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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평전 ㅣ 보리 인문학 1
한명기 지음 / 보리 / 2019년 11월
평점 :
학창시절 배웠던 병자호란때 주화파로 활약했던 최명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한 계기가 몇년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았던 이병헌씨의 놀라운 연기력을 보면서 역사적 평가는 과연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기회가 되어 그의 평전을 읽어보게 될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대사상에 의해 지탄받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현실을 직시한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로 인해 조선왕실과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피해를 덜 입게 된것은 아닐런지
최명길이 태어날때(1586년)의 조선과 명의 상황에 이은 일본의 정세까지, 우리나라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고 이해할수 없는 동아시아 정세를 이해하면 국제관계와 그로 인한 상황까지 파악할수 있다고 할수 있겠죠
어렸을때부터 병약했다는 최명길 그로 인해 병자호란 전 제 역활을 할수 없었다는 점은 조선으로서의 참으로 아쉬운 점이 아닌가 싶으며 최명길에 인생에 지대한 정치적행로을 끼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항복과 왕명학을 극찬했던 스승 신흠에게 수학(受學)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관과 인생관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되네요.
국방, 군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최기남의 영향과 후금과 명과의 관계의 변화를 알려준 장인 장만
짧았던 광해군 시절의 벼슬살이가 오히려 그에게는 운이 좋았다고 할수 있는것이 영창대군의 시해와 인목대비의 '폐모 논의'에 연류되지 않았음이 이후 반정 성공후 그의 도덕적 결함으로 이어지지 않을수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나 싶네요.
인조 반정 성공 이후 1등 공신으로 제수되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해군과 동서지간이자 군사전문가인 박엽을 구명하고자 했다고 사실은 후일 일어날 일에 대한 선견지
- (先見之明)이 아니었나 싶은데 결국 박엽이 처형되어 우리에게는 크나큰 손실이 되었는 점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만약 박엽이 살아 후금군을 상대하였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학창시절 배웠던 병자호란때 주화파로 활약했던 최명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한 계기가 몇년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았던 이병헌씨의 놀라운 연기력을 보면서 역사적 평가는 과연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기회가 되어 그의 평전을 읽어보게 될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대사상에 의해 지탄받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현실을 직시한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로 인해 조선왕실과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피해를 덜 입게 된것은 아닐런지
최명길이 태어날때(1586년)의 조선과 명의 상황에 이은 일본의 정세까지, 우리나라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고 이해할수 없는 동아시아 정세를 이해하면 국제관계와 그로 인한 상황까지 파악할수 있다고 할수 있겠죠
어렸을때부터 병약했다는 최명길 그로 인해 병자호란 전 제 역활을 할수 없었다는 점은 조선으로서의 참으로 아쉬운 점이 아닌가 싶으며 최명길에 인생에 지대한 정치적행로을 끼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이항복과 왕명학을 극찬했던 스승 신흠에게 수학(受學)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관과 인생관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되네요.
국방, 군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 최기남의 영향과 후금과 명과의 관계의 변화를 알려준 장인 장만
짧았던 광해군 시절의 벼슬살이가 오히려 그에게는 운이 좋았다고 할수 있는것이 영창대군의 시해와 인목대비의 '폐모 논의'에 연류되지 않았음이 이후 반정 성공후 그의 도덕적 결함으로 이어지지 않을수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나 싶네요.
인조 반정 성공 이후 1등 공신으로 제수되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해군과 동서지간이자 군사전문가인 박엽을 구명하고자 했다고 사실은 후일 일어날 일에 대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니었나 싶은데 결국 박엽이 처형되어 우리에게는 크나큰 손실이 되었는 점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만약 박엽이 살아 후금군을 상대하였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괄의 반란을 예측하기라도 한것인지 변방 야전군으로 가는것을 반대하나 결국 이괄은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점령하고 인조는 남쪽으로 파천하게 되면서 사태는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전개되는데
반란은 진압되나 강화된 기찰(사찰)

정치개혁과 사회 경제 개혁을 주도한 최명길 그러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조의 결단 부족 그리고 기득권층의 반발등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데 새로운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면서 국가의 재건에 이바지 하고자 했던 그로서는 과연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자신의 정책이 시행되지도 못하거나 시행되다가 흐지부지 되었을때의 심정을
이어지는 1627년 발발한 정묘호란의 전말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과 후금의 칸이 된 홍타이지의 계산된 계획이었다고하니 학창시절 배운 기억이 없는 새로운 역사를 인식하게 된 계기도 되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과정을 세세히 알려주어 우리역사에세 치욕으로 기록된 한 페이지를 자세히 살펴볼수 있기도 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는 현실주의자였더라면 우리 역사는 바뀔 수 있지 않았을까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자진하여 적진으로 달려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 갈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렸갔다고 하니 진정한 충신이 아닌가 싶은데 남한산성에 고립된 상황에서도 지루한 논쟁만 이어지게 된다고 하니 국가의 존망과 왕실의 안위뿐만 아니라 대신 자신들의 생사조차 한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척화파와 사간원 관원들의 호기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지?
상황은 악화만 되고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된 인조
병자호란 직후 영의정까지 승진한 최명길은 조정의 화합과 국가재건에 몰두하게 되는데 과연 성공할수 있을런지

언제 목숨이 위급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청과의 난제등에 동분서주한 최명길은 일본문제에세도 주도적인 역활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피로인(전쟁 중에 붙잡힌 민간인들)들의 속환에 힘을 쓰기도 하였으며 독보를 통한 명과의 접촉을 알게 된 청나라의 용골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나 인조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은 그가 보위에 올린 왕에 대한 충심이라 할수 있겠죠
사후 그의 평가로 끝을 맺고 있는데 여태까지 잘 알고 있지 못했던 병자호란 전후 눈부신 활약을 했던 최명길에 대해 많은 사실들과 진실들을 알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가 아니었나 싶네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반복되는 역사속에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을 겪지 않을려는 자구책을 늘 염두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