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이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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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닐 수 있겠구나, 소설인 척 하는 한 인물의 르포 내지 자서전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해두고 읽게 만들었다.

우범지대에 사는 모범생, 상식과 교양이 없는 명문대생, 성적이 뛰어나지 않은 장학생, 스펙에 뒤떨어지는 대기업 사원, 좋은 사람을 만나는 운과 현명한 선택으로 투자에 성공까지 거머 쥔 사람. 아르바이트, 과외 교사, 은행 직원의 다양한 직군을 거치는 동안 만나게되는 인물들과 그들을 통해 얻게되는 성찰. 누구는 손절의 아이콘이라 했다. 재이를 두고 가난하게 컸어?의 밈의 주인공이라 봐야 할지, 진흙밭을 제발로 걸어 나온 유일한 사람이라고 봐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재이의 이야길 듣다보면 과거의 나일지, 지금의 너일지는 자기안의 물음을 반복해본다. 비춰지는 순간마다 뜨끔거리게 하는 재이에게 나는 뭘 기대하고, 뭘 바라는 것인가. 소설인지 나를 염탐하는 이가 써낸 르포인지 결국 끝까지 의심을 해 가며 읽게 만든다. 이건 소설 인 척 하는 누군가의 자서전이자 누군가를 긴 호흡으로 추척하며 써내려간 짠한 삶의 일대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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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런건가 싶어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테고, 원래 그런게 아닐수 있구나를 깨우치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가 재이의 형제들 내지 달동네 아이들이었다면 후자가 재이였다. 바뀐 환경, 달라진 반친구, 다르게 대해주는 어른들을 통해 또 다른 상냥하고 다정한 관계가 있음을 배웠다. 알려주지 않아 몰랐던 아이의 시야였다. 도움을 받았고, 고마워 할 줄 알았고, 욕설이 없는 상냥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누군가를 돕는 것에 행복을 느낄수 있고,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감사히 빌려쓰고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은 축하 받을 만한 일이며, 챙기고 아끼는 것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점. 달라지는 환경과 변화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터득하며 자신의 위치를 옮겼기에 가능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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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서 가족들과의 갈등이 빚어질 때 빠지지 않는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 읽다보면 쌍둥이는 재이의 또 다른 자아 처럼 여겨졌다. 삶은 매번 갈림길 앞에 있었으며 A와 B중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는데 안주할 때마다 머무는 선택은 쌍둥이의 몫이고, 변화되는 세상을 택하는 방향은 재이의 몫으로 분류가 되었다. 그렇게 차츰차츰 간극이 벌어지다 성인이 된 후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축하 받는 결혼과 대우받는 배우자. 기대하지 않는 결혼과 분수에 맞지 않는다 여기며 배우자가 될 사람의 직업에 대한 의구심까지 품는 대화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 재이에게는 제 살길 찾아간다고 험한 말 했던 과거는 잊은 채 한 집에서 얽혀 살던 쌍둥이에게는 하대하는 사이. 때로는 천륜이라는 것도 놓아야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스스로 가족애(愛)의 빈곤함을 고른 것이다.


평범의 오류. 다들 그렇게 살지 않냐는 듯한 일반화의 범주 밖. 재이는 그런 기본의 부류 밖의 가정이었다. 집과 부모와 형제가 같이 산다고 하여 모두가 다복한 가정이 아니듯, 정규 교육과정을 다 밟아온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들 다른 속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을 이야기 하는 사람 앞에서 평범 이하의 세상을 살아왔다는 확신이 들 때엔 체념을 하게된다. 이들과 나는 다른 부류구나. 섞일 수 없는 삶이구나. 그러니 동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개의 생각과 갈려지는 삶의 목표를 기대하는게 덜 슬프겠다는 답을 찾은 듯 했다. 이제사 살아온 삶의 일대기를 뜯어 고칠 수 없으니 체념이 빠른 답이고 덜 지치는 방향이었다.


확실히 달랐다. 부모를 멀리하는 재이와는 달리 아버지와 함께 분식을 먹으러 올 수 있고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조건. 서열이 아니라 조화를 택한 부녀의 관계성. 돕고자하는 어른의 배려. 그걸 보고 자란 재희의 반듯함. 순하고 선하다는 말의 표본화. 아마 나였어도 재이의 입장이라면 재희가 그립고 부럽지만 곁에 둘 친구로 남기진 않을 듯 하다. 나도 모르게 악의가 싹터 재희를 친구의 시선보다 삶의 이용 수단으로 써 먹으려 눈에 힘을 주게 될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상대의 선함이 자칫 나의 악의로 물들까봐 미리 차단하는 마음을 재희는 영영 모르겠지.


나에게 부모가 없었다면, 언니가 없었다면,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된 언니들이 없었다면, 대학 동기 언니오빠가 없었다면, 첫 직장에서의 사수가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때마다 조언을 구할 존재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떠한 것을 배워갔을까. 참을성, 책임감, 인내심, 배려, 양보, 상냥함, 기다림, 협동. 전부 비슷비슷하게 보일 지라도 각각의 상황에서 어떠한 감정과 행동을 꺼내 사용해야 할 지를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 허둥대지 않고 유연하게 사람들 속에 섞여 유순하게 흘러들어갈지에 대한 타이밍 싸움. 매 순간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교육을 통한 사회화가 잘 된 아바타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바타여서 슬픈게 아니라 아바타여서 다행이었다. 입력값에 맞춰 출력값이 옳게 도출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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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가족, 변할 마음 조차 없는 관계. 내가 옳다고 바꾸려해서는 안되는 그들의 개념이었다. 그들의 세상에는 그게 맞는 선택지였다. 개선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진즉 다른 방향으로 시야를 틀었을 것이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변할 사람이었음 애초에 바뀌었어야 했다. 변할 마음이 없었고, 달라질 이유를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서로가 답답해하며 자신이 이롭다 여기던 방향으로 바꿀 수 없었다. 차라리 놓아버리는 것, 그게 마음이 편하다는 걸 나이가 들며 달라지는 인간 무리의 다양성에 발 담궈가며 얻은 태도이기도 했다.


나쁜 뜻은 없었다는 것, 심지어 좋은 마음으로 그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지금에서야 두 경우를 다 겪고나니 느끼는 사람의 태도였다. 악의 없는 솔직함과 자기 자리와 상대방의 자리에 대한 이해를 하며 비춰내는 솔직함. 상처를 받는 것은 매번 재이의 입장인데 지금껏 혈육에게 받아온 상처와는 별개의 마음의 생채기가 있다. 당시에는 날을 세우진 않았지만 홀로 받는 마음의 상흔. 서로가 몰라서였고, 서로가 겪지 못했던 삶이라 그런것임을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은조 언니와 재희, 고대표에게 마음이 더 가는 이유는 가르쳐주는 마음에 높낮이가 없었고, 때로는 한 발짝 멀리 뒷걸음을 유지한 채 반듯하게 봐주려 애쓰는 시선이 있었다고 느낀다.

모두가 내 맘 같진 않다. 아마 그건 어렸던 재이나 어른의 재이나 똑 같이 느낄 것이다. 다만, 얼마나 덜 상처받고 덜 바라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이젠 알 것이다. 상대의 마음에 대한 방어기제를 적용 할 줄 안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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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하게 알려주는 가족이 있고, 차근차근 일러주는 어른. 보고 따라하고픈 마음이 드는 또래와 닮고 싶다 여겨지는 형제가 있다는 것. 그게 인복이었고, 바른 가정이었고, 옳은 관계성임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당연하다 생각하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어린 재이를 통해 알았고, 어렸던 나를 떠올리며 나 또한 재이였던 적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오로지 주변 환경 탓 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었는지, 어떻게 따라 하려 했던지를 생각하며 모난 시절임에도 그럴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다시 해보자고 하던 수많은 손길의 쓰다듬음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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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되고 싶어 ㅣ 위픽
김화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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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고 많은 사물 중에 왜 하필 개구리인지 궁금했다. 기대하지 않기와 실망하지 않기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들도 더해보며 인간관계와 연약한 유대감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이야기속 주인공은 우물안 개구리로 살다가 팔짝 뛰어 오르고 싶었으리라 추측하며 수경, 가은, 완의 대화들을 들어본다. 기대와 실망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사람들에게 치였던 나의 과거를 들춰보며 무감해진 가은과 지금의 나를 나란히 두며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접어 들 수록 나와 가은의 문제인지. 다들 한 곳을 10년 가까이 다니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가은의 행동을 따라가본다.

익숙해진 세상. 어찌어찌 하다보니 살아온 날들의 3분의 1의 시간동안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장소. 익숙함에서 오는 무료함인지 평안함에서 오는 도파민 부족인지. 고여있는 우물탓인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며 아등바등하는 것이 므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 그게 책 속의 가은이었고, 책 바깥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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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이든 완이든 결국 직장에서 뻗어가는 인간 관계에서 얻어진 인맥이었다. 이 곳이 없었다면 교차되는 지점도 없었을테니 아예 모르고 살 인연이라는 것이다. 고로 회사라는 소속감을 벗어난다면 금새 끊기고 마는 고리. 직장 동료 완, 완의 친구인 수경. 회사가 만들어준 일정한 조건을 갖춘 어른들.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유난히 반짝이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 그래서 나도 옆에 있으면 빛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들로 통해 얻어지는 나의 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수경을 성향을 동경하고 완의 바뀐 태도에 아쉬움이 큰 것이겠지. 가은은 마주하고 있는 그들에게 오는 에너지를 얻고 싶어보였다. 같이 있으면 닮아질까 하는 기대감이 "나는 상대를 나의 거울로 봤다."는 말로 옮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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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지만 온화해보이고, 평온한 표정에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개구리. 저렇게 앉아있더라도 개구리는 펄쩍 뛸 수 있는 걸 모두가 아니까, 가은은 그걸 바라는 것으로 보였다. 톡톡 건드려 이제 뛰어 보지 않겠냐고 외부의 자극을 주는 것은 가은의 승진 통보일 것이고, 개구리 스스로가 몸을 움직이는 것은 바뀐 직급과 상황으로 인해 이제 직접 움직이고 다른 액션을 취해야하는 가은의 새로운 직무 수행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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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는 결국 수경이었다. 우물은 고여있던 자신의 마음일텐데 이 우물의 권태와 우울은 뛰어 오른다고 사라질까? 여전히 고여있고 머물러 있을텐데 날뛰느라 바빠서 시야에 들어오지 않다 하여도 그 감정과 공간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가끔 내 우물에 놀러 와."라는 문장은 결국 고여진 우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감정과 시간의 주기에 따라 더 도드라지거나 더 얕게 보이는 것으로 간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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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가은을 심해에서 꺼내주었던 완도, 지금의 가은을 환기시켜주는 수경도 한 시절이었다. 서로의 우물에 들러 여기가 안전한지 손잡아 끌고 나와야할지 살펴주는 존재. 가정방문하며 우리 애 잘 살고 있는지 기웃거리며 살펴주는 수고로운 눈짓과 행동. 권태로운건 알지만 몸이 반응하는 관계속의 츤데레 기질이겠지.


📖좋은 점은 이제 더 이상 회사에서 이유 없이 긴장하거나 오들오들 떨지 않는 다는 것. 나쁜 점은 무엇에도 설레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좋은 점은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내게도 만족스러울 일이 거의 없다는 것. 좋은 점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복달하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져서 벅찰 일도 없다는 것. 좋은 점은 예전만큼 근무 시간 내 심경이 일분일초 일희일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업무에 사람에 빈정 상하는 일은 있어서 올라가는 일은 없어도 아래로는 내려간다는 것.

비단 9년차의 수경만 그러할까? 13년차의 나도 똑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감정이라는 것을 염두해두고 직장인 나부랭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잊지말자, 권태는 나의 친구이며 한 달에 한 번 급여 입금받는 날에만 기척없이 사라져 잠깐의 행복을 맛보도록 해 줄테니, 이 관계는 기저에 깔고 둬야하는 마음으로 살아내야 함을 매 순간 새기면 덜 서러울 것으로 보여진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옆자리 동료도 내 뒷통수를 보고 앉아있는 상사또한 똑같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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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심 ㅣ 위픽
전건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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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심', 그리고 '네가 평안해졌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이 두 제목을 놓고 보면 므슨 소리인가 싶다. 미워하는 마음과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 이게 한 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가?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평안을 바라며 상대를 이해하고 마음을 곱게 먹으라는 건가 싶은 물음표 가득한 표지.

그래서 처음보는 저자의 이름이지만 읽고싶어졌다. 이 얇팍한 책에서 어떠한 마음을 드러내고 어떠한 마음을 먹게 할런지. 그리고 나는 책 속 인물들을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있는 깜냥을 지닌 사람일지에 대한 여러가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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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러하 다. 숨 쉬는 것 만으로도 지치는 여름밤. 나이도 어린 직장 상사가 승진길까지 막았다길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밤. 애인에게 직장상사 험담을 하며 한탄과 짜증을 토로할 때 애인 K는 느닷없는 무서운 이야기를 꺼낸다. 실없는 소리 한 적 없는 그가 꺼내는 이야기. 몇 해 전 노숙자 쉼터에서 알바하며 알게된 최씨와의 일화. 도움을 받은 그는 K에게 보답을 하고싶다며 딱 한 사람만 죽여줄 수 있다며 섬뜩하지만 솔깃한 제안을 한다. 마침 그 즈음 K를 힘들게 하던 지도교수가 떠올랐기에 고민 끝에 교수의 이름과 생시, 그리고 K의 손톱을 건낸 후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일화를 늘어놓는다. 대신 상대가 죽으면 그걸 사주한 사람에게 중요한 무언가도 같이 잃게 됨을 알렸는데, 그럼에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걸 사주하게 된 이후의 삶. 농담이라 하기엔 너무 또렷하고, SNS에 떠도는 괴담이라 하기엔 너무 흔해빠진 것 같은 K의 말들. 무고를 바라고 이후의 삶까지 말했고, 이제 K는 연인에게 제안한다. 너도 이름을 적을래?


📖앙심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한 일에서 싹트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리고 그렇게 한번 싹을 틔운 원한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 내면을 잠식해나간다는 걸, 너도 알 거야. 그러니 됐어. 그 앙심을 채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미워하는 마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을까? 미움의 깊이와 정도만 다를 뿐이지 싫어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감정을 적립해가는 인간들이 몇몇 있을 것이다. 미워 죽겠다 싶고, 너죽고 나죽자 싶은 분노에 찬 적도 있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싶은 한탄과 포기의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살기를 띄며 어찌 저런게 사람이다 싶을 때도 있는데 결국 우리는 그러다 제 풀에 지쳐 이러한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사람이 밉다고 모두가 찔러 죽이는 일도 없고, 흠씬 두들겨 패며 앙갚음 하는 사건사고는 그리 흔하지 않다는 걸 봐도 우리는 제법 화를 잘 누르는 누름돌을 지니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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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도 이러한 일이 있었던게 20대 초반이지 않던가. 지금의 나로서는 K의 제안에 주저함보다는 되려 종이를 다시 밀어주며 딱히 쓸데가 없다고 말하게 될 듯 하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다. 나이가 들면 미워하는 마음에게까지 쓸 에너지가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저런것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데 내가 왜 고민하나 싶어하며 흐린눈으로 눈엣가시의 인간을 못본척 하게된다. 그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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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도 혈기 왕성하던 시절이라면 K의 말에 솔깃해서 건네받은 종이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리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지 싶다. 타인을 향한 살기가 간절한 마음으로 타인을 뚫어버리고, 남겨진 살기가 나를 치고 간다 한들 일단 뵈는게 있을까? 미워하는 이가 눈물 흘리는 꼴을 보는 쾌감이 더 크게 느껴 질 터이니 K와 같은 수순을 밟을 수도 있겠다. 이른바 너 죽고 나 죽자 모드의 전투 상태라는 거겠지. 등가교환에 대한 성찰이든 미워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해하는 심상 중 하나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당신은 그 마음을 여전히 품고 살런지, 아니면 저런 놈은 그냥 저리 살다 죽게 냅둬야지 라는 느슨한 방임의 마음으로 살 것인지는 각자의 연령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 질 것으로 보인다.

죽이고 싶은 마음을 유지하며 분노를 안고 산다면 매 순간이 지옥일 것이고, 최씨가 했던 것 처럼 K가 건넨 종이에 이름을 써서 준다면 죽였다는 마음에 불안을 안고 사는 것 또한 매 순간 지옥에 사는 것은 동일하다고 보여진다. 이왕 지옥방에 떨어진거 저 자를 없애는게 맞을까, 나를 태워내며 소멸하는게 나을까. 이도 저도 아닌 지금 나처럼 지랄 발광을 하든 미쳐 날뛰든 등 돌리며 안보면 그만이다 싶은 상태로 외면하는 삶을 살 것인지. 그건 뭐 당신들 선택에 달렸겠지. 일단 K가 준 종이는 받고서 생각해보자. 건네받은 종이가 있다는 것, 그걸 쥐고 있는 것 만으로도 뭔가 죽이고픈 놈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건 확실하니 덜 서럽고 덜 짜증 날 수는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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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절벽의 신자들
조예은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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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를 통해 출간 전에 초입부분을 먼저 맛보았던 올초. 그 때엔 언제 출간 될 지도 몰라 다음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를 오매불망 기다리게 했던 날들. 완결이 되고 지류로 출간되었으니 무조건 내 손에 쥐어보겠노라 다짐했던 그 마음을 실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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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서재 사전연재 압도적 1위와 함께 에피소드 조회수 8만 6천건의 기록. 2026 서울국제도서전 화제작의 그 마침표의 결과물이다.

1부의 제언을 보았던 그 기억을 떠올려가며 다시 읽게 만드는 초반. 그리고 더 깊어지며 이게 진짜인지 허상인지를 몇번이고 의심하게 했던 환영과 오연을 거쳐 현실로 받아들이는 8월. 그리고 그들로 이어지기까지의 총 5부작과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문장.

현실과 허상의 경계를 이어주는 조예은만의 문장으로 보게되는 녹색 절벽, 그리고 그것을 믿고있는 이들을 마주하기까지. 내가 멸종 할 것인지, 네가 소멸될 것인지는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8월 8일을 기점으로 결판이 나겠지. 그러고나면 누구의 말이 맞고, 누구의 말이 허구인지 결정지어지는 것임을 기대하며 진실과 허상, 바람과 현실. 그 중 남게될 하나만을 기대하며 오연과 제언의 시선을 따라가본다. 보고싶은 것과 보게될 것의 갭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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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냥 살아가는거지. 무뎌지기를 바라면서, 무뎌진 채로. 그걸 못 견뎌서 망상으로 도망치는 거야, 당신도 그렇지?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잖아.

뭐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 그게 믿음이고 선을 넘어버리면 망상으로 이어지더라는 걸 알려줬다. 내가 하고팠던 말, 그리고 내가 이들을 붙들고 정신차리라고 날이 선 단어들로 물러터진 이들을 긁어내려던 그 말이 여기 담겨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 여전히 무서운 기분이 들어.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으나 스치던 순간의 어떠한 단상의 조각들이 기운을 붙들여 놓아 계속 그 감정에 머물게 하는 것. 보았던 또렷함보다는 그 순간의 감정에 더 동요되는 것. 명확하게 보았다는 것보다는 뭔지 모를 그 기운과 자기안에 남아있는 단편적 장면에 집착하게되고 자신이 믿고싶어했던 방향으로 현실을 짜맞추고 있음을 이 문장 속에서 느끼게 했다. 결국 너는 확실하게 본 것이 아닌 머릿속에 그려낸 것에 더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랬으니 이러한 세상을 꾸렸겠지. 그게 지금은 꿈이라 다행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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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 뿐일까. 대중이 이해하는 현실보다 스스로가 믿고자 하는 방향이 곧 진실이라 여기는 과정. 이들은 믿음의 우선 순위가 이야기 밖에 있는 나와는 조금 다른 범주의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눈 앞의 세상을 의심하며 시작되는 첫 문장을 통해 미리 독자에게 언질을 해 두었던 것 이다. 제 엄마와 아빠를 못 알아보는 오연을 통해 얘는 자신도 믿지 못하는 아이임을 미리 알렸다. 목도하는 것보다 제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을 믿고, 현재보다는 과거를 믿으며, 나중에는 환영이라는 자가 꾸린 세상을 믿으며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 불신의 잣대가 일반적인 경로를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이들이 본 것 처럼 어그러져있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신이 틀렸었음을 시간이 흘러 온 몸으로 느끼지만 받아들이는 것 마저도 시원하지 않다. 대중이 그렇다 하니 불편한 믿음으로 그걸 받아들인 척 한다. 그 끝엔 자신과 보여진 세상의 문을 닫아버린다. 보고픈 세상만 보고싶은데 다들 그게 아니라하니 단절을 택한 것으로 해석하게 했다.

녹색 절벽이 환영이 꾸린 집단과 대중을 구분하는 벽이라는 것인데 이게 누군가에겐 보이고 누군가에겐 보여지지 않는 환시라고 봐야 할지 관점을 바꾸어 보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의심할 거리가 없던 것에 의심을 가둔다. 다수가 그렇다 하니 나 또한 그게 맞다 여기는 것. 의심을 하지 않았다. 헌데 환영은 그 믿음에 딴지를 건다. 그래서 거기에 관심이 쏠리고 또 그 가설에 동조하게 된다. 그들이 환영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던 이유와 환영의 목소리에 힘을 싣어 줬던 것. 환영만의 잘못일까, 환영만을 믿은 그들이 잘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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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라 믿으며 읽어왔는데 어느 시점부턴 현실을 반영했고, 허상인데 어딘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집단과 그들이 꾸린 세계가 존재 할 듯한 묘한 기운.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예은의 세상이 무서워진다. 내가 모르고 살던 세상을 슬쩍슬쩍 보이며 '거짓일거 같지? 근데 여기 그런 세상도 존재하는데? 너만 모르고 있었을껄?' 하며 조소띈 입꼬리로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머리가 복잡하다. 난 또 조예은의 문장에 홀린 거겠지.

(여담, 그래서 나는 미트볼이 딱 3알만 올라간 스파게티를 무서워 하게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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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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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클립도 보지 않고 냉큼 주문했고, 내가 생각했던 에세이와는 조금 달라 당황하기도했다. 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은 이번 산문집. 그간 출간된 작품들보다 더욱 더디게 읽혀졌던 에세이. 익숙한 일상이야기와 함께 문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글을 적어야하는 순간들. 과거 축사나 다른 간행물에 기고했던 문장을 옮겨두었다. 총 3부작으로 나누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들을 모아두었는데 수상소감이나 인연이 닿아있던 곳에 축사를 옮겨둔 것 보다 '1부 사람의 얼굴'로 모아둔 글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공감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삶도, 축사를 하는 일도 없어 2부와 3부로 얻는 공감은 확실히 적었다.

하나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딸이자 노부모의 보호자, 자신의 일을 하고있는 사회인,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챙겨야하는 세대주로서 다방면으로 살펴야하고 계속 주시해야하는 역할이 많은 사람의 순간들이 기록되어있다. 결국 저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이야기꾼으로 불려지기 전에 나를 키워준 가정을 살피고 내가 꾸려둔 가정을 돌봐야하는 1인 다역의 사람이 느끼는 고단함이 더욱 진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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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창작자로서 인공지능 챗봇 챗지피티의 활용과 인간으로서 모든걸 수용 할 것인가에 대한 단상은 나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선 문인으로서의 소견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게 여겨졌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을 겪어낸 세대이자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긴 애도의 과정을 거쳐 여전히 각자의 마음속에 그들을 묻어둔 사람으로서의 심상까지. 같은 현상을 마주함에 있어 내가 느끼고 받아 삼켰던 것과 살피고 이해하려 애쓰는 저자의 생각을 얻어가는 과정.

저자의 소설만큼 저자의 에세이는 단순히 글을 읽어삼키는 것을 넘어 곱씹어보고 이따금씩 꺼내어 나도 그리 써먹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다만, 후반부의 축사보다 저자의 사사로웠던 일상이 더 특별하게 읽혔던 것 뿐임을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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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보는 인간다움의 형태가 바뀌는 겁니다. 죄책감. 그것도 사랑의 방식입니다. 죄책감은 때때로 '살아있는 자'가 '사라져가는 자'를 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에요. 인간의 존엄은 말할 수 있을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일 할 수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나를 아껴서 슬퍼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시간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사랑의 형태 또한 다를 것이다. 기억하고 슬퍼하고 애틋해하는 마음. 존재는 없어지더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머물고 있음을 나도 알고 너도 안다면 그 대상이 무정형(無定形)의 것이라 한들 여전한 마음인 것이다.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 내가 손을 잡아주어야 했던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라 한들 변형되어질뿐 변질되지 않는 다는 것 확실하다 단언하고 싶어진다.


고단하지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 유독 아버지에 대해서는 측은함과 애잔함이 깊게 드리워진다. 딸자식보다 배움의 깊이도 얇고 하고자 했던 꿈의 높이도 낮은 사람. 그럼에도 모든걸 굽히고 한참을 숙인 채 저자세로 세상에게 맞춰주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처럼 저자에겐 전집들 사이 비어버린 책들처럼 허전한 구석을 만들어 놓았다. 당연하진 않겠다만 그렇다고 빈자리를 미리 예상하며 사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전집 속 비어버린 그 좁은 틈새 처럼 삶의 순간마다 구석구석 작은 공간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할 것이고 또 그 만큼 애틋함을 밀어넣을 듯 하다. 애 썼다고 잘 가시라고 잘 쉬라고 하지만 또 한 켠으로는 잠깐 들렸다 가라며 그리움으로 당신을 당겨와 내 옆자리에 두고 싶은 그러한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움의 구멍, 상실의 틈, 애틋함의 빈자리. 평안을 바라는 그리움. 모순된 마음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 여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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