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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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람을 따라왔는지 우리는 다 여기서 만났어'라는 문장에서 뜻밖의 만남과 끝이 보이는 헤어짐, 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회의 인연 3부작은 아닐까 라는 어른의 눈으로 이야기를 그려보게 만들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정도의 연륜은 아니더라도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했기에 이런 느낌은 아닐까의 짐작이었다.

이야기는 삼십 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리브나무 집'을 찾아 나선 한 소년의 여정에서 시작이 된다. 그 집을 처음 만나고 떠나게 될 때엔 소년이었고, 다시금 그 시절을 떠올리고 수소문 하여 찾게 될 때엔 중년이 되었다. 기억속의 집은 초록 이끼로 덮여있고 벽은 무너진 상태. 그리고 어린시절 자신을 맞이하던 '나나 올리브'도 없는 빈 공간. 거기서 그때의 흔적을 찾다가 발견한 낡은 편지 노트. 누군가로부터 메모가 읽혀짐으로서 이 집의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다. 멈추어 있었지 문이 닫혀있지 않았던 그 집. 거기서 그는 나나 올리브가 했던 마음을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톺아보고 마음을 따라가본다.


전쟁은 희망을 눌러버린다. 대신 '헛된'이라는 단어를 앞세우며 좌절을 밀어부친다. 그럼에도 내가 숨을 쉬는게 더뎌지는 것도 아니고, 아침 해는 뜨며, 밤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희망이 떠오르면 정말은 저무니까, 눈앞이 깜깜해도 어둠이 짙어 보여도 틀림없는 사실은 다시 빛은 돌아온다는 것. 변하고 있는건 분명한 사실이니 이 또한 변화되어 머물지는 않을거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버틸 재간이 있어야 버텨 내지.


익숙했던 존재의 상실. 그건 든 자리 만큼의 마음의 웅덩이가 움푹 패여 눈물이 고이고, 근심이 흘러가게된다. 애도의 과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긴 슬픔은 먼저 간 이가 편하게 떠날 수 없으니 이걸 아이의 시선으로 느끼기 쉽도록 알려주었던 나나만의 작별과 애도의 방식이었음을 느꼈다. 나도 나나처럼 우리에게 상실은 있겠으나 소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보다 더 슬퍼하는 이에게 담담하고도 눈물 덜 흘릴 수 있는 작별의 과정을 설명하는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처요. 헤엄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이건 못된 마음이 아니다. 같이 구렁텅이에 빠진 채로 한데 모여 죽어보자는 자폭의 심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이 상황인데도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이가 있는데, '나도 할 수 있지'라는 진득한 삶의 의지를 밀어주고 있었다. 좌절 할 타이밍도, 포기할 기점도 아닌데 넌 뭐하고 있냐는 듯한 주변의 부산함.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주는 과정이라 말하면 더 쉬울까? 만약 행복한 파티의 순간이라면 각자가 느꼈던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날들을 이야기하는 행복 배틀이 되었겠지. 이전에는 누가 더 행복했냐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되었다면, 지금은 슬픔 배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살고 있잖아?'라는 더 멋드러지고 극적인 삶을 살아왔노라 말한다고 여기자. 우리 그렇게 각자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하다보면 깔딱깔딱 숨 넘어가는 고비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보였다.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요. 그러면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모든걸 놓아버리려 했던 삶의 고비를 알기에 우리는 나와 같은 처지, 그리고 나보다 못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 더욱 공감을 하게된다. 나보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고단함을 알기에 더 쉽게 생을 포기할까봐 그 처지를 헤아리고 내가 조금 더 갖고있는 무언가를 뚝 떼어 무심하게 놓아두는 마음이라 해두자. 내가 훨씬 잘 살아서도 아니고, 내가 더욱 많이 가져서도 아니다. 고만고만한 처지이지만 그들도 나나 올리브에게 도움을 받았고, 한낱 작은 짐승이라 생각한 배트맨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기에 귀하게 얻은 만큼 자신의 귀했던 한 줌을 놓아두고가는 공생의 끈 이었다. '이게 있는데 당신도 살아야지' 라는 구실이자 삶의 미련을 주고 가는 모습이었다. 끌어주고 당겨준다는 그 말. 우리는 그 연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전쟁 이야기였지만 마냥 암울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불안한 상황속에서 기다려주는 이가 있었고, 내치지 않고 맞아주는 이들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었고,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살면서 마주할 우연의 인연이 아닌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맞아주었고, 또 기다려줬다. 메이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영혼이 저 반짝이는 구멍을 메우러 가고있다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나나 올리브 역시 반짝이는 어느 한 지점을 메우러 떠났고, 남겨진 공간은 또 다른 나나가 되어 기다려줄 준비를 하고있다. 기다려주던 마음과 기다리길 바라던 마음은 또 다른 누군가의 비빌구석을 마련해두었다. 모든게 망가진 것 같아도 살아낼 구석을 찾아주는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또 한번 감사의 마음을 보내며,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한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진다.

자! 여기까지 어른이 느낀 '진짜 사람 사는 얘기'였다. 이젠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살아내는 이야기의 해석이 듣고싶어진다.



📖문학동네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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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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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있을법한, 그렇지만 이게 SNS나 숏츠에 주목받진 못할테고,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세상살이의 갈등과 상처받는 방식이다. 싸워 이기는 싸움닭의 마음보다는 이제는 좀 에둘러 가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피하고 싶고, 괜히 연류되지 않도록 한 발 물러나고 싶다. 괜히 나대지않으려하고, 공정한 잣대에서 측은함을 무기삼는 자에게 연민을 품는 행위 자체를 잘라내고싶다. 학연, 지연, 혈연 그러한 끄나풀에 스텝이 꼬이기보단 담백하고 아닌 것과 맞는 것에만 집중하고 살고싶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게 아니라 더욱 성질이 뻗친다.

이게 순리인지 모순인지는 구분을 하지만 그 스토리가 나를 기점으로 뻗어간 거라면 그 어떤것도 확신하지 못하게된다.

저자는 말한다. '저는 오늘도 수많은 모순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혼자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만 또 완전히 혼자이고 싶지만은 않은, 선택적 고립의 욕망도 거기 속할 것입니다.' 라는 말에서 공감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모순이 가득한 사람인데, 모순을 모순으로 대립할 것인지, 모순이라도 FM대로 마주할 것인지는 매번 당하고 깨우치면서 그때그때 달라진 사람으로 살 듯 하다.

하... 나는 오늘도 바르고 곧은 사람은 글러먹었나보다.

📖실패담 크루_ 실패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패는 현상이 아니라 기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실패담을 공유하긴 하나 결국 잘난거 티내고싶어하는 모임. 조합 자체가 우리가 아는 실패의 결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잘난맛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 실패에 대한 히스토리가 온전한 뜻을 담고 있긴할까 싶어진다. 성대표가 나를 더 챙기는 이유 또한 아끼는 의미의 단어적 온전함 있을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세히 그 의중을 알아야한다. 진실로 성대표가 아끼는 마음이 커서 그간 인턴 시절 동료를 고자질하며 타인을 누르고 일어서려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며, 이 모임의 신입 회원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질투삼아 발판삼아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걸 깨우쳐야된다는 점인데, 아마 이야기 속 나는 끝까지 진실의 의중을 모를 듯 싶다.



📖언니_ 고말다는 말,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어딘가에 한 줄 들어 있기를 나는 절실한 심정으로 바랐다.

모두가 평등하다는건 말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과 최소한의 인간됨은 필요했다. 있는 놈이 더하다지만, 있는 놈이 더 모르기도 하다.

이게 당연하게 여겨져서 단념을 하는게 당연한 세상살이는 아닌데 매번 약자의 편에서는 굽히고 들어가야하며 모든게 가능하다는 예스형 인간이 되어야한다.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하는 것을 넘보는 것 마냥 기본적인 권리도 무시당하고 최소한의 대우도 없다. 그 어떤것도 당연한게 아니다. 그래서 언니의 노력이 더운 아깝고 아쉽다. 여기서 이럴 사람이 아닌데, 여기서 이럴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닌데.



📖선의 감정_ 그냥 내가 오늘은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교수님이랑 이거 같이 마시면서 엄마 생각하고 싶어서, 그래서 사왔어요. 이거 드세요. 나쁜 거 아니예요. 캔커피 중에서 제일 비싼 거예요.

특수한 직업에서 얻어지는 고충은 그 강도가 세다. 그리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에 기대어 바라는 사람들은 간절히 짙다. 그러니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의료진은 업무 이외의 스트레스가 높을 수 밖에 없다. 다들 왜 특수 분야에 지원을 안 하는지도 다들 알 것이다. 상급병원을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알지. 살려도 죽어도 모두 의료진을 탓하며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보호자로 인해 더더욱 마음을 쓰지 않으려하는 기계적인 작용을 하게되는 의료진. 교수의 선함은 어디에 기거하고있다고 봐야할까. 단순히 환자와 보호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심적인 위로를 하는 것? 내가 이 단편을 완독하고 느끼는 교수의 선함의 결은 챠트 사진을 통해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과 그걸 환자에게 알리고, 타과로 전과시켜 경과를 보자하지 못한 아쉬움에 대한 의료인의로서의 자기 역할이라 봤다. 그리고 안복희 환자의 보호자였지만 지금은 환자로 온 따님을 혹여 의료 소송이나 기타 보복을 먼저 생각하고 피하기보다 내원한 환자로서 대하는 방식이었다. 뭘 더 잘 해주고, 뭘 더 마음 써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신들은 전문의 이니까 나보다는 더 잘 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니까 내가 모르는 내 가족에 대한 것들을 좀 살펴봐주고 알려달라는 것 그뿐이었다. 내 쫒기보다는 조심하라고, 아프면 또 오라고 봐주겠다고, 그렇게 대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병원비 긁어주는 사람 아니고, 아픈곳 치료하러 오는 환자로 대해준 사람에 대한 감정에 우리는 선(善)의를 품고 있구나로 느끼고 있다는 걸 한번 더 인지시켜주었다.


📖빛의 한가운데_ 아니야, 나는 그런 엄마가, 아니야.

최근 화두로 떠올랐던 딥페이크. 그 사건에 대한 걸 피해자가 아니라 피의자의 보호자가 겪게되는 감정선을 그려두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예민한 사안에 대해선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글을 쓰게되고, 피해자의 심경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피의자의 부모가 가지는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에 대한 걸 말하고있다. 더군다나 안희는 피의자와 피해자 모두와 엮여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아들이 한 짓이고, 처음엔 아이들의 같은 반 학부모였다가 지금은 절친한 동네친구가 된 미령이 사건에 연류되어있었다. 안희의 남편은 자신의 아들을 먼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안희는 아닌건 아니라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다. 미령이 연예인이라 얼굴이 다 공개된 공인인데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남편 또한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어필하고있다. 이 행위 자체가 잘한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벌 할 일도 아니지 않냐는 안일한 피의자 가족의 대응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신고하기만 해보라며 엄포를 놓는 남편.

부부끼리 결정 하는 것에도 이렇게 갈리는데 세상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며 어떤 이의 의견을 존중해줄지 궁금해진다. 순리가 먼저일까 가족의 의리가 먼저일까. 세상은 안희의 결정이 모자지간의 결여된 애정이라 볼까 아니면 옳은 가르침과 선택이라 말하게될까. 그래서 당신은 뭐가 맞다고 생각하는가?



📖가속 궤도_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았다.

소진은 매 순간 두려움으로 살아야하는 사람, 기욱은 한때의 집착이 한 시절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라 여기겠지. 이 이야기에서 소진이 겪은 것들만 채워져있다. 기욱의 입장은 없다. 오롯이 한때는 사랑이었으나 이후에는 과한 집착과 보여주기식 애정으로 두려움의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두었다. 공간을 피했고, 시간을 넘어섰음에도 소진은 그 감각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실체없는 두려움과 익명이 주는 불안감이 모두 과거의 그때 그 사람일거라는 확신을 하게 만든다.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의 평온한 세상이 깨질 것 같은 과거의 이력일 것이고,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은 온전한 나로서의 삶과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내 탓인냥 말하는 상대에게 상처받지 않는 마음이라 보였다. 불안은 불안을 낳는다 했지. 그리고 피의자는 발뻗고 자더라도 피해자는 결코 발뻗고 편히 자기 어렵다는 걸 또 한번 느끼게 된다.(기욱은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관장을 하고 아이들을 살피는 학원 강사로서 그때의 사건을 기억하긴 할까.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했고,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을 쪼아댄건지 알긴 할지 그 또한 궁금하다. 이 사건을 앞서 보았던 '우리가 떠난 해변에'의 작가와 피디를 소환해 과거 있었던 일을 알리고 지금은 어떠한지 그에게 냉소적인 마음으로 과거를 긁어내어보고싶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식으로라도 흠집 내고 싶은 독자로서의 까칠한 마음이라 해두자.)



📖사는 사람_ 내가 거대한 거미줄의 한 귀퉁이에 얽혀버린 날벌레인지 아니면 둔한 공모자인지 영원히 가려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관대한 호의라고 여겼으나 굳이 수고로운 내 행동이 필요없었을 사람에 대한 생각. 마음이 쓰이고, 챙겨줘야되지 않을까 하는 괜한 오지랖이지만 그래도 잘 따라와주고있고, 발전되고 있는 듯 했으며, 보호자로부터 상처받지 않을테니 금전적 거래는 사양했던 은밀하고도 조심스러웠던 거래. 하지만 결국 괜한짓. 이러한 내 마음이 필요없이 상대는 원하는 방향과 계획된 스토리에 맞게 다음 스텝을 진행하고 있는 걸 보자하면 나는 상대가 학생이었는지, 학생인척 하는 학부모였는지도 분간을 못한 아둔한 사람처럼 여기게된다. (괜한 연민에 끌렸던) 둔한 공모자 이지만 스스로 그런 사람은 아니고 싶은 마음. 그게 택배로 온 지갑과 돈을 바라보며 괜시리 머리를 긁적이게된다.

처음 DM이 왔을 때 끊어 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에 대한 의구심에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싶다. 상대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말캉하고 예민한 연민의 구석을 건드려 원하는걸 얻어내고도 남을 사람들임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 거미줄은 어떻게 해도 털어낼 수 없는 얇고도 끈덕하며 기분나쁘게 섥히는 세계라는걸 깨닿게 했다. 사람으로 돈장사? 아닌 척 해도 결국 그거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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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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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해하는 존재들은 소실이지 소멸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더욱 간절히 붙들여 메어두려 하는 것이다. 실체가 눈 앞에 있으니 포기를 할 수 없는건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든 곁에 두려 하겠지. 옥주가 묵호를 생각하듯, 묵호가 좀비가 된 상황에서도 무의식 중에 옥주를 키지려 하듯이 말이다. 어딘가 하나씩 어그러져 있더라도 화자들에게는 이 존재는 여전히 유의미함을 알려주고있다. 과한 상상은 내가 닿아있지도 않은 미래의 사건들에도 만약이라는 전제를 두면서 나라면 어떠할지 괜한 고심을 하게 만든다. 이러저러 잔꾀를 부릴 생각을 하지만 결국 결말은 그거다. 어떻게든 지키는게 맞다는 것에만 집중하겠지. 그리고 지키겠지. 그러니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내가 널 기다리고 있어'로 이어지겠지. 그게 꽉 닫힌 결말이겠지.

📖울컥 치민 울음을 찾기 위해 내뱉은 말이 고작 저거였다.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못 배웠다. 비위를 맞추거나 변명하는 것만이 내가 배운 삶의 방법인데, 옷장 밖의 세상에선 저런 말들보다 고맙다는 말을 놓치지 않고 내뱉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셈이다.

어린 시절의 제때 받지 못한 사랑과 보살핌. 그나마 붕어빵 사장님에게 얻고 자란 귀한 마음. 사랑도 받아봤어야 표현하고, 타인에 대한 상냥함도 교육이 되어야만 행동 할 수 있었던 아주 여린 것들이었다. 불쌍하다는 마음 너머에 보살피려는 마음을 생각해본다. 나라도 이 여린 것을 보살펴줘야 더는 허튼 마음 안 쓰고 쭉쭉 뻗어가며 자랄 것 같아 애틋한 시선을 주는 어른이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게된다. 사랑도 반복학습이고 다정함도 계속 자극받아야하는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감정 교류라는 것을 느낀다. 묵호든 옥주든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그랬지 롤모델이 된 붕어빵 사장님은 이걸 알면 얼마나 뿌듯해하실까. 또 얼마나 팥소를 두둑히 넣어 붕어빵을 구워주셨을까 그려보면 므슨 죄가 이들을 그리 내몰리게 했나 싶어 이 상황이 원망스러워진다.


📖아빠가 기억하니 괜찮아. 기억은 한쪽만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아빠가 엔딩까지 잊지 않으면돼.

남은 자가 기억하면 된다는 슬픈 약속. 같이 기억하면 제일 좋은데 매번 그러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게 국룰인가봐. 매번 눈물바람이되거나 남겨진 사람만 하염없이 그리워해야 되는게 당연시 되어지는 관계성에 현실이든 소설속이든 서러울 뿐이다. 시체같은 엄마를 바라보는 막막한 기다림. 3년 전 사라진 아빠를 기다리는 공허함. 자폐아인 딸을 홀로 키우며 나아지는 날이 있으리라 막연한 믿음으로 사는 삶. 다들 남겨진 자로서, 남보다 멀쩡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든 싫든 모든 과정을 기억하게되는 사람. 그래서 미안하다. 좋은 기억만 줬음 싶은데, 그보다 더 큰 실망과 슬픔의 기억까지 얹어준 듯 하여 남겨진 이들이 더더욱 안쓰러워진다.



📖입에 담긴 건 고작 말 한 모금뿐인데, 그걸 종일 뱉어 내야 하는 하루. 그 한 모금을 하루 종일 흘려보낼 수 없으니까 아무거나 막 뱉는 거지. 세상의 온갖 일들. 내 머릿속에 있는 온갖 문장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엄마에게 세상을 실어다 주는 마법사가 된 느낌이야. 내 입에 웅크린 세상이 있어. 사탕처럼 달콤하고, 단단하고, 깨지면 혀에 피를 내는, 달고 아픈 세상이.

시체같은 상태의 아픈 엄마. 껍데기만 남은 엄마. 존재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쓰다듬어 주거나 포옥 안아 줄 수 없는 존재. 원하는 것 보다 단념하는게 더 많아지는 관계성. 그럼에도 끌어다 놓고 괜한 말들로 당신의 움직임을 기대하는 애틋한 간절함. 대답하지 않을걸 알지만 종일 떠드는 건 이렇게라도 해야만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내가 자각할 것 같아서 해보는 악착같음에 이 상황이 SF소설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심심찮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입이라도 놀려보며 대답없는 이에게 질문하고 시선을 맞춘다. 입이 바쁜 것도, 진이 빠지는 것도 결국 나라도 이 과정을 해야만 덜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헤어질 때를 놓쳐서는 안 돼.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안개 속에 갇히게 되니까.

그걸 다 알고 있으니까 때를 어기고 싶어진다. 다들 같은 맘일거다.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알지만 놓지 못하지. 내가 먼저 손을 뿌리치진 못하지. 그게 매번 약자의 마음인냥 내가 더 좋아하고 애틋해서 그런 것이라 여길 수 밖에 없는 을의 마음이지.




📖우리는 욕심이 없잖아. 많은 걸 바란 적이 없잖아. 천국은 바라지도 않아. 어디든 저승의 남은 땅에 같이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데.

3부작의 인물들은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들아니다. 어디서든 흔하게 볼 법한 그냥 지나가는 행인1,2로 여길만한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이고, 주목받길 바라지도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새로운 땅에서 우두머리 노릇 하길 바라는 욕망덩어리가 아니다. 그저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니 조용조용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살고싶어하는 여린 것들이라 이러한 바람들이 더욱 가엾게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과 평생 쿵짝쿵짝 맞춰가며 살아간다면, 평생 어떤 고난이 와도 홀 케이크 한 판으로 모든 하루를 이벤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우리는 늘 미래를 암묵적으로만 공유해 왔다.

그냥 사람을 사랑한 것이었다. 여기서 동성이나 이성에 대한 세부적인 갈래가 아니라 나랑 같이 살아도 될만한 동반자를 사랑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래서 사사로운 일상의 공유가, 같은 결을 띄고 있는 마음의 갈래가 나란함에 미래를 맡겨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평생 함께 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행복은 그렇게 나란하게 이어지리라 여겼는데, 이게 과한 바람이었음을 보여줬다. 뇌종양에 걸려 존엄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엔 아내는 나와 같은 생물학적 생존의 형태를 띄지 않고 있었다. 좀비로 그득한 상태. 아내 또한 온전한 살아있음이 아닌 상황. 이게 재난이지 뭐 더 다른게 있을까 싶은 암담한 상황. 다들 좀비가 되든 상관이 없는데, 내 사람이, 내 평생을 함께 이어가리라 믿은 배우자가 그리 되었다는 것에는 여전히 실감하기 어려운 극단의 상황이며 최악의 감정 소모였다.



📖작가의 말_ 내가 이 장르에서 느낀 주된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사무친 슬픔이었고 죽어버린 자, 살아남은 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해피엔딩은 없는 장르였다.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 위에 덧얹어진 좀비 아포칼립스의 결합체. 감염과 붕괴라는 큰 주제안에서 우주선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한계성. 살리고 죽이느냐에 대한 선택의 과정속에서 느끼게되는 감정이 1부에 집약되어있다. 2부에서는 탈출하지 못한 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약한 존재들이 연대하며 살지만 불안은 존재한다는 관점으로 담겨있다. 목표점에 다다르면 확실한 행복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한다는 생의 지속성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건지를 이야기한다. 마지막 3부가 서사의 완성. 인류가 사라지고 멸망에 이르는 불안한 과정. 사람을 기억하고 지속하는 모습. 좀비가 되더라도 관절이 꺾이고 형태가 뒤틀리더라고 내가 사랑하는 아내임은 변함이 없다는 확신으로 어떻게든 카트에 태워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바다를 넘어선 또 다른 세상의 희망이라는 생각을 하며 윤슬처럼 빛나는 바다에 다다르길 응원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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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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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도 있었고, 핀 시리즈 소설, 위픽 단편소설도 출간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내어두던 저자인데 나는 초면이다. 그런데 그 많은 소설을 두고 최신작부터 시작했다. 그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음울함에 빨려가듯 선택한게 이유였다. 저자의 다섯 번째 장편 소설. 출판사에서는 이러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까닭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날카로운 유머와 사회상을 두루 담고 있는 소설. 개개인에게 자괴감과 죄의식을 주입하는 시스템과 그럼에도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불가해한 의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며 한 손에 쥐어지는 이 책의 무게는 생각보다 묵직할 수 있으리라 추측을 해본다.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것이 위안이 될지는 일단 완독 후 생각해 보기로 했다.

프롤로그에서 부터 시작되는 저주. 소름끼치게 당혹스러운 것은 아니나 어쩐지 입안이 깔깔해지게 만들고 괜시리 짜증이 나도록 하는 잔잔바리의 악담 교환이다. 휑한 두피를 보고 '저주받았느냐'고 묻는 일면식 없는 초등학생. 그 말에 발끈하기보단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그러한 저주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저주 할 수 있다며 너를 저주하면 부드러운 머리통에 보기 싫은 땜빵이 생길꺼라며 은근한 웃음과 날선 상냥함을 보인다. 그러한 저주는 진짜 있기라도 할까 싶으면서도 혹시 내 옆통수에 생겼던 스트레스성 탈모와 새치 뭉치또한 누군가의 저주는 아닐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우식은 현재를 살아가며 웃으며 돌려까기와 악담을 잘 하는 나같은 놈인게 분명했다.

📖소소한 저주를 받음으로써 어쩌면 커다란 저주를 피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 ... 남은 생에 더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간신히'와 '겨우'라는 단어에 비비적대며 '근근함'을 벗 삼아 죽을 때까지 질척대며 살고 싶었다.

지극히도 평범한 바람들이 가득하다. 다들 이러한 삶을 바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러하니 이게 보편적이라 해두자. 나 만큼이나 우식또한 그저그런 사람이다. 대단한걸 바라지 않음에도 불안은 언제든 존재한다. 우리도 겪어봤지 않던가. 코로나라는 세상의 단절. 그 고립의 시간동안 우식은 휴먼북을 구독하게되는데 이건 그 서비스를 받기 전의 상태이다. 막혀있는 세상을 살기전의 근근함과 세 번의 격리를 겪은 후 받아들이는 따로와 홀로의 시간을 비교하기 좋은 마음을 보여주고있다.


📖안나의 죽음이 슬프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불쌍해서 소년은 조금 더 울었다.

안나의 존재의 유무는 불안 속 버틸 무언가였을까, 곧 자유를 얻게 된다는 기대의 경계선 앞 이었을까. 조기준은 자신이 감금되듯 갖혀있는 이유가 감염도 전쟁도 아니라는걸 어느 순간부터 자각했던걸까. 엄마를 대신해 예쁜 여배우라 불리우는 안나랑 사는게 좋았으니까, 그녀의 관심과 구속이 때로는 애정이라 믿었기에 자진한 벽장 속의 성장과정인건 아닐지 어린 조기준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조기준의 어린시절이 무섭다. 아둔한 것 같아보여도 속엔 영악한 아이가 햇빛을 받지 못 하고 쑥쑥 자라고 있는 느낌을 받게만들었다.

안나의 죽음이 곁에 있는 존재의 상실이라기보단 본인이 여기 기거하는 구실의 상실로 받아들이는 의연한 자세가 이 아이 자체만의 상황인건지, 주변 상황과 여건이 만들어낸 쿰쿰한 인간의 덩어리인지 알 수 없어 조기준의 성장이 무서워진다.

📖저는 누가 밖에서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해보지도 않고. 저는 진짜 나가고 싶은지 저에게 다시 물었고, 간절함을 확인한 후 손잡이를 잡고 가운데 버튼을 누르며 돌렸어요. 문이 열리더군요. 아주 간단히.

처해진 시간이 다를 뿐 기준과 우식은 자발적인 고립을 택했다 봐야 한다. 팬더믹과 전쟁. 평온한 개인의 삶에 찾아든 인물이 아닌 상황 자체의 변화. 난생처음 겪어내는 현상에 각각의 인물들은 모두 수동적인 자세를 보인다. 어떠한 액션에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타인이 시키는 것들에만 반응하는 과정이 편하고 익숙했던 모습들이다. 타인에 대한 불안 요소는 있으나 두려움이 더 크고, 감염이든 전쟁이든 현상 자체를 놓기보단 눈 앞에 보이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확정짓지 못하는 감정에 대한 요소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불안은 불신을 낳았고, 불신은 자기 확신도 낮추었다.


📖용서를 구하려는 건 아니었으나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상처가 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는 압니다. 이런 사과가 어떤 죄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에게는 더 상처가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불안과 불신을 갖고 각자의 세상을 사는 기준과 우식과는 다른 캐릭터로 비교되는 인물 태공. 우식과 디지털 세탁소를 운영하다 사과를 싣고 나눠주며 특정하지 않는 것들에 사과한다는 인사와 사과를 나눠주는 액션을 취한다. SNS상에서 주목받기 위한 별난 짓이 아니라 진심의 사과와 물질의 사과로 마음을 내비치고 표현하고 있는 대비되는 인물로 2대1의 인물 비교를 담당하고있다.

일련의 사건을 모르는 자들 속으로 피해다니고,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증명하기위해 덮어두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타인의 입에 거론되지 않기의해 희뿌연 존재로 남아있는 기준과 우식에 반하는 또렷한 인물이다. 알음알음 알고 있는 것이지 모든 이가 알도록 수면위에 떠오른 사건이 아님에도 태공은 자신의 딸이 지은 잘못에 대한 사과와 용서를 빌고있다. 아마 디지털 세탁소를 운영함에 있어 가해자의 요청도 있었을 것이고, 피해자의 요청도 있었을 테니 그 둘의 상황과 감정을 모두 습득한 이의 중립적인 마음에서 좀 더 기운 마음의 표현으로 보였다.

태공은 이 진심의 사과 마저도 2차 가해라고 여길 피해자들에게 미안함을 더 명확하게 전달한다. 뉘우치고 있으며, 단순한 잠깐의 사죄로 끝내선 안된다는걸 보여주고있다. 태공은 제 마음이 편하자고 사과하는게 아니라, 저 스스로 잘못을 계속 인지하고 계속 가져야하는 송구한 마음으로 뚜렷하게 남기려하는 모습으로 보여졌다. 시간과 마음과 금전을 들이더라도 타인에게 남겨진 고통의 흔적은 쉽사리 지울 수 없음을 알리는 자세였다.



📖결국 자발적 실종과 격리를 선택한 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전쟁은 시간이 해결했을테고, 팬더믹은 해당 관련 신약처방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 자발적 실종과 격리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다. 시간만 달리했지 우식이든 기준이든 본인이 가장 저주받았다 생각하고있고, 또 한편으론 가장 축복받아서 빠른 구제와 이전의 삶으로 분명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뭘 더 하려하지 않는 잔뜩 움츠려들어있는 존재였다. 벌떡 일어서기만 하더라도 나올 수 있지만 그마저도 안하는 타인 의존과 현상 탓을 돌리는 딱 그정도의 쪼그라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준과 우식만을 타박하기엔 과거의 팬더믹을 겪은 나도 그 꼴을 했었음에 결국 사람의 내면엔 우식같은 마음도 있고, 태공같은 마음도 있는데 어느 방향으로 기울고 어느 형태로 표출되느냐를 말하고 싶었겠지.

1983년을 살아보지 못한 독자이지만, 코로나시대를 겪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고립과 그 속에서 익숙해지는 고요함. 다시금 얻어지는 일상으로의 복귀 후 드는 낯섦까지. 소설이 현재의 우식과 과거의 기준을 번갈아가며 이야길 하고있고, 사과를 싣고 사과하며 사과를 나눠주는 태공 선배의 모습을 비추며 어느하나 평범하지 않은 인물을 비죽비죽 내밀고있다.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길 바라지만 그 이면에는 진짜 이야기들이 아주 곱게 덮여있었고, 나는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겼지만 내가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그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기준이 감염된 바이러스라던가 태공 선배는 진짜 딸 때문에 사과를 하고 다니는건지. 우식또한 더 빨래에서 진짜 모든 흔적을 지우는 일을 한게 맞는지. 인물 하나하나 내가 아는게 완벽한 진실인지 진실인척 하는 가장된 또 다른 인물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렇게 나도 진실이길 바라는 거짓과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빌고싶어지는 진실 사이에서 헷갈리며 과거와 현재를 반복하며 읽어갔다. 자발적 실종과 격리를 선택한게 자신을 먼저 돌보기 위함도 있었고, 나로 인해 빚어질 무언가의 사건이 우려되어 선수친 자행을 보며 모든 존재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당당하고 이기적이지 못하고 매번 이렇게 움츠리고 숨기 바쁠까를 생각하게된다.


📖하니포터 11기로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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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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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정보가 없을때엔 지명을 책 제목으로 둔 줄 알았다.

책 뒷면에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양지영과 저자 양주연, 두 이름을 겹쳐 부르는 말이기도 하며, '익명 속에 머물러 있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양씨 집안의 아가씨를 부르는 호칭이자 한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저자의 고모를 이르는 단어. 그녀는 있었으나 없다. 있었지만 있었던 이력까지 다들 묻어둔 채 살고 있었다.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던 사람들이다. 그제서야 책 표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옛날사진인데 어느 한 사람만 도려낸 듯 흔적이 없다. 대신 홀로그램같은 반짝이는 필름이 덧 씌워져 있을 뿐이다. 이 사람이 그 양양 이구나 싶어하며 책 표지와 뒷면의 서평 일부 만으로 이야기들을 추론해본다. 행복했던 순간을 숨기려 하진 않았을테고, 사진으로 어렴풋 가늠해보건데 주인공은 홀로 많이 울었으리라 짐작하며 그제서야 이것저것 검색으로 사전 지식을 채워보았다.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 개봉이 동시에 이뤄졌다. 다큐멘터리형의 영상물. 2분 남짓의 메인 예고편을 보면 저자는 화목한 가정이라 믿었던 곳에서 숨겨두기만 했던 아빠의 자살한 누나를 알게된다. 가족의 비밀이었던 그녀에 대한 흔적을 조카가 따라가며 시절이 주는 설움과 챙김받지 못했던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녀의 흔적을 긁어모으게 만든다. 왜 이야기를 안 하려 했던건지, 왜 그리도 그리워하지 않고 숨기기만 급급했는지를 남겨진 이들을 통해 알게되는 과정 속에서 양양은 과연 고모 뿐이었을까. 이름모를 양양들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고, 고모 만큼이나 잊혀지고 외면당했을게 빤해서 저자 만큼이나 독자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특별한 삶은 무엇이고, 특별하지 않은 삶은 무엇인지. 누가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또 누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지.

시절마다 특별한 삶에 대해 논하는 방식이 다르다. 특히나 더 엄격했을 과거로부터 시작하는데 과거에 잊혀진 가족이 있으니 그 생(生)에 대해 궁금 할 수 밖에. 일단 가정에서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사회에서도 제약이 많았고, 삶을 끝내는 것에도 뚜렷하게 기록되지 못한 그 생이 더 애달프다. 이만큼 특별한 생이 또 있을까를 생각하며 조금 다른 관점의 특별한 삶에 주목하고 있었다.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은 온 마음으로 느끼며 나는 나의 시간을, 가족의 시간을 다시 꺼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매번 과거 회상의 방식으로 뒤늦게 그 순간을 기억한다. 사진, 영상, 각자의 기억으로. 모두가 서운함 없이 두루두루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긴 하지만 마냥 행복한 사람 곁에는 어딘가 모르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주눅든 마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자란 사랑을 시간이 지난후에라도 보살펴주고 싶다. 과거의 모자란 것에 지금의 따뜻한 시선과 더 큰 마음으로 메꿔놓으며 아쉬움과 설움을 토닥이게된다.

그 시절 저자의 아빠가 무조건 잘못했다며 타박하는게 아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러했으니 그게 잘못된 마음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그래선 안된다 일러주고 덜 받은 사랑의 게이지를 지금이라도 채워보자며 구슬려주는 어른이 된 저자의 모습에서 각각의 자리에서 덜 아프게 영그는 방식이 이런거구나를 느꼈다.

📖나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족이라는 규범적 관념 속에서 가려졌을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과 존재를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보낸 안전하고 화목한 시간들이 누군가를 지워서 얻은 것이라면, 더 이상 그런 화목함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일부러 타인의 행복과 사랑을 뺏들어 나의 복닥한 기쁨을 채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그런 화목함을 바라지 않는 다는 말에 반기를 드는 것 대신, 그러한 희생의 존재를 알아주고 덕분에 얻은 더 큰 복이 나에게 왔음에 감사하며 그 마음을 귀히 여겨주는 방식으로 마음을 달리하길 바라게된다. 그 시절엔 '나'라는 존재가 분명 없었던 시대였고,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던 자신을 책망하기보단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서 그 흔적을 잘 보듬어 주었으면 싶었다. 나에게 고모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것 처럼, 고모역시 자신의 죽음을 누구보다 서럽게 여기며 기억해줄 조카가 생길지도 몰랐을테니까.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자기 앞에 놓인 화목과 다정함을 거부하진 않았으면 한다.

책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양양'의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이긴 하나 쿠키영상 혹은 보너스 트랙 같으면서도 제작 후일담과도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소설같지만 실제이고, 영화이지만 페이크다큐이길 바라게되는 주인공 지영의 짧은 생을 보여주고있다.

주인공은 있지만 없는, 그래서 존재의 의중을 물을 수는 없으나 남겨진 흔적을 통해 시대상에 끼워맞추는 식으로 가늠할 뿐이다. 소재의 중심에 있던 양지영에서 양주연으로 넘어갔으며, 용용의 시절까지 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부녀지간이지만 남보다 더 못한 사이인냥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던 지영의 성장기, 같은 부녀지간이지만 앞서 보았던 사이와는 다르게 이야길 하려고 애썼고, 그간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대화라는 걸 시도했던 주연의 관계. 그리고 이제는 모자의 관계로 성별이 바뀐 채 시작될 엄마 주연과 아들 용용(태명)의 이야기로 이야기의 끝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인냥 그렇게 다음 세대를 알려 준 후 끝이난다.

아버지가 묘를 이장하며 딸이 낸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 당장에 된다, 안된다의 대답보다 고심 후 표현해 낸 진심. 아버지도 누나가 그리웠을 것이고, 빈 자리의 공허함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걸 표현하지 못하는 시대상과 가족내의 분위기는 과거의 이야기 일 뿐이다. 그런건 이제 없다. 그러니 이제 마음가는 대로 하는것이 지금의 양씨 집안을 꾸리는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법을 보여주어 마음을 덜어본다. 여전히 그녀의 생의 흔적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없다. 추측 할 뿐이며, 그녀와 함께 했던 이들과의 대화로 회상할 뿐이다. 어디에도 없던 양지영을 마지막으로 가족 묘비에 옮겨 둠으로서 이름으로나마 있었다는 흔적을 일부러라도 남겨놓음으로서 남겨진자들이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변화된 세상의 표식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아직 무엇도 기록되지 않았고, 아직 무수하게 남길게 많을 양주연과 용용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세상은 이보다 더 뚜렷하고 세세하며 서운함이 없길 바라게된다.

📖하니포터 11기로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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