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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 김이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이 작품은 특히 주인공이 시를 필사하면서 실제 최근에 발표된 유계영, 이제니, 이선영, 박소란 시인의 시 문장들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올해 초에 윤이형 작가의 <붕대 감기>를 아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작가정신에서 나오는 소설 향 시리즈였다는걸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맘에 쏙 드는 질감과 디자인으로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중편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기획인데 이번엔 김이설 작가의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여성시대 라디오 사연의 실제 이야기 같아서 몰입하게 된다. 이 시대 딸들이 공감할테고 글 쓰는 사람들이 공감할테고 필사하는 사람, 시를 읽는 사람, 폭력과 억압에 고통 받는 사람, 집안일과 육아에 애쓰는 사람, 실업자, 이혼한 사람, 조카보는 이모들까지 이 소설에 동감하며 몰입할 수 밖에 없는 독자들이 참 많을 것 같다.
집안일에 현타(회의감) 온 대목에서 멈칫했다.
내가 동동거리면 노력하고 애쓰는 일들의 결과가 너무 미미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허무해지곤 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게 잘 참아지질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서점 로맨스가 인상적이었는데 불편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전개 속에서 아름다운 로맨스가 중화시켜주는 듯 했고 그래서 즐겁고 설레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되었다.
사랑과 연애를 하면서도 불안한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한 대목에서도 감탄했다. 그럴리가 없다는 생각, 내가 이렇게 좋은 걸 누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 나는 행운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인생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내 삶은 그렇게 예정된 것 같다는 생각…


이건 완전 내 얘긴가 싶은 대목 :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공부를 할 때, 결혼을 할 때, 아이를 낳고,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것 모두가 그 시기에 걸맞은 때에 행하는 것이 보편의 삶인데 내가 보편의 삶을 살지 못해서 나에게는 늦거나 이른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적인 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것조차 너무 늦어버려서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자꾸 어쩌지 못했다.
로맨스의 절정 대목 : 전화를 끊고 한달음에 달려온 그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꽉 껴안았다. 나는 온전히 그 사람에게 기대며 쓰러졌다. 아무 말 없이 두 팔로 나를 안아든 그 사람의 체온이 따뜻했다. 그제야 그 사람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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