당연한 것 같다.
굳이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근대 이전의 역사속 인물들 중 여성은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배우자로서의 역할이 부각되었으므로 대외적인 활동을 자신의 이름으로 하는 주체적인 인물보다는 주변인물로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유는 건축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여성의 역할과 기록에서의 부재가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건축가 바비"가 끼친 영향과 "위키피디아" 편집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이었다.

1. 직업으로서 가능하다는 인식의 확장과 영역 확장 - 건축가 바비, 연대의 확장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적어낼 때 '건축가'라고 적은 친구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특히나 여자인 친구들의 경우는 "현모양처"가 장래희망인 경우도 있었으므로 더더욱 찾기가 힘든 직업군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창의적인 능력과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기질을 고려했을 때, 여성에게는 동시대 여성들이 경악할 정도의 "엄청난 열의"로 질병을 공부하고 해부 실습을 하는 의료계보다 건축계가 더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변에 롤모델이 될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고 언론에 노출되는 여성건축가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기조차 어려웠을 것 같다.
"건축가 바비"의 역할은 건축가라는 직업이 "나도 될 수 있"는 직업으로 인식하게 만든 점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우(대기업 임원이나 정치인 등)를 살펴보면, 조직생활을 함에 있어 남자 보다 더 남성성을 강조하고 가정에서 어머니나 배우자로서의 역할에 시간을 덜 할애한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보니 홀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여성인 후배나 후임을 끌어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결국 특출된 1인자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성 건축가들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종합적인 사실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 원인은 기존 남성적 시각에서 설명한 원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남성의 시각에서 보기에(마르셀 브로이어라는 남성건축가의 인터뷰 中 인용. 본인이 운영하는 사무실에 여성건축가들을 고용하였고, "아주 훌륭한 제도공"이라 인정하면서도 여성이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한계지었다) '성장하지 목한 근본적인 문제는 남편과 아이들, 가정'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생물학적 차이에 있어요.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다른 일은 할 수 없죠. 해방운동을 하는 여성들은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29쪽
-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건축가의 한계 지움 : 인터뷰 당사자는 스스로가 하는 말들이 모순됨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즉, 여성 개인에게 책임을 찾는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여성이 건축업을 떠나게 되는 핵심 원인"은 "업계 전반에 깊게 남아 있는 기회와 처우에서의 성 불평등과 남성 중심적 업계 문화"이다. 그 원인은 어떤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다양하고 반복적이며 복합적인 일련의 상황이다- 45쪽 말미에서 46쪽 세번째 줄까지

저자는 여성 개인사정이 아니라 외부에 있고,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만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여성인 직장인에게 강요되는 역할은 가정에 충실하고 사회생활도 똑부러지게 하는 원더우먼이다. 결국 제 풀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업계 내 여성들과 연대하고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임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2. 기록 - 위키피디아 편집자로서 참여

또 한가지 방법은 여성 건축가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 홍보가 여성으로서 매력적인 자질이 아니라고 배워온 여성들은 소리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크게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기록에서 배제되어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또한 단체구성원 중 1인인 경우 대표격인 한사람의 이름이 강조됨으로써 보조격인 여성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까닭도 있었다.

"위키피디아가 진정한 '인간 지식의 총체'로 유지되려면 편집에 참여하는 이용자가 실제 인구만큼 다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해야 하죠.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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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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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할 수 있는 직업.
어느 투수는 1이닝을 책임질 수 없을 때. 그만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본인 스스로 은퇴를 선언했다.
정신만이 아니라 그에 부합하는 신체적인 능력, 외형이 뒷받침되어야 유지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 대한 자긍심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정해진 답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시점에서 내려와야 하는지 숱하게 했을 고민.

'남아 있는 나날'이란 책은 노벨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다. 우연하게도 노벨상 수상 이전에 종이책을 샀더랬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던 그 책은 고향 집의 책장에 얌전히 모셔져 있고, 그 책을 처음 완독한 사람은 아버지일 것이다(아들이 아버지의 은퇴시점을 바라보는 내용이 등장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번에 독서모임에서 첫번째 함께 읽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전자책으로 구매해서 읽었는데 한 인물과 그 사람을 둘러싼 지인들과 환경으로 채워진 긴 세월을 읽어나간다는 것. 그 자체로 책의 남은 분량이 나에게 있어 '남아 있는 나날'이 되었다.

전자책의 무수히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긴호흡이 필요한 책은 역시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어야 맛인데 그러지 못해서인지 참 오래도록 읽었다. 그럼에도 긴호흡으로 한번에 읽지 못하고 다시 앞을 읽었다가 다시 돌아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역시 '상'을 받은 책들과 나는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친하지 않은 종류의 책이라도 일단 완독하게 되면, 그 끝엔 무언가 '성취감'이 생기기에 포기만은 하지말자는 심정으로 읽었다.

특이한 직업이 등장한다. 여타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변인물로 그려지는 '집사'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인상이랄까? 과묵. 능력. 무표정. 엄격함. 통제. 상황파악.
주인공(스티븐스)의 입을 빌려 말하면 '품위' (저는 '소명의식이 외부로 발현된 이상적인 형태'로 표현하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집사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런 역량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나는 우리가 말하는 '품위'란 것은 이 업에 몸담고 있는 한 끊임없이 의미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본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업에 충실하고자 한눈 팔지 않고 살아온 결과 본인의 사적인 감정을 숨기고, 아들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연을 놓치고 맙니다.

책의 도입부가 영국인 주인이 아닌 미국인 주인으로 바뀐 후, 북적이던 식솔들이 줄어 4인체제로 남고 본인이 언젠가 본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들에서 실수가 발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한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휴가를 받아 오래 전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인연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시작된 것은 여정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인공의 남은 날은 어떤 날들일까요?
휴가를 받았음에도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때 연인이 되었을 여인의 편지 어느 문구에 묻은 감정을 쫒아 떠난 여행을 통해서 주인공은 살아갈 힘을 얻었을까요?

중간에 나오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일화와 육체의 노쇠화에 따른 실수. 업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이 반복될 것인지.

한사람의 세월을 다루고,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이후 모시는 주인의 교체와 지위 변화를 통해 남은 날을 떠올리게 하기 보다 살아온 날을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반추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5년 후, 10년 후에 읽었을 때. 느낄 감정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책. '남아 있는 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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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잠든 물고기 나남문학번역선 20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인옥.김경림 옮김 / 나남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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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뷰

아이를 가진 여성들 사이에 이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느껴보는 것 같다.
역시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것과 당사자로서 느끼는 감정은 확연히 다를지도...

책을 읽기 전 1999년도에 일어났던 일명 '수험살인'이라는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라기에 아이의 죽음으로 끝이나겠구나 추측하면서 읽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에서 죽은 아이는 없으니까 안심하고 읽으셔도 될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 5명의 근황이 전부 등장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을테니 이 글을 일게 되는 독자분들에게 미리 알려드린다. 이 점에서 옮긴이의 글을 책의 전반에 배치한 것은 영리한 편집인 듯 하다. 옮긴이의 글에서 실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명을 알면서 엄마들의 감정에 몰입하다 보면 비극이 일어날 것만 같아 좀처럼 긴장의 끈을 놓질 못한다. 덕분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선이 이토록 무서울 줄 몰랐다.
엄마 5인이 각자를 알기 전의 모습, 서로 알게 된 계기, 사이좋은 한 때, 자녀의 진학에 대한 엄마들의 인터뷰를 기점으로 해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들의 사이, 이후 서로를 밀어내게 되는 과정, 실제 있었을지 알 수 없는 한 엄마의 파국을 그린 장면, 결국 아이의 입학을 앞둔 시점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5명의 엄마.

사소한 말 한마디.
말을 한 사람은 후회를, 듣는 사람은 오해를 한다.
즉시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둘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일일이 말을 하기도 어렵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오해의 크기가 커질수록 친밀감의 간격이 멀어진다.

교육에 대한 입장차도 아이들에 대한 암묵적인 서열 혹은 평가가 매겨지면서 정보공유에서 각자도생이 된다.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었던 관계가 마이너스가 된다. 호의에 대한 과도한 의존, 각자의 영역에 대한 무심한 침입으로 후회스러운 관계가 되는 과정을 작가는 첨탑을 쌓아가듯 정성스럽게 쌓아올린다.

그렇게 쌓아올린 첨탑이 무너지기 직전. 모티브로 했던 사건이 실제로 소설에서도 펼쳐질 듯 한 그때. 작가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5명의 엄마 중 누구인지, 아이는 누구인지에 대해 정확한 묘사를 하지 않고 피해간다(아이에 대한 설명으로 위험한 일을 저지를 엄마가 누구인지 대략적인 추측은 할 수 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느낌도 난다(실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만큼 엄마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모임은 해체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엄마들이 마지막에 본인들의 삶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은 이토록 단순한 사실덕이다.

반복되겠지만. 내 삶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세상은 그대로이고 내 삶은 끝이 나기 전까지 계속 된다. 아이가 국립 또는 사립에 들어가지 못해도.


자기 아이에 대해 항상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지만 다른 모습을 보일 때도 있고, 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어떤 부모라도 같지 않을까. 교육에 대한 문제는 그래서 어렵다. 같은 공간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2. 인상깊은 구절

요코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거나 숨긴다거나 그런 식으로 금방 생각하는 사람, 나는 치카에게 그런 식으로 보였던 것일까. 치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요코는 순간 불안해졌다.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싫어했던 건 아닐까. 너무 캐묻는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안절부절 못했다. 그게 아니라, 치카에 대한 것을 전부 알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야기 흐름상 물었을 뿐이라고 치카에게 설명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226쪽

치카
명품백, 그러고 보니, 요코 씨였는지 히토미 씨였는지, 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니, 다치바나 유리가 했나. 자녀를 유명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기분일 거라고. 하지만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살 수 있는 여유가 돼서 샀다면 들고 다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남에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갖고 싶었던 거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287쪽

마유코
왜 내가 이런 곳에 이사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왜 내가 그 좁은 아파트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왜 내가 도심에 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걸 했을까. 왜 내가-내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싶었던 걸까. 뭐가 갖고 싶은 걸까. 조용한 의문이, 소리도 없이 내리는 눈처럼 마유코의 가슴에 퍼져 갔다. 363쪽

가오리
작은 실패 따위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거야말로 내가 에리카에게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야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448쪽

히토미
그런데 왜, 지금도 굶주린 듯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히토미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불만으로 생각하는지, 무엇을 참지 못하는지, 자신 안에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패배감이 있는 것인지, 히토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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