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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식물분류학 박사인 신혜우 저자가 미국 메릴랜드 숲에서 머문 시간 동안 식물과 계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눈이 내리는 숲속 겨울부터 초록이 무성한 여름과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을 지나 다시 차분해지는 초겨울까지. 계절의 순환 속에서 마주한 식물들의 모습이 단정한 문장과 정밀한 손끝으로 담겨 있다.
저자는 식물 하나하나에 오래 시선을 머무르고 이름을 불러주며 변화의 순간을 붙잡는다. 그저 식물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의 리듬을 발견하고 내면의 사유로 이어나간다. 식물 전문가이지만 새롭게 발견한 식물이나 새로운 사실 앞에 호기심과 반가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봄마다 배꽃을 보고 가을마다 배를 먹으면서도 나는 과연 배나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던 것일까. 인간이 키우는 배나무에는 3000종가량의 품종이 있는데 대부분이 서양배와 비슷하고 한국 배처럼 둥글고 아삭한 품ㅗㅇ이 더 적다. 후숙해서 먹는 부드러운 맛으로 배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더 많은 셈이다. (...) 나는 잘 안다고 여겼던 식물에 대해 새로운 걸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고 반성한다. 배나무는 그중에서도 참 강렬했다. 나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배꽃이 지기 전에 언덕 위 배나무를 다시 만나러 갔다."(p.49-50)
각 장에는 직접 그린 생태 드로잉과 필드 노트가 함께 실려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식물과 함께 걷는 듯한 몰입을 경험하게 한다. 과학자의 눈과 예술가의 감성이 교차하는 이 책은 지식을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식물의 세계를 깊이 있게 전한다. 생태적 맥락 속에서 식물의 구조와 습성을 짚어내는 설명은 전문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다. 동시에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성찰은 독자들에게 사유의 여백을 건넨다.
"메이애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확히 계획하고 그에 맞게끔 자신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한 식물이다. 물론 모든 식물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획하고 자라나지만 메이애플을 관찰하다 보면 놀라울 때가 많다. 메이애플이 옹기종기 모여 솟아나는 것은 그 아래 뿌리가 길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면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가 다르다. 이것은 자신의 꽃가루가 자신의 암술에 옮겨지는 자가수정을 막기 위한 지혜다. 자가수정을 하지 않으면 유전적으로 건강한 씨앗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멀리서 꽃가루를 구하지 않고도 쉽게 씨앗을 맺어 개체수를 늘리는 자가수정의 장점은 얻지 못한다. 그래서 메이애플은 자가수정을 통한 번식 대신 길고 옆으로 뻗는 뿌리를 통해 개체수를 늘려가는 방법을 택했다."(p.54)
저자는 이름 모를 들풀 한 송이에도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조용히 눈을 맞춘다.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관찰이 곧 애정이고 일기처럼 기록하는 것이 하나의 존재 방식임을 일깨운다. 자연을 대하는 그의 섬세한 눈길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버리고 사라지는 자연을 바라보며 인생의 태도와 연결하여 사유한다.
"사실 꽃잎이 떨어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식물이 정확히 계산한 움직임 중에 신기하지 않은 과정이 없다. 또한 모든 과정이 순서대로 잘 수행되어야 한다. 버리는 것과 사라지는 것도 말이다. 내려놓는 것도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처럼.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건 당연한 듯 보이지만 어느 과학자는 호기심을 가져 중력을 발견했다. 이렇듯 자연의 모든 일은 사실 대단히 신비하고 필연적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떨어진 벚꽃잎이 흙색으로 변해 발에 밟히는 시간도, 벚꽃이 지고 푸른 잎이 무성해 사람들이 벚나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날도 말이다."(p.60-61)
이 책은 빠르게 읽기보다 자연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곱씹어 보면 좋다. 하루 한 장 또는 한 계절의 한 조각씩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나만의 삶의 숲을 떠올리게 된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도 자연과 연결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조용한 쉼과 회복을 건네준다.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사유를 놓치지 않으려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삶의 작은 존재들을 오래 바라보는 태도와 그 태도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일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출판사제공도서, 솔직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