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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의 시간 속으로 - 지구의 숨겨진 시간을 찾아가는 한 지질학자의 사색과 기록
윌리엄 글래슬리 지음, 이지민 옮김, 좌용주 감수 / 더숲 / 2021년 10월
평점 :
근원의 시간 속으로
가끔 수많은 찬사와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홍보에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은 그 수많은 찬사와 문학상 수상이란 설명이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작품이었다.
마치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의 영혼과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의 영혼이 결합된 듯한 저자는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탐구하는 지질학자면서도 자신의 사색과 기록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한편의 대서사시로 그려낸다.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익숙했던 알래스카가 아닌 그린란드 라는 점도 신선했는데 저자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에서 몇 주 동안 야영을 한다. 인간의 존재를 경험해본 적 없는 세상을 아무런 저항 없이 걷고 항해고 지구 전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오래된 기반암의 샘플을 찾아내고 사진을 찍고 측정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극한의 환경 속에서 유지되고 진화하는 대지와 생태계, 한없이 작은 인간의 존재를 생생하면서도 문학적으로 함께 사유하고 느끼게 한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의 그린란드에서의 경험과 생각 느낌들을 과학자가 쓰는 언어가 아닌 예술가가 쓰는 언어로 말한다는 점이다. 어떤 대목들에서는 너무 진지하고 비장하며 거창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 표현들이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거대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에 그걸로도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이로움 자연과 함께하는 철학적 사유을 독자들이 즐겁게 공유할 수 있도록 쓰는 대목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야생에서 펼쳐지는 생사의 보편성에 경탄하고 있었다. 툰드라 표면에는 새의 뼈와 북극여우의 두개골, 순록의 뿔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진화론적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증거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새하얀 땅 위를 어두운 음영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미래는 계속해서 뼈의 표면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우리가 계획하고 구축한 세상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어떠한 세상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난 수십억 년에 걸쳐 펼쳐진 변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무엇인지, 무엇의 일부인지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야생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곳은 뼈가 놓여 있는 세상이다.
이 땅은 우리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분에 거주하며 그 일부만 경험할 뿐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2.5미터 높이와 몇 미터 너비보다 적은 공간에 딱 들어맞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그 일은 잘해낸다. 하지만 툰드라 식물과 흠뻑 젖은 토양의 뒤엉킴 속에 존재하는 세상에는 애초에 접근할 수 없다. 조차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형태에도, 매가 날아다니는 혼돈 가득한 해류에도.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경우 우리는 빈곤해지고 무지해진다.
위대한 외로움 속에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내 주위의 풍경은 새로움과 조화로 굉장히 아름다웠다. 색상, 질감, 형태, 패턴이 한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막힘 없이 흘러갔다. 중대한 개념(바위, 물, 공기, 추위)들을 제외하고 익숙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이해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