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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평점 :
비행사 -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참 오랜만에 읽어보는 러시아 소설이다. 정확하게는 러시아 현대소설을 읽어보긴 처음인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고전문학은 자주 접해 봤지만 지금 현재의 러시아 문학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못 가져봤다. 그래서 현대 러시아문학을 맛보는 경험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했고 여느 해외문학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개성이 엿보여서 즐겁게 읽은 소설이다.

소설은 냉동인간이라는 SF적인 소재로 전혀 SF적이지 않은 작가의 존재론적, 철학적 사유가 투영된 인물들의 일기와 생각들의 묶음이다. 1900년에서 1999년까지 딱 100년간의 인노켄티, 페트로비치, 플라토노프 개인의 이야기와 러시아의 모습들이 버무려져 있다.
책의 초반부 작가의 말 중 한 대목에서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빅 히스토리와 스몰 히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하면 흔히 역사라고 하는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공존합니다. 이 두 종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라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마도 스몰히스토리는 냉동인간이었다가 깨어났다는 놀라운 운명의 주인공일 것이고 빅 히스토리는 격동과 혁명의 20세기 러시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부러 이 소설에 대한 아무런 줄거리나 정도 없이 펼쳐들었고 그 방식이 더 즐겁게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초반부 플라토노프가 낯선 병원에서 눈을 뜨며 시작한다. 나는 주인공이 냉동인간에서 깨어난줄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어리둥절하게 시작했다가 읽으면서 상황파악을 하게 되는 재미가 솔솔했다.
플라토노프의 주치의 가이거는 기억상실에 대항하여 스스로 기억해내길 권한다. 그래서 책의 1부는 월화수목금토일 매일의 일기 형식이다. 개인적으로는 기억상실증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시점으로 그의 의식의 흐름을 같이 따라가게 만드는 전개가 흥미로웠다.
어떤 대목에서 주인공은 기억나는게 없으니 생각할것도 없어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그 생각 속을 들어가 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플라토노프는 즐겨 읽었던 무인도에 난파된 로빈슨크루소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의외로 이런 인물의 로맨스도 펼쳐진다. 93세가 된 그 옛날 애인도 만나게 되고 주인공의 일기를 빌려 작가의 사유를 써내려간 대목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역사적 관점은 모두를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건들의 인질로 삼는다. 나는 사실상 정반대로 생각한다. 위대한 사건들은 개개인에게서 발생한다. 충격적인 사건의 경우는 더 그렇다. 만약 한 사람의 추악한 면이 다른 사람들의 추악한 면과 함께 공명을 일으키면 혁명, 전쟁,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2부부터는 또 다른 형식의 글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또 다른 형식과 스토리에 대한 일종의 기막힌 반전도 맛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