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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강한 그림 / 엘도라도 / 2021년 5월
평점 :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요즘 다양한 직업의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들을 즐겁게 읽고 있는데 이번엔 발레리나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었다. 발레리나라고 하면 강수진 같은 화려한 스타가 연상되지만 이 책의 저자 정옥희 작가는 군무 무용수로 활동했고 생계를 위해 오늘도 출근을 하는 평범한 이웃 같아서 더 공감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이야기를 읽다보면 책 제목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그만두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지?라는 대목이 가슴 절절이 내 얘기 같았고 무언가를 전공하고 어떤 일에 종사하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겪어야 했던 경험과 생각, 느낌들을 솔직담백하게 풀어놓는다.
어떤 대목들에서는 발레리나의 좌충우돌 분투기 같기도 했는데 성실한 군무 무용수의 낡은 레오타드, 헐거워진 발레 스타킹, 필연적인 다이어트 잔혹사, 파스와 땀 냄새로 후텁지근한 연습실, 무대 뒤의 기약 없는 대기 시간, 엄마 발레리나에게 주어진 비장한 육아의 풍경들에 대한 다채로운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특히 프로와 아마추어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되기도 했는데 ‘이 공연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는 아마추어다. 프로에겐 이번 공연이 끝이 아니다. 무대에서 크게 실수하여 울면서 집에 걸어갔더라도, 다음 날엔 여느 날과 같은 모습으로 연습실에 들어온다. 계속하여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발레가 쥐고 있는 기득권, 줄 맞추기의 미학으로 완성되는 군무의 언어, 친정어머니 없이도 무대 복귀를 꿈꾸는 발레리나 엄마를 향한 사회의 포용력과 한계, 남성 무용수들의 레오타드를 향한 왜곡된 시선들, 유색인 무용수가 무대에 설 때마다 체감해야 하는 백인 주류의 문화 양상들, 시대에 뒤떨어진 인권 감수성과 예술성을 사이에 둔 양가적 해석 등 발레를 잘 알지 못하는 발알못 독자가 읽기에도 모든게 신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발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볼 수 있는데 발레단이 가장 나태해질 수 있는 작품이 호두까기 인형이라고 한다. 평소의 공연은 몇 달을 연습하고도 기껏해야 일주일 안팎으로 마무리되니 늘 아쉽지만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연말이면 두어 달을 매일같이 공연하는 데다 테크닉적으로 아주 어렵지 않으니 나태함이 스며들기 쉽다. 프로의 정신은 너무 떨거나,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쉽사리 나태해지지 않으면서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어떤 대목에서는 인생 선배의 조언이나 교훈 같은 이야기도 있었는데 자신이 잘하고 싶은 일보다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게 현명한 것일까와 자신의 스펙과 깜냥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최선의 시나리오를 짜고 따르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리고 세상의 잣대론 실패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 보는 건 어리석고 순진한 걸까 등에 대한 고민의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