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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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안규철님을 안 것이 BTS의 RM님 덕분이었다. 2021년이었지?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실 즈음 전시장에 온 남준님. 전시에 맞춰 사물의 뒷모습을 출간한 상태였고, 남준청년이 책에 사인을 해달라 요청을 했었고, 그 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게시된 사진으로 인해 기존 부수의 10배 정도를 더 찍고 번역출판을 했다는 일화. 예술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아이돌 덕에 나도 찾아보게된 작가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들을 변형하여 관객의 질문을 유도하는 사물을 만드는 사람.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일상의 물건들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를 둘러싸도 있는 세상의 모습이 있기에 보는 이들에게 새롭게 발견하게 하려는 작업을 하는 사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적인 역할을 삶과 세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진 활동가의 글이다.



일과 공부, 사람과 사물에 대한 57편의 깊은 사유들과 스케치. 전작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사물의 뒷모습'에 이어진 3부작 연작 에세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앞의 2부작에 담아낸 고민들을 더 깊이 있게 천착함함과 동시에 퇴직 이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일상에 대한 솔직한 사유를 담담하게 적어 두었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각각의 단락에는 그 그림자를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본 형상을 이루고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사물과 저자 자신이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진짜 이야기를 짤막하니 담아내었다. 각각의 형상이 알려주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다. 이 또한 사물 너머의 그림자 일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또 나름의 이야기를 유추해보기도 하고,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을 틔워주는 느낌을 받게한다.




📖감자_ 빛이 없으니 화려한 색채도 필요 없고, 누구에게 보일 것이 아니니 반듯한 모양도 필요 없다. 각자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그저 미래를 기약하며 단단히 안으로 뭉쳐진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식물이 결실을 맺는 것에 대해 사과와 감자를 두고 상반된 표현법을 알려준다. 시작점은 햇빛과 흙에서 양분을 끌어모아 살아가는 삶인 것은 동일하나 지상으로 드러나며 약탈자의 간섭이 있음에도 그 대가로 삶을 이어가는 사과의 삶, 약탈자를 피해 지하로 내려가 햇빛도 바람도 새소리도 없는 어둡고 축축한 흙 속에서 양분을 저장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감자의 삶을 덧붙여 극명하게 설명한다. 안으로 파고 든다고해서 멈춰 있는 것도 아니며, 표면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여 소흘함이 있는 것이 아닌 무던한 생장. 그걸 보고 코로나 시대에 집 안에 갖혀있던 자신을 투영한다. 칩거했던 삶이 그것의 생장과 다르지 않은 환경이니 애써가며 자라던 노력을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 또한 그리 한다면 제법 괜찮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하는 마음. 그저 자라는 것에 대해 무던하게만 인식하던 사람에게 조건에 대한 투정 없이 나만 무던히 애쓰면 될 것이라는 해탈의 한마디를 건네는 감자 이야기.


📖나무_ 머무는 사람에게는 의자가 필요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노가 필요하다. 머물기를 원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는 자, 그래서 온전히 머물지도,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자의 모습이 여기 있다.

목재상에 빼곡하게 쌓여있던 나무들이 머물게 될 장소와 시간과 세월을 생각해본다. 시작은 땅을 딛고 꼿꼿했던 나무였을테고, 누군가의 손길과 정성을 통해 모습이 변하고, 용도가 달라지며, 그 형상으로 살아갈 시간까지 가늠 할 수 없도록 다양해질 이후의 쓰임들. 이미 나무가 뽑히고 다양한 모양으로 재단이 되어지니 생(生)이라 할 순 없겠지만 살아가는 생이라 한정짓기 어려운 그 너머의 다양한 삶의 연속성들. 머물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며 변화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나룻배가 되고, 수레가 되기도하며,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다가, 천 길 땅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검은 석탄으로서의 제법 많은 삶도 살아갈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붙겠지. 멈춰있는 것에 가득한 평안을 바래선 안된 다는 가장 큰 조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_ 나의 젊은 날은 남들처럼 예와 아니오를 가르느라 다 지나가버렸다. 나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

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진짜 이야기. 파울 첼란의 '그대도 말하라'라는 시에서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말을 하라. 그러나 그 말에서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라는 문장.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었던,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뼈아프게 다가온 저자의 시절들. 그는 자신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음에 아쉬워했으나 독자로서 바라볼 때엔 문장을 통해 자각하며 자신의 삶에 빗대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새겨보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서 갑작스레 삶의 방식을 바꾸라 종용하는 이도 없을텐데 반성하고 고치려 애쓰는 마음을 보면 여전히 그가 사유하는 모든 것은 다른이들보다 좀 더 긴 청춘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왼발과 오른발_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는 이런 분업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불확실한 미래로 발을 내딛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일을 할 때 나의 왼발은 무엇이고 오른발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딛는가. 이것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할 만한 전진인가. 이 모험을 감당할 만큼 내가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는가.

생각해보면 의식해서 숨을 쉬고, 의식해서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해가며 걷지 않는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우며, 으레 당연한 일 인 것 처럼 행하게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걸 매번 자각하며 예의주시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모든 행위에는 영원이 없으니 말이다. 숨쉬는 것과 걸어 나아가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목적을 갖고 노력이라는 마음을 쏟아야 하는 거라면 오죽할까.

한 발은 땅을 딛고있고, 다른 한 발은 허공에 떠 있는 불안함. 그건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도 그러하고, 낯선 여건에 떨어진 어른도 동일한 아찔함을 얻게된다. 그렇다고 영영 한 쪽 발만 띄워 둘 수도 없다. 움직여야 다른 발이 평온을 찾고 또 다른 발은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머물기만 하면 매번 똑같고 지루하니까, 그 고루한 삶보다 자분자분 거리게되지만 조금씩 스텝을 밟아 나가는 삶에 재미를 붙여보면 좋겠다.



📖짧은 만남, 긴 이별_ 외로움에 대한 내성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이다. 그가 보여준 삶이 그렇고, 또 나를 일찌감치 떠나보냄으로써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운 그의 결정이 또한 그렇다. 내 속에는 나의 아버지가 그대로 살아 계신다.

비단 외로움 뿐이겠는가. 저자 자체도 그러하고, 그를 비추고 있는 빛 뒤에 자리잡은 그림자 마저도 아버지가 남겨둔 생의 일부이기도 하다.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다고 닮지 않거나 사랑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득히 애쓰며 풀어냈을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내 속에 나의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있다고 여기는 걸로 보였다. 당신이 애써왔을 마음을 아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지남에도 애틋해지는게 아닐지.


사물을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들. 일반적으로는 그것에 대한 쓰임새나 외형에 대한 직관적인 것들로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저자는 자신의 상황에 투영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이 자라왔을 환경과 버텨왔을 시간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유하다'에 대한 정확한 예시를 마련해 주었고, 두루 살핀다는 것, 부러 미사여구만을 늘어뜨려 허울만 좋은 껍데기를 씌우지 않는 방식을 알려주는 이야기. 그래서 더 다양해질 사물에 대한 사유와 그림이야기가 기다려지고, 닮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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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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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무로 변하는 순간.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는 흐름. 당장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몸이 굳어지고 피부가 나무껍질이 되어 아등바등 할 수록 더 빠르게 바뀌는 상태. 이 현상을 눈으로 봐 왔고, 멈출 수 없을거라는 확신이 드는 세상을 산다면 사람의 꼴을 하도 안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무들을 대하면서도 이걸 인간으로 봐야 할지. 또 다른 변이체라 생각하여 시료를 채취한다는 명목으로 신체와도 같은 나뭇잎을 뜯고 가지를 부러뜨리는게 인권 침해라 보아야 할까, 직관적으로 보여지는 식물로 대하는게 옳을까.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변한 것에는 감정을 싣지 않으면서, 가족이라 할 만큼 의지하고 지냈던 사람들이 변한 상태에서는 인간이지만 모습만 다를 뿐이라고 의미부여를 다르게 주어야 할까. 나에게 맞딱드려지지 않을 상황이지만 나는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게될까. 내가 나무로 변한 무리라면 여운에게 호소를 하게될까. 처지를 비관하지만 수긍하여 나무로 변했으니 인간이기를 포기해야할까.


이 바이러스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무로 변해버리는 재난을 일으켰다. 서울은 봉쇄되었고, 그렇세 9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야기를 끌고가는 여운은 그 때 엄마를 서울에 두고 탈출한 인물. 살아남은 자다. 국립재난대응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광역 방역 기기 '우산'의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받게되어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이 뒤집어진 세상으로 들어간다. 이미 가족을 잃은 인물이자 이모와 함께 피난을 왔으나 이모 역시 안전하지 못한 상태. 오염된 구간을 벗어난다 한들 영원히 살아남은 자로 살 수 없음을 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생의 끝엔 모두가 나무가 되거나 자신의 손으로 방역의 문제를 해결해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느냐가 이야기의 큰 가닥으로 보였다.

재난을 벗어난 자에서 재난을 마주하는 자가 여운이라면 정인은 재난의 현장에서 버티는 자로 분류 할 수 있겠다.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어 나무가 되지 않아 이른바 슈퍼 항체라 할 수 있는 존재. 봉쇄된 서울에서 나무가 되어가는 가족을 돌보는 인물. 위험을 마주하였으나 그 상황속에서 지키고자 하는 바가 큰 인물이다. 외부에서 온 수상한 사람들이 산불을 일으키는 것. 무엇을 채취해가는 것. 나무가 아닌 사람으로서 보이는 존재가 자신 말고도 또 있었는데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위기를 피한것인지 파고들게된다.



📖 "웃는 이유요?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예요. 편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로 몰랐으면 좋겠거든요."

...

"아이가 웃지 않잖아요? 그러면 다들 이유를 캐물어요. 서울에서 엄마만 두고 도망쳐 나온 아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부턴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며 가까이 오지 않거나 너무 가까이 오거든요. 그러다 점점 멀어져 가죠. 반대로 웃고 있으면 씩씩하다고, 기특하다고 칭찬하고는 곧장 제자리로 돌아가요. 그 정도 거리가 딱 좋아요. 그래서 나는 웃는 게 좋아요."

온통 나무인 공간에서 자신의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운은 웃는다.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입꼬리는 올라간다. 그건 재난 현장을 취재하라 간 카메라 앞의 아이들과 닮아있다. 현장 보도와 실태 보고를 위해 간 이들은 이 상황을 여운의 말처럼 똑같이 전달한다. 슬프지만 꿋꿋하게 버텨내는 아이들이라 하거나, 재난이나 내란, 전쟁 등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해맑고 그들의 동심을 지켜주어야 한다며 후원의 콜을 종용하는 내레이션까지. 리퀘스트 교양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봐온 포멧이다. 그래서 여운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고 짠해진다. 이 모든 것이 학습된 행복이고 겉으로 두껍게 덧 씌워진 자기방어로 보였기 때문이다.



📖 오늘 당신의 역할은 관객이자 수용자입니다. 발아래 두고 휘두르던 당신의 인간들처럼, 지켜보고 수긍하고 따르는 역할에만 충실하세요. 그게 이곳에서 당신들의 존재 가치입니다. 5억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결정권이 없는 부류. 그리고 사람의 목숨이 인질로 잡힌 상황. 의도된 신형 변종 바이러스를 이용한 2차 팬데믹 조장. 의도한 전 지구적 인구 감소&감염의 계획. 당하는 쪽에서는 인질이라 울부짖고, 행하는 쪽에서는 인류에 봉사를 한다는 목적이 있다며 남은 소수의 인물이 존재가치가 더 높아지고 희소성을 띄게 된다는 달콤한 유혹을 한다. 다수와 소수의 대립, 의견이 분리된 상황에서 하나를 무조건 결정하게 될 텐데, 그게 '남의 이야기'라면 쉽게 결정이 되고,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면 날 선 반응을 하며 둘 중 하나의 선택도 못하는 꼴을 보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

어떻게는 외형적이든 내형적이든 수긍할 만한 조건만 아니면 더 득이되는 삶을 살 수 있을거라는 달콤한 이야기들까지. 당장은 티가 안 날지도 모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결정에 대한 반응은 분노-무감각-수긍의 과정으로 그저그런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렇게 어떤 미친놈처럼 같이 물들고 같이 썩어가는게 사람이라는 생각에 외형은 인간이라 한들 내실은 비인간이나 마찬가지임을 느끼며 정인과 미호가 하는 당연한 결정에 믿고 이야길 파고들게 된다.


📖 그래요. 현상 유지와 감염 확대의 선택. 구 년이 흘렀으니 당신이 아홉 번째입니다. 다수결이야. 당신 선택은 앞선 여덟명의 의견에 덧붙여지는 한 표일 뿐이니 마음 편히 선택해 봐요. 증명해 봐요. 이 세계가 이대로 남을 가치가 있는지. 공교롭게도 지금까지의 스코어는 4 대 4입니다만.

도시에 방벽이 세워지고, 감염 변이체를 일소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들이 연구되기 시작한 첫 걸음. 우리도 그 기대감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의 시작을 맛본 경험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이들은 애썼고, 구조와 치료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격리와 방치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특정 집단에게는 우선적 도움도 있었음에 선택적 구제가 인간들끼리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다.

참 많이 닮아있는 세상의 변화였다. 잃은 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도 얻은자는 있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득을 보는 자들. 운이 좋다고 하기엔 그 대립된 상황과 공평하지 못한 조건이 씁쓸할 뿐이다. 역시나 대중적이라 할 만큼, 흔하다고 할 만큼 보편적인 이들은 그 가치가 흔하다고 여기는 일반적 오류로 인해 묵살당하게 된다. 그게 서울에서 머물다 뜻하지 않게 나무가 된 이들이라 하겠다. 소수라 생각한 사람들이 특정계층이 되기도하고, 보편적인 것들이 그럴싸한 합리화를 통해 가장 만만한 집단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공감하고자 한다면 보편적인 다수에서 바라보는게 익숙할 것이다. 우린 결국 다 그런 사람들이고 다 같이 애틋하며 평범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출판사 서평단을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고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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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사냥
차인표 지음 / 해결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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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뉴 판타지 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출판사의 카드 뉴스 답게 판타지 임에도 구전으로 전해왔을 법한 전래동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OTT를 통해 단편 3부작 시리즈로(총 8장의 단락이 구분되어 있으나 3부작으로 나눠도 될 듯 했다) 나와도 제법 인기 있을법한 환상소설. 시대극을 보는 듯한 정확한 시대와 지역명, 그리고 그 시절 다들 그리했을 듯한 주인공들의 삶의 억척스러움. 바닷가 마을에 으레 있었을 법한 일인냥 오래된 서책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 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기 1902년, 강원도 통천의 어느 외딴 섬. 어부 박덕무와 아내 임씨, 그리고 그들의 아이 영실과 영득의 이야기다. 일본 상인들의 강치 대학살에 대한 사건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거기서 나온 공영감의 존재. 덕무와 공영감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주거니 받거니 이어진다. 그리고, 공영감의 과거와 현재의 시간으로 또 한번 갈래를 뻗게된다. 어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내 임씨, 그리고 아내를 빼다 박은 영실은 병세 마저 닮아 숨 쉬기가 어렵다. 손 써보기도 어려운 영실의 병세에 근심이 많던 덕무에게 공영감이 찾아온다. 영실의 병세를 잠깐이나마 호전시키게 했던 그 것으로 인해 덕무를 인어 사냥에 앞장서도록 만든다. 사람의 행색을 한 물고기. 그걸 잡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 영생을 기대 할 수 있다하지만 만물을 꿰뚫고 있던 서씨 할머니는 반대로 사람답게 살려면 먹지 마라고 단호하게 이야길 한다. 딸아이가 이걸 먹어야 숨도 편히 쉬고 아프지 않을 텐데, 영실 또한 동무같은 어린 인어들을 절대로 먹지 않고 놓아주려 한다. 인어를 잡아 먹어야만 천 년을 더 살 수 있을거라며 눈이 뒤집힌 공영감. 영실영득같은 어린 남매 인어 앞에서 이게 잘 하는 일인지, 누군가의 귀한 생명을 해하고 제 새끼를 위하는 것이 진짜 부정(父情)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뇌는 영실과 영득의 행동을 통해 마음을 굳힌다.



📖운명이 바뀌었을까? 그들은 친구가 되어 사이좋게 공생하게 되었을까? 불행하게도 그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극의 표정은 각각 다를지언정 모두 '욕망'이라는 한 얼굴에서 나왔으니까. 적당한 온도에선 물이 끓지 않듯, 적당하다면 그건 욕망이 아니니까.

과거 공랑이 발견했던 인어의 존재. 시작은 우연이었고 만남에서 있어서는 동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서씨 할머니를 통해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후에는 바라보는 눈빛과 대하는 태도는 숨길 수 없다. 어차피 같은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얻어지는 이득을 생각하면 연을 이어가는 것 보다 끊어낸 후 이득을 취하는게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람이 그렇다. 발치에 채이는 가난과 다급함은 자비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적당 할 수도 없고, 상냥 할 수도 없다. 그게 사람을 더 극한에 모는 느낌이다. 어린 공랑이든 딸이 아픈 덕무든 다 그런 이유였다.



📖각자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있었고 그 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소망이 선을 넘으면 욕망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소망은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지만 욕망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욕망의 얼굴은 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으로 변할지 알지 못했다.

소망이 욕망으로 넘어가는 과정. 다들 처음엔 그럴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래도 되는거구나'라는 마음을 먹고, '나만 그러한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얹으면서 점점 죄책감이 사라지는 눈빛을을 글로 느낄 수 있었다.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다보니 되려 죄의식도 나눠 가질 수 있을거라는 막연함이 보였다. 인어기름이 정말 만병을 고치고 장수를 약속한다는 증거도 없으면서 너도나도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손을 보태고 훈수를 두는 모습. 이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욕망에 눈이 먼 행동들이었다. 몸에 좋다하면 양잿물도 마시려하는 사람들의 속내. 각자가 쥐고 있던 삶의 고단함들을 숨기기에 바빴던 이들이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절망 배틀이라고 하는 듯 누가 더 고단한 삶이고, 누가 더 절실한 이유가 되는지를 풀어놓는데 나 역시 이 마을의 사람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다. 결국 나도 그저그런 평범하고 똑같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금방 헤어질 것에 정을 주면 안 되고, 금방 죽일 것에 이름을 지어 불러 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면 사람처럼 대하게 되고, 사람처럼 대하면 잡아먹을 수 없기에 그냥 인어 새끼들, 혹은 물고기들이라고 부르라고 강권했어야 했다.

아이들은 외딴 섬에서 동무 하나 없이 서로만 의지하며 지냈던 남매다. 그래서 물고기들이랑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나무랑도 이야기 하던 아이들이니 또래같기도했고, 같은 처지의 남매로 보이는 인어들이 얼마나 반갑고 친근했을까를 떠올리면 측은해지기도 한다. 덕무가 아이들에게 강권한들 맑은 아이들은 절대 그러하지 못했을 터.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하여도 남매들은 분명 인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거라 보여졌다. 이 마을에 몇 안되는 순수한 아이들. 그 마음이 후반부의 이야기를 끌고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악행을 하던 이들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도록 만드는 비교의 대상이기도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볼 수 없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살고 싶어도 먹으면 안 되는 게 있어요."

이건 영실의 말이기도 했지만, 공영감이 인어기름을 먹기 전 공랑의 시절 일 때 서씨 할머니가 해준 말들도 섞여있었다. 생명에 대한 도의를 져 버리지 말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과 욕심과 욕망으로 눈이 멀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을 하라는 단호한 문장이기도 했다.

바다에 사는 한낱 미물이라는 점. 그리고 사람의 행색을 하였다 한들 온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너는 이걸 먹어야 산다는 걸로 선택지가 없음을 말하는 아비의 눈에서 살기를 느낀 듯 했다. 일단 제 집구석부터 챙겨야 했던 덕무. 똑같은 일을 번복하기 싫은 아비의 마음이었다. 제대로 손 써보지 못한 아내 임씨에 대한 미안함과 똑같은 병에 걸려 얼마 못 살듯한 영실을 두고보지 못하는 애끓는 부정. 덕무의 마음은 제 간이라도 빼어주고 받아와도 모자란 인어기름이니 영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당연해보였다.

각자가 쥐고있는 애환을 모르는게 아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씁쓸한 것. 제 품안의 아이가 사그러드는게 보이니 사리분별을 할 겨를이 없어보이는 다급함까지. 부추기는 공영감이 미운 것 보다 어쩔 수없는 여건과 부녀간의 애틋하면서도 애절한 관계 형성 이유에 마음이 아려왔다.

늘어질라치면 과거 회상을 통해 장면의 반전을 주어 열심히 독자를 끌고간다. 환상소설이며 한국형판타지로 분류되어지는 이야기는 한국형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권선징악으로 끝이 난다. 이래야 한국적지 않겠냐는 뉘앙스라 어찌보면 뻔하다 싶겠지만 그래도 이 뻔함과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됨에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느껴지기도 한다.

공랑이기도 했고, 천 여년 후 공영감은 인어기름을 먹은 자였다. 욕망에 먹힌 인물로 과거와 현재에서 악역을 자처하며 그 시대마다 주변인들을 현혹하게 만드는 인물로 나온다. 서씨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면 순수했던 소년 공랑에서 끝이 났었을 테지만, 욕심이 얹어진 인어기름을 마신 후 양심과 영생을 맞바꾸게 된다. 몇 번이고 생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주변인들은 죽고 혼자가 되고, 다시 생은 이어지고 또 다시 자신을 대신하여 인어를 찾을 인물을 물색하며 삶이 끊어지기 전에 또 다시 영생을 바라는 삶. 그로한 불로장생의 삶이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사람의 행색을 하고 있기에 마음이가고, 똑같은 조건의 상을 하고 있어 더 측은해지는 것. 그래서 쉽게 죽일 수 없었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단 한낱 미물에도 마음을 쓰며 인간의 탐욕만을 위해 자신 이외의 것들에 해를 가하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 없이 당연스러운 삶은 없다는 걸 더 알려주고 싶은 내용으로 보였다. 이야기의 초반엔 강치가 울었고, 중반부터는 인어어 뿐만 아니라, 영실과 영득이 울었다. 후반부의 공영감이 울 수 밖에 없던 그 장면과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욕심의 끝은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시사하는 걸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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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태수 지음 / 페이지2(page2)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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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 권의 책을 낸 에세이스트 태수님의 2년만의 신작이라 한다. 나는 전작들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가장 최근에 낸 이 책이 처음 접하는 글이라는 것. 행복은 불행해지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일러주는 글 모음. 요란한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을 살아가는 튼튼하고 단단한 태도를 담아낸 글. 그리고 별다른 나쁜 일이 없는 하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에서 이 사람은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알고있음을 느꼈다.


나는 종종 블로그 이웃들이나 커뮤니티에 끝맺음 문장을 무탈한하고 무난한 하루가 되길 바란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곤 한다. 대단하고도 특별한 하루가 되길 기원하기보단 감정의 큰 기복 없이 무난하고 무던한 하루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거창하게 오늘의 하루를 표현하기보단 무어라 형용 할 순 없겠지만 잠들기 전 오늘을 떠올릴 때 미간찌푸리거나 근심으로 잠못드는 날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섬세한 사람일수록 번아웃이 자주 온다_ '이제부터라도 나만 생각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잘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지금처럼 살아라. 그렇게 살되 어떤 감정조차 책임질 수 없을 만큼 힘든 날, 마음속이 온통 타인의 감정으로 가득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 부러 나밖에 없는 공간으로 도망가자. 그 조용한 공간에서 자신에게도 이렇게 말할 기회를 주자.

"나 안 괜찮아." 가끔은 남에게 줬던 섬세함을 나에게도 허락하자.

섬세한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사사로운 것에도 신경이 쓰이고 계속 눈길이 가는 사람이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나를 대문자 T형 인간이라 하지만 그건 사회화가 잘 이뤄져 상황에 따라 성향분리가 가능하기에 그리 느끼는게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겨울 냄새, 봄 냄새와 같은 계절의 향을 잘 알아차리며 노을이 지는 순간 학종이처럼 옅게 퍼지는 다채로운 색의 빛깔을 애정하는 사람이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가로수 나뭇잎의 반짝임 정도를 좋아하며 회색 겨울, 분홍빛 봄, 파란 여름, 노란 가을 사계절을 기다리다보니 감정의 안테나가 커도 너무 크다. 성향을 갈아 엎기에는 대쪽같이 고집한 세월이 너무 길다. 위에 언급했던 문장처럼 어차피 잘될 것 같지도 않거든. 그래서 그냥 이대로 살되 번아웃이 오더라도 계절의 향이나 눈 앞에 보여지는 다른 것들에 빨리 시선을 돌려 그러한 감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이 또한 학습을 해야하고 실패를 반복하겠다만 이왕 갖고있는 성향이라면 빨리 전환하는 과정도 학습되길 바랄 뿐이다.


📖불행은 결딜 수 있지만 '너보다' 불행한 건 싫어_ 청년들이 얻어야 했던 건 무엇일까. 행복일까. 단언컨데 아니었다. 이들은 단순히 행복한 삶이 아니라 '너보다' '걔보다', 혹은 '그보다' 행복한 삶을 원했다. 우위가 없는 행복은 이들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그건 증명할 수 없으니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작품을 진짜 집중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다은쌤에게 마음을 많이 주었다. 더 활기찬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았고, 그저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무던히 제 자리를 찾아가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게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가 되지 않더라도 가장 현실적인 엔딩이라는 생각에 더 밝아지거나 더 활기찬 큰 변화 없이 원래 다은쌤이 되어주길 바라게되더라.

마음을 돌볼 겨를이 없는 시대다. 나의 윗세대가 들으면 덜 힘들어서 그딴 생각을 하거나 복에 겨워서 투정을 부린다 할 지 모른다. 나도 그런 소릴 들어봤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세대와 내 세상이 다르고, 내 세상과 나보다 동생뻘인 청년들의 시간은 또 다르다. 그래서 그런가 체감하는 불행의 깊이도 다르며 실감하는 좌절의 넓이도 다르다. 그래서 섣부르게 가늠하지 않으려 한다. 견주어 보기만 하지 그걸 따져가며 밝혀내는 비교는 안 하려 애쓰게된다. SNS상의 그 반짝이는 삶에 현혹되어 나만 이따위로 사는가에 대한 수렁을 만들지 않으려한다. 그래봤자 내가 파 놓은 구덩이로 다이빙 하는 겪이고, 그들의 삶과 내 세상은 엄연히 다른 프레임이라는 걸 이제는 자각한 나이라서 그나마 다행임을 느낀다.


📖꾸준함이라는 이름의 재능_ 세상에는 메달이 없는 레이스가 더 많다. 누군가는 그딴 걸 왜 하냐고 묻고 또 누군가는 그래서 뭐가 남았냐고 따진다. 매 순간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이기에 우린 점점 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꾸준함을 미련함이라 비웃으며 묻는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남는 게 뭔데?" 정작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너인데.

미련해서 꾸준한 게 아니라 흔들이지 않아서 꾸준할 수 있다.

저자의 아내 이야기로 시작되는 내용.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픈 사람, 그리고 35년 인생에 지각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 남들은 잘만 한다는 흔한 핑계를 대지 않는 사람. 너무 대쪽같아서 때때로 얄밉기도 했다는 사람. 그러나 그 대쪽같음이 쉽게 할 수 없는 멋드러진 마음이라는 걸 잘 안다.

꾸준하고 진득한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이 항상 모자랐다. 아프면 쉬어야하고, 힘들면 잠깐 멈춰야했고, 마음이 아프면 눈물 차오르기 전에 흘려버리며 비워내어야 하는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는 꾸준한 단단함이 매번 고팠던 무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곧은 사람이 부럽다. 매일 아침 회사 가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며 같은 회사를 10년 넘게 출근 하는 것도 꾸준함이라 하면 나도 해당이 될까? 발에 채일만한 자그마한 일들에도 뭐 하다보면 되겠지싶은 마음으로 무딘 감각인냥 해나가는 것들이 꾸준함이라 한다면 일정량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보련다. 이 꾸준함은 매번 채워도 부족하게 느껴지지만 뭐, 언젠가는 찰랑찰랑 채워지는 날이 오겠지. 이런 마음으로 살면 단단헤 지겠지. 끼워맞추기 나름인거 알지만 나도 그러한 재능이 있다고 믿어보고 싶어진다.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돼_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돼."

다 알겠지만 우리 같은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결승점이 눈앞에 보여야 그나마 뛴다. 풀코스 마라톤은 애초에 뛰려야 뛸 수가 없다. 우리에게 도전이랑 다른 말로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끝을 알아야만 시작하게되는 굼뜬 육체. 나이가 들 수록, 사회에 동화되어 갈 수록 눈알 굴려가며 끝을 가늠하고 효용성을 따지고 발을 들여놓을지 더 멀찍히 물러설지를 생각한다. 늙어 갈 수록 재는게 많다. 실패하기까지의 과정이 두렵고, 그 시간이 아까워지는 생각의 노화. 애써가며 달렸다가 주저앉아버리면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현상유지만이 손해 없는 삶이라 단정짓는 들러붙은 생각. 안 하면 기회도 주어지지 않지만 생각도 트이지 못하더라. 팔이 뻗어지는 딱 거기까지의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삶. 안전하되 재미없는 세상이 된다. 굼뜬 마음과 육체를 좀 일으켜 보기로 한다. 안전하다 여기던 사정거리를 넘는다고 세상이 뒤집힐 일은 없으니까 궁금해했던 너머의 삶에 눈요기부터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로 살살 꿰어본다.



📖내 인생이 잘되길 바라는 건 의외로 나밖에 없다_ 도전이나 열정, 그딴 멋진 단어들 때문이 아니었다. 씨발, 내가 해낸다. S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세상에 덤볐다. 그 안에 청춘 드라마는 없었다.

맞다. 내가 잘되길 바라는건 나를 낳아준 부모밖에 없겠다만 그거야 당신들 울타리 안에 살던 미성년자일 때나 가능한 관심이었다. 성인이되고 제 밥벌이 하는 놈으로 키워놓고나면 제 인생 지가 사는거지로 관여도가 줄어든다. 그 즈음부터 가족이라 엮여었던 사람들에게 기대와 관심, 응원을 바라지 않게된다. 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게 아니라 굴곡없이 저대로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하는 마음과 함께 고생길로 들어가거나 되돌아가는 꼴을 보는 것 마저도 자신들의 감정 소모라 훅 줄어든 마음의 참견이라 생각하면 여러모로 마음이 덜 아린다. 그러니 주변에서 하는 격려와 기대하는 눈빛보다 자신이 겪어낸 뿌듯한 결말에 집중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그게 더 탄탄한 믿을 구석이라는 것에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_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짜릿함보다는 안도감에, 특별함보단 일상적임에 더 가깝다. 아무 탈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아픈 곳 없이 가족과 통화할 수 있어서, 희망은 없어도 절말도 없이 내일을 또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내 삶이다. 누군가는 그토록 조용한 인생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냐고 묻겠지만, 물론.

조용함은 웃을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울 일이 없는 상태니까. 기쁜 일이 없는 하루가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하루니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이 조용한 하루들은

우리 인생의 공백이 아닌, 여백이니까.

무탈하고도 무던한 하루를 바란다. 굴곡이 큰 행복과 허한 마음의 폭 보단 잔잔하지만 익숙한 일상에 마음이 덜 쓰인다. 그게 효율이 좋고 지치지 않고 장거리를 뛸 만한 페이스를 만들어준다. 삶의 끝이 어디서 마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는 더 살거 같은 장기전으로 보여지니 잔잔함을 택한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터득해버린 습관같은 것으로 여기고싶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생각이 과하고 안해도 될 걱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가오지도 않은 불행을 급하게 떠먹고 겁을 내며 주저하는 이 마음이 천성이라 생각하며 바꾸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30년 넘게 산 놈이 뭘 더 바라겠나 싶은거지.



내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의 온화함 덕분에 나는 좀 더 단단하고 때론 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가 시간이 될 때 아내를 데리러 가는 이야기에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싶어 공감과 함께 나도 똑같이 그런 사람이 되고자 삶의 목적을 모아본다. 거리의 문제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를 떠나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의 수고스러운 마음을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그를 데리러 가는 과정이 므슨 대수겠냐 하는 심리.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어떠한 이유를 만들지 않으며 으레 당연하게 향하는 마음. 이것저것 잴 필요 없는 관계에 대한 믿음이 예쁘고 나도 닮아가고싶어짐을 느낀다. 어른의 행복은 그런거다. 계속 의심하게 되며 확신이 서지 않는 삶 속에서 단단하고 묵직한 마음으로 살 이유를 챙겨보는 것. 몸이 고단하다 한들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며 뿌듯함이 더 크게 부풀려지는 과정. 그런 마음들만 촘촘하게 채워진다면 이번 생도 제법 살만한 이유가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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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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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급류와 같다.

왈칵 밀려와 어찌 하지 못할 정도로 흠뻑 젖어들기도하고, 또 한 편으로는 휘몰아치며 물이 밀려 나가 남겨진 자의 공허함도 느끼게되는 물의 흐름은 사랑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게 사랑이었고, 이 책의 주인공인 도담과 해솔이 느끼는 감정으로 보였다. 헌데 이 책 표지가 주는 깊은 무드에 비해 내가 보는 이들의 사랑은 급류에 휘말려 매번 자맥질하느라 버거운 존재로 느껴졌다. 어떤 급류가 휘감더라도 우리는 사랑이며, 계속 사랑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 말하려하는 두 남녀.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면서 사랑에 빠진 이유도, 헤어지는 이유도, 다시 만나게되며 서로를 찾게되는 이유마저 결국 너라서 그런 거라는 걸 보며 그게 된다고?의 물음을 가지게 만든다. 잔잔하고 고요한 사랑을 지향하며, 똑같은 이유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피곤함을 주지만 그로인해 더 애틋하다는 마음에 완벽한 이해를 하긴 어려웠다. 결국, 그러니까 또 언젠 그 이유로 헤어지지 않을까를 예견하게되는 현실주의자 독자가 보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엔딩은 결국 이들은 떨어지기보다 곁에 있으며 모든 급류를 온전히 떠앉더라도 이 사랑을 지키겠다는 글의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픈 엄마, 소방관 아버지 그리고 딸 도담. 소방관으로서 인명구조에 힘쓰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순간을 사랑하는 도담. 그에게 수영도 배우며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사랑을 아버지를 통해 가득 얻어 사는 존재. 어머니와 함께 진평으로 온 해솔. 편모에게만 받던 사랑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는 큰 마음을 도담의 아버지를 통해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가며 그와 동시에 그의 딸인 도담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얻게된다. 도담과 해솔에서 그치면 좋았으련만, 도담의 아버지도 해솔의 어머니도 같은 마음을 받으며 감정을 키워간다. 그게 이 이야기 비극의 정점이다. 가족의 불륜을 목격한 아이들. 그들이 불어난 계곡물의 급류에 휩쓸려 사망을 했고, 목격한 각자의 아이들은 자신의 사랑이 결국 불륜의 끈으로 연결되어있음에 모든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며 애증의 양면을 드러내게된다. 좋아하지만 미워할 수 밖에 없어 자신을 부정하는 과정.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좋아했다며 그 마음마저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찾게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과거가 떠올라 자신과 상대를 상처내는 과정의 반복. 이 감정 변화는 청소년에서 성인이되고, 성인이 된 후 시간이 흘러도 헤어나오지 못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던 타인마저 급류속으로 끌어당겨 자폭하게만든다. 결국 저 둘이 사랑해야만 끝이 나는 이 이야기의 끝. 자신의 상처마저도 보듬어주려했고 기다려주었던 이들의 마음은 모르겠고, 그냥 둘이 붙어있어야만 이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좀 많이 이기적이었던 사랑의 투정.




📖 "우린 애인이 아니라 채무 관계 같아. 서로 빚진 사람들 같다고."

숨겨야 하는 마음이고, 서로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마음의 전달 과정. 해솔에게 못되게 굴어도 해솔은 화를 내지 못한다며 단정짓는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니까 날을 세운 말들로 해솔을 난도질 하지만 해솔은 반박히지 못한다. 혹여라도 같이 날을 세우면 도담이 찔려 도망갈까봐 삼키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애인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마음보다 미안함이 더 커져버린 관계. 그래서 어찌하든 비유맞추는 것에 시선이 얹어진 사이. 장기전은 안될거 같다. 한명이 지치든 한명이 열폭하든 결국 더 크게 어긋날 마음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 다정함에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의지한다는 건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기에. 도담은 더 이상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담은 상대가 호감을 갖고 다가오면 방어기제를 세워 마음의 선긋기를 야멸차게 해버린다. 저도 다정함에 끌렸고, 외로움에 마음 둘 곳이 없어 붕 뜬 상태였음에도 뒷일에 대한 걱정과 그 너머의 관계형성에 겁내며 이대로도 좋다는 듯 마음의 담을 세웠다. 자신은 들락거리지만 상대는 자신에게 못 넘어오도록. 나는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밖에 못 하겠다. 그게 해솔이 느끼는 도담만의 매력이겠다만 멀찍이 물러나 도담, 승주, 해솔, 선화를 보면 배워놓은 사랑의 끝이 그 뿐이고, 해본 사랑의 전달력이 거기까지였던 도담이라 할 지라도 이건 세상에 자신만 불쌍하고 자신만 사랑받지 못한다며 생떼부리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그런 줄 알았다. 해솔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이게 첫사랑에 대한 마음의 정의겠지? 첫사랑은 대부분 좋았던 시절에서 멈췄고, 그래서 더 애틋했으며, 이뤄지지 못한 쉼표같으니 남은 이야기의 마침표를 위해 한없이 미화되어가는 과정의 수순을 보인다.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도담도 해솔이 그리웠으리라. 자신에게 한 없이 다정했고, 잘 보듬어주는 아빠와 연인의 몫까지 두루 해준 존재. 다들 각자의 마음 한 구석에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만 미완성으로 두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지. 도담은 또 그렇게 물어뜯고 할퀴어댄 존재가 또 사무치게 그리워 해솔을 만나게된다. 이걸 사랑의 완성이라 봐야할까 사랑의 이기적인 방식이라 봐야 할까. 그건 독자의 몫이겠지만 해솔의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도담만 놓고 보면 사랑을 갈구하지만 제 입맛에 맞는 사랑을 얻기 까지의 과정이 그리 예뻐보이진 않았다.



📖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랑처럼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이건 한때 끓고 식는 종류의 마음이 아니다. 남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도담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다짐했다. 영원히 살 것처럼이 아니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해솔을 사랑하겠다고. 두 사람에게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해솔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도담은 해솔에 대한 마음은 연애 감정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할머니의 사랑과 비슷하다며 그 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러한 큰 마음이라며 자신의 허한 감정을 오랜시간 달래주고 기다려준 승주에게 작별을 고한다. 감정의 극과 극을 다 맛본 사랑의 관계. 그래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해볼만한 싸움이라는듯 다시는 해솔과 헤어지지 않겠다며 지금의 사랑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하다못해 자신은 쿨한듯 깔끔한 안녕을 부탁한다. 어느 사랑에 쿨함과 담백함이 존재했던가? 그거야 오롯이 그러한 통보를 하는 자가 느끼는 환상같은 것이지. 자신은 쿨해보일거라며, 구질구질 하지 않겠다며 깔끔한 안녕을 했다 생각하지. 지금껏 야금야금 받아먹기만 했던 마음이니 훅 하고 뱉어버리면 그만이다 싶은 가벼운 사랑처럼 말하는 모습에 도담의 방식이 미워진다.(아니 계속 미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

그때 깨달았어. 사랑한다는 말은 과거형은 힘이 없고 언제나 현재형이어야 한다는 걸.

몇번의 고난이 반복된 사랑이다. 각자의 부모로 인해 어린시절 꺾여버린 마음. 마음을 외면한 채 성인으로 살다가 마주한 둘.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다가도 보고있으면 각자의 부모가 떠올라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감정. 좋지만 마냥 좋을 수 없는 서사. 그래서 더 긁어내고 상처를 만들어 헤어진다. 또 몇년이 흘러 우연히 소식을 알게되고 확고한 마음이라며 영영 떨어질 일 없을 거라는 듯 애틋한 마음으로 모든 이유를 사랑이라는 말로 덮어버린다. 언제나 그리고 꾸준히, 앞으로도 사랑한다는 말로 상대를 예쁘게 보듬을거라는 둘의 마음.

나는 어지간하면 이야기 속 사랑을 응원하는 편이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처럼 언제나 사랑이 무사하길 바라는 사람이라 그 마음들이 변치 않고 진득하길 바라는 사랑 평온주의자로서 도담과 해솔은 이후로도 헤어지지 않고 잘 붙어 있을까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같은 이유로 몇번이고 돌아선 사람들인데,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있을까? 운명적 사랑이라 했다. 헌데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교류에서 그들의 부모나 자식들인 도담과 해솔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내가 있던 도담의 부. 승주가 있음에도 해솔에게 갈 거라는 말로 사랑을 끝맺으려 하는 도담. 결혼의 유무를 떠나서 자신들은 진지하게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똑같은 환승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풋 사랑에서 마무리가 될 것인지, 결국 부모를 닮아버린 사랑의 환승으로 저들만 애틋한 로맨스라 봐야 될 것인지는 각자가 추구하는 사랑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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