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평점 :
용서하지 않을 권리
그알에서도 몇번 만나봐서 낯익은 국내 최고 트라우마 상담가 김태경 교수의 책이다. 무엇보다도 범죄학이 아닌 피해자학이라는 일반적으로 미디어가 집중하는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는 제안과 설득이 신선했고 평소 나의 생각과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책 제목인 용서하지 않을 권리와 용서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는 문장부터가 내가 가진 고정관념과 편견들에 균열을 일으켰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사회가 잔혹한 범죄에만 주목하지 말고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고 피해자들의 아픔과 상처에 관심을 가져야함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저자는 피해자를 바라보는 적정한 시선과 태도는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 데서 시작하고 무엇보다 피해자의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누군가 범죄 피해자가 되었을 때 우리의 일부가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고 그 아픔을 건강한 방식으로 공감해 주고 그들이 잘 회복해서 건강한 이웃으로 돌아오도록 돕기를 제안한다.
실제 나 역시도 전 남편을 끔찍하게 살해했던 고유정이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가졌고 이춘재와 조두순이라는 범죄자와 관련된 각종 언론들의 프로그램만 소비하며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사건이 얼마나 잔인했는지에 몰두했다. 반면, 범죄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수준은 현저히 떨어진다. 매체와 소문을 통해 들은 파편적인 정보를 토대로 너무 쉽고 빠르게 피해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며, 때로는 정당한 이유 없이 그들에게 다양한 굴레를 씌우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착각하며 피해자를 쉬운 언어로 위로하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하고 폭력적인지 이 책은 낱낱이 밝힌다.
“참 이상하죠.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잊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만 울고, 이제 웃어’라고 재촉하던 주변 사람이 막상 제가 웃으니까 뒤에서 욕을 해요.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도 좋다며 웃는다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연구에서 범죄 영향을 벗어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요인이 ‘주변의 지지’임을 공통되게 보여주는데 이 말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범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누군가를 도울 유일한 자원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시간을 달리 경험하며 결과적으로 시간의 긍정적 효과도 사람마다 달리 나타난다. 보호적인 환경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시간은 분명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특효약이다. 하지만 홀로 고독하게 후유증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경우 긴 시간은 또 다른 고통이 되며, 고통스럽게 보낸 그 시간이 쌓여 증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회복의 여정은 길고 험난하다. 그래서 홀로 감당하기에는 무척 버겁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의 가장 존경받는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말처럼 돌봐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길은 덜 외롭고 덜 고단할 수 있으며 인고의 시간도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