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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안녕
유월 지음 / 서사원 / 2025년 5월
평점 :

송은이님과 황보름 작가의 추천이라면 왠지 복잡한 인물 서사 없을 것 같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냄새도 나고, 각각의 인물이 가진 아픔도 있음직해 보였다. 어떻게 잘 버텨 나갈 것인지, 극복이라는 단어보다는 스며드는 삶에서 답을 찾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빌런이 나오겠지만 그래도 책 제목처럼 '마침내, 안녕'이라 할 만큼 딱 견뎌 낼 만큼의 빌런짓을 할 인물들은 내가 사는 세상에도 있잖아? 그럼 이 이야기도 비슷한 결을 띄지 않을까? 라는 자문자답을 해가며 큰 고민 없이 책에 빠져들었다.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_ 자신의 삶을 무던히 받아들이는 아이가 너무도 어른 같았다. 그 용감함이 애잔해서 도연은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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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혼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기 두려워 방패로 삼은 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 나쁜 부모조차 세상에 기댈 곳은 그들밖에 없으니까.
요즘 티비프로그램을 보면 버릇없는 아이 고치고자하는 양육방식 제시 프로, 과한 학습패턴에 지쳐있거나 이게 맞는지 확인하는 영재육성 프로, 돈 많은 유명인 자식들이 사회생활이랖시고 혼자 세상 다니며(카메라 뒤의 무수한 어른들은 안보이는척) 견문 넓히는 어린이 기행 프로까지. 이런 패턴의 리얼리티를 가장한 픽션에 질려서 티비를 안 켠지 제법되었다. 그런데 이 단편은 이야기가 다르다. 면접교섭센터에서 만난 아이는 체구는 작더라도, 이 녀석 뒤를 지탱하는 그림자는 아주 커 보였다. 제 몸보다 곱절의 능력을 발휘하여 어른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면들을 스스로 해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어른의 몫 마저도 다 감당할 아이의 눈빛은 딱히 누굴 원망할 새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만이 목표인 삶으로 보였다.
아이가 원하는 해피엔딩은 무엇이었을까? 다 이해한다는 듯 어떠한 의견도 피력하지 않고 자신에게 얽혀있는 어른들을 지켜 볼 뿐이고, 그들의 바람대로 이뤄지도록 내버려두려하는 이준을 통해 이녀석 진짜 아프긴 한걸까? 외로움과 서글픔, 그 모든 아픔이 너무 커서 고통의 존재유무도 모르고 웃자라버린거 같아 완독 후에도 이 친구의 근심없는 성장기를 바라게되었다.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_ 민 교수의 말이 도연의 마음에 찬찬히 담겼다.
"그런데 백 선생, 잘 안 해도 돼요."
이준을 바라보는 도연의 시선, 도연을 향해있는 민교수의 시선. 아마 비슷한 결의 눈빛이 아닐까. 케묻지 않아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어림짐작이겠지만 상대의 표정과 눈빛의 온도를 읽어가며 마음을 토닥여 줄 수 있는 사람의 따뜻한 한마디. 언제든 당신을 향해 내 마음을 열려있다는 말에 마음을 놓아본다. 당장 실행에 옮기진 않겠지만 나를 위한 대나무밭 같은 사람이 있음에 존재 자체로도 위안을 얻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안녕을 바라며 언제든 내가 손 닿을 곳에 내 편이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되고 있었다.
📖건강한 감자_ 그건 언니가 도연에게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열심히 말고, 그냥 살아.
도연의 언니. 매번 애틋하고 매번 미안한 존재. 태움은 언니를 태워 존재를 소실시켰다. 언니는 열심히 말고, 그냥 살아보라 말했다. 어떻게든 애쓰고 열심히 살아본들 달라지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언니는 도연만이라도 덜 애쓰고 살길 바란 진심가득한 걱정의 한마디였다.
그리고, 사건을 통해 만난 시재에게도 똑같은 말로 위로를 전한 것 이었다. 이 말을 하고 언니는 사라졌지만, 시재는 이 말을 듣고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진심의 간절함과도 같아보였다.
📖도연의 첫 번째 직업_ "초심자에게 제일 필요한 건 그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결국 공부하게 만들거든. 어떤 내담자에게는 상담사의 열심히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가장 필요하기도 해요. 빠른 치유가 정답은 아니니까. 당장 시작합시다. 내가 도와줄게요."
어렵다. 도와주겠다는 마음, 도와주고픈 의지, 빨리 작업과정이 이루어져 손에 쥐어지는 결과가 나오는게 맞는걸까 느리더라도 지긋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천천히 내딛을 수 있도록 발을 맞춰주는게 확실한 과정일까.
우리는 보다 빠른 치유와 확실한 변화를 바라며 전문 기관을 찾게된다. 돈이든 시간이든 내담자에게는 소비되는 몫이 클 테니 무엇이 되었든 리스크를 줄이고자하는 지원의 조언은 선임으로서의 당연한 작업 지시였으리라 봐 진다.
📖도연의 첫 번째 직업_ 막막했던 말들이 견고하게 막아둔 둑을 무너뜨리듯 터져 나왔다.
"그래도 말로 뱉고 나니 좀 낫죠?"
지원의 나지막한 말에 도연은 무엇이 나은지 알지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에게 언니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치부는 아니지만 입 밖으로 뱉는 순간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언니를 어떻게 평가 할 지 모르는 것도 있었고, 무작정 위로로 덮어 없애려 할 듯한 타인의 말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잘못 한 것이 없는 언니였고, 또한 잘못 한 것이 없는 도연이지만 이 말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괜찮다고만 말할 그 무수한 입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과거형을 시작해 조금씩 틔워가는 그날의 이야기. 누구에게 툭 하고 털어 본 적이 없었으니 이게 나아지는건지 알 수 없는 마음상태.
단지 상대가 담담하게 들어주고, 이야기를 마칠 때 까지 기다려주는 과정. 과한 액션 없이 담백한 청중이 되어주는 것. 지금껏 그러한 사람이 없어 입을 다물고있었던 도연이었나보다. 애써 뱉어보는 위로와 황급히 표정을 고쳐먹고 슬프고 애석해하는 피드백이 없는 것이 더 감사하기도 하거든.
📖탈주하는 기차_ "지금 모습 그 자체로도 괜찮아요. 굳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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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아니면 얘기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바짝 말라가는 풀 같으니까 햇볕 그만 쬐고 물 좀 많이 마셔요. 볕에 타 죽을까 봐 걱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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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일로 만난 사람에게 마음 따위 주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어떤 것도 맡기지 않겠다고, 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참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꼭 언니로 인해 이러한 마음을 고쳐먹은 게 아니었다. 나를 우선으로 두려고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을 주면 그만큼의 기대를 하게되고, 내가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상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서운함이 자라났다. 그러니 나부터 지키나는 마음. 그게 필요했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것들_ "그걸 모르겠다. 괜찮아지고 있는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괜찮아져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도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 얘기 하는게 공포였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거 보면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책 제목 '마침내, 안녕'은 어느 독자가 말해 준 것 처럼 고대하던 안녕처럼 보였다. 이제는 웃으며 손 인사 할 수 있을 정도의 겨를을 지닌 것. 완전히 없던 일이 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덜하고, 숨쉬는 타이밍을 찾아낸 삶이라는 말 같아서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살아집니다, 살아도 됩니다.'를 말해주는 삶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슬픔 없는 사람 없고, 고난 없는 사람 없으며, 아픔 없는 사람 또한 없는거 안다. 각자가 가진 삶의 생채기가 가장 쓰리고 아프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삶인데, 살다보면 그 고통은 무던히 견뎌야하는 당연한 과정이고, 타인을 살피는 데에 치중하는 생을 살게되는게 어른의 삶이었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 비중을 좀 줄여도 괜찮다는 점을 다양한 관계속에서의 이유를 내어주었다. 다양한 인간군상은 '도연'에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맞춰주며 살아 갈 수 없음과 함께 도연이 가진 히스토리에 대한 특별함보단 그럴수도 있는 삶이라는걸 보여주고자했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우울과 불안, 분노와 자책을 가진 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 어떠한 이유가 된들 상처는 존재했고, 그 속에서 어떻게 극복하느냐 보단 어떻게 흘려보내도 되느냐로 시선을 옮겨보고싶어진다. 극복이라는 것 대신에 회복과 흘려보내는 과정. 흘러가는대로 나둬보면서 그렇게 그때의 나와 멀어진다면 '마침내, 안녕'할 수도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삶.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 채워갈 또 다른 나의 삶을 반기며 '마침내,안녕'하며 맞아주는 과정이 있어 도연에 대한 걱정어린 마음을 덜어보게된다.
영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있어 온전히 모든 감정과 서사를 전달 할 수 있을지, 어느 에피소드에 중점을 둘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문장들이 가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적절한 무게를 잘 전달해주길 바란다. 자칫 그 순간에 머무는 고립된 마음으로 보여지지 않도록 대사를 하는 배우의 톤 완급조절도 중요할테니, 글 맛 잘 살려줄 배우가 나타나 도연을 책 밖으로 꺼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