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히스토리 -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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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히스토리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에 최악의 원전사고로 유명한 체르노빌원전 폭발 사고에 대한 역사덕후들이 좋아할만한 논픽션이자 일종의 르포르타주 또는 추적기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이자 체르노빌 원전 사고 생존자라는 점 또한 이 책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실제 사고 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겪은 고난과 혼란을 직접 목격한 증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쓰고 있다.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나가 보니 거리에 많은 아이들이 나와서 놀고 있었다. 모래로 집을 짓거나 진흙더미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있었고, 나이든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젊은 엄마들은 유모차를 끌고 다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였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페트로프의 이웃은 그날 좀 여유를 부리기로 하고 아파트 옥상에서 선탠을 했다. “그는 잠시 술을 마시러 내려와서 오늘 선탠이 아주 잘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며, 피부에서 곧장 타는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페트로프는 “그는 마치 술이라도 한잔 걸친 것처럼 아주 신이 났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페트로프에게 “해변에 갈 필요가 있나요?”라고 하며 같이 옥상에서 선탠을 하자고 부추겼다. 그날 저녁 앰뷸런스가 와서 그 이웃을 싣고 갔다.


연대기 형식의 역사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고 지겨워 질 때 읽으면 딱 좋을 디테일하면서도 남다른 해석이 가미된 역사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단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경위와 피해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 당시 소련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에 대해 현재에까지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였다. 이를 통해 한가지 지엽적인 사건의 배경과 이후에 끼친 영향들에 대한 역사를 풍부하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자는 사고의 근본 원인을 소련의 허술한 관리 체계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오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현재 국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탈원전 논란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힌트를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역사책들을 많이 봤지만 현대사에 있어서 체르노빌 사고는 자세히 알지 못했던 구멍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과정의 허상과 위선, 소련 해체 역사의 큰 맥락에서 체르노빌 사고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열망, 소련 붕괴의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진지한 역사서술에 집중하여 너무 건조한 느낌의 책은 아니었던게 원전 소장 브류하노프, 소방대원들, 사고대책위원회의 레가소프 등의 인물에 대한 드라마적 요소도 가미되어 문득문득 문학적 감수성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여러 재난 블로버스터의 인간적 고뇌와 재난과 벌인 사투와 희생이라는 신파적 요소까지 연상되었다. 


원자로 폭발 순간에 대한 묘사도 숨막힐 정도였는데 일부를 발췌해보자면 


원자로의 노심과 핵반응 영역 아래쪽에는 제어봉이 도달하지 않아 이 영역의 핵분열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200메가와트 수준의 출력은 몇 초 만에 500메가와트로 뛰어올랐고, 그다음에는 정상 수치의 10배인 3만 메가와트로 치솟았다. 흡수되지 않은 중성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몇 분 전만 해도 원자로의 핵분열 속도 증가를 방해했던 제논-135를 연소시켜 버렸다. 이제 핵분열을 늦출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통제실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우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아주 생소한 소리였다. 마치 사람이 신음을 내는 듯 아주 낮은 톤의 울림이었다”라고 라짐 다블렛바예프는 기억했다. … 이때 시각이 새벽1시 23분 44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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