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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다 - 고대 알렉산드리아부터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
리처드 오벤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월
평점 :
책을 불태우다
아무리 다양한 역사책들을 탐독한 역사덕후라도 처음 맛보는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지식 보존과 파괴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이다. 특히 책과 도서관, 그 자체의 질감과 경험을 사랑하고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도 즐거운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옥스퍼드대학 보들리 도서관 25대 관장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디지털 세계는 이분법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으로 지식 창출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쉬워졌고, 텍스트와 이미지와 다른 형태의 정보를 복사하는 것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쉬워졌다. 디지털 정보를 방대한 규모로 저장하는 것은 이제 가능할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값싸다. 그러나 저장은 보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온라인 플랫폼에 의해 저장된 지식은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 디지털 정보는 부주의와 고의적인 파괴 양쪽 측면에서 놀라울 만큼 취약하다.
책의 구성은 이상적 도서관의 효시로 널리 알려진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설과 쇠퇴에서부터, 중세 종교혁명 시기 신교도들에게 공격받고 파괴된 숱한 수도원 도서관, 근현대 전쟁에서 조준 타격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나라의 도서관들, 그리고 자신의 작품과 기록을 없애버리려던 작가들과 그 뜻을 따르거나 거부한 지인들의 이야기까지, 책과 도서관에 관한 처음 들어보는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그 역사를 탐닉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설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이는 도서관과 기록관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장소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무세이온에서 책과 학자들을 결합시킨 데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명성은 고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고, 역사를 통해 전해져 내려갔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지식을 수집하고 조직화하는 그 사명을 모방하도록 다른 사회를 자극했다.
그 외에도 저작자가 직접, 혹은 지인을 통해 자신의 저작물을 없애고자 한 사건들을 풀어내는 대목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도 흥미로울 것 같았는데 시인 바이런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와 친구는 오랜 논의 끝에 결국 회고록 원고를 불길 속에 던져넣었다. 고인의 명예를 지키려는 명분이었다. 시인 필립 라킨의 일기도 사후에 그의 부탁을 충실히 수행한 지인의 손에 의해 사라졌고, 작가 실비아 플래스의 일기 일부는 그의 전남편에 의해 제거되었다.
또 한가지 섬뜩하게 느껴졌던 대목 중에 하나는 우리가 기록을 올리는 SNS 등의 플랫폼이 모두 거대 사기업의 소유이자 사업수단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 공공적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데이터 보존 작업에 함께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데이터를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이용의 전모와 그것이 가진 효과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서서히 쇠퇴한 까닭이 고대인들의 안주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디지털, 온라인 데이터의 보존 및 관리에 대한 공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