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 롤랑은 세상에 없다. 시집(『롤랑을 기억하는 계절』) 속에만 살아 숨쉰다. 롤랑이 없는 계절을 마홍은 몇 해나 보낸 걸까. 롤랑의 짝 발터는 롤랑의 부리가 깨지고 더는 곁으로 가지 않았지만 그녀가 죽자 자신의 몸 앞쪽 깃털을 뽑아내는 일로 애도를 대신했다. 그 후로 발터의 깃털은 자라다 말다를 반복 중이다, 라고 시 「발터」는 전한다. 누군가 죽으면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앞날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세상사이다.(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걷는나무, 2018, 16쪽) 그처럼 사람들이 미래에 집착할 때 대신 마홍은 ‘한 죽음’(롤랑)을 불러들인다.(「호명」) 나는 『롤랑을 기억하는 계절』이 그렇게 쓰였다고 생각한다.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어떤 불가능성을 진술하고 있는데 표제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가 그 한 예다. 어떤 불가능성인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화자가 기억에 갇혀, 그는 왜 기억에 갇혀 있는가, 은유에 불과한 눈앞 살구색을 애써 산호색이라고 강변할 때 독자들은 과거(산호색)가 고정불변임을 이미 알아버렸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근일의 시에서 실재는 과거 처리되고 떠난 사랑에 대한 은유로 현재가 호명되는데 둘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때 화자는 눈앞 현재를 실재로 착각한다. “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그건 착각이어라」) 화자는 자신이 본 것을 믿는다. 어쩌면 “산호 무덤 위를 선회하는” “길 잃은 새 몇 마리”(「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가 그(화자)일 수도 있겠다. 이근일의 시는 “높고 낮은 파도에 이러저리 휘둘리”(「섬」)며 그 자장 안에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