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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평점 :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정말 내가 어떻게 여태까지 박상 작가를 모르고 살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이렇게 재밌고 멋지고 그야말로 힙한 소설을 써온 작가를 말이다. 이 책을 덮자마자 전작들을 전부 찾아 읽어야 겠다는 욕구가 쏟구치기도 했다.

이번 소설은 특히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지적 유희가 넘쳐흐르며 읽는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물론 독자마다의 취향이 있겠지만 대단한 깨달음이나 메시지에 고귀한 문학적 감수성도 좋지만 이런 글을 쓰는 작가도 분명 존재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박상 작가의 작가로서의 삶 자체에 심오한 뭔가를 탐구해보고 싶게 만들었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찮은 예감을 주기도 하는데 스토리는 간략히 김밥집 아들 이원식이 전설의 요리사 조반니가 숨겨놓은 궁극의 레시피를 찾아가는 기상천외한 모험기라고 할 수 있다. 삼탈리아라는 가상의 국가와 시가 주류문화이자 재산이며 시심이 맛있는 요리의 비결이라는 언뜻 들으면 허무맹랑한 B급 정서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B급이 아닌 매우 고차원적인 사유와 풍자가 바탕이 된 소설임을 직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시가 재산인 세상에 외울 수 있는 시 한편 없는 사람은 매우 가난한 사람이라는 매곡에서 기립박수를 치고 싶기도 했다. 주인공은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시집들과 요리 실력을 통해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반니의 레시피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사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에밀리의 선술집에 잠시 기거하면서 시가 보여주는 우주의 사차원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다.
솔직히 웃긴 유머를 읽고 싶다면 웹소설이나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도 넘쳐나는데 그래도 나는 박상의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하고 그런 단순 유머와는 차원이 다른 우월감으로 뻣뻣해지는 어깨에 ‘반대’하고, 재미없고 딱딱한 소설에 대해 ‘반성’하며, 전형적이고 식상한 갈등에 ‘반항’한다는 글은 어떤 이야기인지 꼭 확인해보길 권한다.
감탄사가 연발되는 대목들이 넘쳐나지만 그중에서도 몇군데 발췌해보자면
“시시해. 넌 이 좁아터진 지구의 빤한 말장난만 이해하는 데 만족할 수 있니? 나는 풍성한 우주의 언어를 이해할래. 그곳엔 스케일 큰 유머 감각이 있을 거야.”
“흥, 시는 말장난이 아니야. 시가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면 어쩔래?”
“시끄러. 요리나 제대로 배워.”
“원시크. 뭐가 새롭니? 다 시공간에 한번쯤 있던 건데? 그리고 8코어 16스레드 CPU가 나오면 뭘 해. 바로 다음 버전이 나와 구형이 될 텐데. 게다가 우린 궁금하잖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구가, 태양계가, 우리은하가, 우주가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존재하고 왜 이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지, 그 안에서 인간은 왜 한정적인 시간만 살며,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태어나고 죽는 것 따위나 반복하는지 말이야. 그걸 제 맘대로 정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게 종교라면, 과학이나 시나 프로그레시브 록은 아직 여전히 그걸 파헤쳐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해. K-POP이니 VR-ART 같은 첨단의 대중문화도 좋지. 하지만 청순하고 안이한 주제만 반복하니까 여기선 유행이 안 돼.”
그토록 낡고 빛바래가며 끈덕지게 시공간을 가로질러 온 것이 빈티지인 건 알겠는데 아름다움은 어디서 발견해야 할까. 반복이 아름다운가? 없어지지 않고 오래 존재하는 게 아름다운가? 쌓이고 휘고, 중첩된 시공간의 크기와 풍모가 아름다운가? 이건 인간처럼 유한한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까?
모르겠고, 아름다운 맛이 나는 와인을 간절하게 마시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