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02 - 멋진 신세계, 2021.1.2.3
문지혁 외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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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창간해서 이번에 두번째 호가 발간된 신생 계간 문예지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사회, 릿터 등의 여러 문예지를 정기구독하고 있는데 에픽은 기존의 문예지와는 다른 아주 신선한 느낌이 있었다. 


우선 읽기 어려웠던 심각한 비평이나 시가 없고 소위 등단한 작가 위주가 아닌 다양한 분야 저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 픽션 뿐만 아니라 논픽션도 실려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남궁인 작가와 무려 황정은 작가의 단편도 읽을 수 있다. 


이번 에픽 #02의 제호는 ‘멋진 신세계’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와 관련된 역설의 디스토피아에 관한 글을 맨 먼저 읽을 수 있고 예술제본공방 ‘렉또베르쏘’의 대표 조효은의 책의 물성에 대한 이야기도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던 글은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이 기록한 여성 노숙인의 이야기였다. 한사람이 임금노동을 하는 것은 경제 사회적 독립의 추구이지만 여차하면 돈의 노예가 되는 삶에 빠져버리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돈의 노예를 또 만들며 자본주의의 지속과 강화에 기여하는 노예를 만드는 삶을 대물림하여 도돌이한다. 그들에 비해 기업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고 노예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은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공동선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러 사회담론들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글도 있지만 한편으론 재밌고 유쾌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도 많다. 소설가 정명섭은 밀리터리 덕후에 대한 흥미로운 에세이를 썼고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과 스페인 하숙, 여름방학 등의 작가인 김대주의 에세이도 재밌었으면 가장 흥미로웠던 건 김홍 작가의 단편소설 이인제의 나라였다. 실제 불사조라는 별명을 가진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치인 이인제를 이렇게까지 희화화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재밌게 풀어낸다. 


내 주변의 이인제들을 하나로 묶어준 건 우리 집 앞 ‘최강헤어’의 이인제 사장님이었다. 그는 다운 펌을 하러 간 내가 주책없이 쏟아낸 「이인제의 나라」의 구상을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인제의 나라」의 기획이 가진 핵심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 이는 그가 어느 대통령 선거에서 박찬종을 뽑기도 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궁인은 실제 응급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에세이에 담아낸다. 


우리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일정치 않다. 여유가 생기면 빠르게 밥을 먹어야 한다. 나는 응급실 의사가 되고 15분 넘게 밥을 먹어본 일이 없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의료진은 밥을 먹으러 떠나면 15분 내로 돌아온다. 급하게 식당에서 돌아오자 절박하게 우는 한 살 아이가 있었다. 피치 높은 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엄마가 아이를 돌보다 떨어뜨려서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아이를 재운 뒤 CT를 찍어야 했는데, 엄마가 재우는 일에 대해 상의한다며 계속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동안 아이는 줄기차게 자지러지듯이 울었다.


황정은 작가의 팬들도 이 책을 반갑게 집어들 것 같다. 기담이라는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이 집으로 이사하려고 선인과 강희는 25년 기한으로 대출을 받았다. 구매한 무렵에 이미 15년 된 건물이었다. 만기가 도래하는 25년 뒤엔 40년짜리 건물이 되는 셈이었다. 대출 서류에 자기 몫의 사인을 하면서, 사람보다도 집이 버틸까를 잠깐 걱정했던 일을 선인은 떠올렸다. 25년 뒤에도 나는 있을 것이다, 25년 뒤에도 강희는 있을 것이다. 선인은 대강 그렇게 믿었지만 그 집의 25년 뒤란 어쩐지 공상 같았다. 있을까, 하고 그때 약간은 농담처럼 생각한 것을 선인은 생각했다. 25년 뒤에도 이 집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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