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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의 수줍음 ㅣ 매일과 영원 3
유계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꼭대기의 수줍음 - 유계영 에세이
요즘 개인적으로 관심있게 챙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매일과 영원’의 세번째 책이다. 이번엔 유계영 시인의 글이었고 시중에 넘쳐나는 에세이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일기 같으면서도 시적 표현들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한참을 읽다보면 작가 개인의 에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멋진 문장들과 별난 생각들과 표현들에 몰입하게 된다. 책의 제목이 꼭대기의 수줍음은 책의 초반부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되는데 crown shyness라는 나무의 꼭대기 가지들이 서로 닿지 않게 간격을 유지하며 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주로 저자의 다양한 일상과 인생에 대한 경험과 생각 느낌들을 개성있는 표현들과 남다른 시각으로 그려내는데 공감되는 대목들에서는 희열을 느끼고 나와 전혀 다른 작가의 성격들과 생각들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자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저자는 싫어한다고 얘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 싫어한다기보다 힘들어하는 쪽이며 도대체 어떤 믿음이 우리 바깥의 낯선 세계로 스스로를 내던지게 하는 것인지, 스스로를 이방인의 자리에 주저 없이 가져다 둘 수 있는 용기 그것의 정체에 의문을 가진다고까지 말한다.
또한 저자는 시를 가르치는 학생들의 마음이 궁금할 때는 불쑥 질문을 건네는 대신 학생들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왜 이 물건이 예쁘다고 생각했을지 그 고민을 짐작해 보는 쪽을 택한다. 카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가 테이블 밑의 강아지에게 손부터 뻗을 때에는 왜 만지고 싶으냐고 질문을 건넨다. 직접 만지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완전히 다가갈 수 있을까. 역설적인 말인 것도 같지만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가 있다. 멀어진 거리만큼 촘촘해진 헤아림이 나와 당신 사이를 보다 견고히 잇는다.
‘거리두기’의 미학을 잘 아는 시인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다. 시인은 “좋아하는 것이라곤 이제 거의 사람밖에 남지 않은” 듯 사람을 좋아한다. 대체 삶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내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다며 단언하는 사람보다는 도무지 모르겠다며 오답만 내놓는 사람 쪽을 사랑한다.
사랑스러운 빛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 보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거창하고 쑥스러운지 모르겠으며 평상시 떠들고 다니는 나의 말들이 대개 이렇게 무모하다 느낀다고 고백한다.
뻔뻔해지거나 용감해지는 것 말고는 이 문제를 돌파할 지혜가 없다. 그럼에도 앞선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적어 보려 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뻔뻔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내가 무모함을 무릅쓸 만큼 잊히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