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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나 역시 안규철님을 안 것이 BTS의 RM님 덕분이었다. 2021년이었지?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실 즈음 전시장에 온 남준님. 전시에 맞춰 사물의 뒷모습을 출간한 상태였고, 남준청년이 책에 사인을 해달라 요청을 했었고, 그 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게시된 사진으로 인해 기존 부수의 10배 정도를 더 찍고 번역출판을 했다는 일화. 예술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아이돌 덕에 나도 찾아보게된 작가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들을 변형하여 관객의 질문을 유도하는 사물을 만드는 사람.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일상의 물건들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를 둘러싸도 있는 세상의 모습이 있기에 보는 이들에게 새롭게 발견하게 하려는 작업을 하는 사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적인 역할을 삶과 세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진 활동가의 글이다.
일과 공부, 사람과 사물에 대한 57편의 깊은 사유들과 스케치. 전작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사물의 뒷모습'에 이어진 3부작 연작 에세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앞의 2부작에 담아낸 고민들을 더 깊이 있게 천착함함과 동시에 퇴직 이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일상에 대한 솔직한 사유를 담담하게 적어 두었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각각의 단락에는 그 그림자를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본 형상을 이루고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사물과 저자 자신이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진짜 이야기를 짤막하니 담아내었다. 각각의 형상이 알려주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다. 이 또한 사물 너머의 그림자 일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또 나름의 이야기를 유추해보기도 하고,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을 틔워주는 느낌을 받게한다.

📖감자_ 빛이 없으니 화려한 색채도 필요 없고, 누구에게 보일 것이 아니니 반듯한 모양도 필요 없다. 각자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그저 미래를 기약하며 단단히 안으로 뭉쳐진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식물이 결실을 맺는 것에 대해 사과와 감자를 두고 상반된 표현법을 알려준다. 시작점은 햇빛과 흙에서 양분을 끌어모아 살아가는 삶인 것은 동일하나 지상으로 드러나며 약탈자의 간섭이 있음에도 그 대가로 삶을 이어가는 사과의 삶, 약탈자를 피해 지하로 내려가 햇빛도 바람도 새소리도 없는 어둡고 축축한 흙 속에서 양분을 저장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감자의 삶을 덧붙여 극명하게 설명한다. 안으로 파고 든다고해서 멈춰 있는 것도 아니며, 표면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여 소흘함이 있는 것이 아닌 무던한 생장. 그걸 보고 코로나 시대에 집 안에 갖혀있던 자신을 투영한다. 칩거했던 삶이 그것의 생장과 다르지 않은 환경이니 애써가며 자라던 노력을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 또한 그리 한다면 제법 괜찮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하는 마음. 그저 자라는 것에 대해 무던하게만 인식하던 사람에게 조건에 대한 투정 없이 나만 무던히 애쓰면 될 것이라는 해탈의 한마디를 건네는 감자 이야기.

📖나무_ 머무는 사람에게는 의자가 필요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노가 필요하다. 머물기를 원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는 자, 그래서 온전히 머물지도,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자의 모습이 여기 있다.
목재상에 빼곡하게 쌓여있던 나무들이 머물게 될 장소와 시간과 세월을 생각해본다. 시작은 땅을 딛고 꼿꼿했던 나무였을테고, 누군가의 손길과 정성을 통해 모습이 변하고, 용도가 달라지며, 그 형상으로 살아갈 시간까지 가늠 할 수 없도록 다양해질 이후의 쓰임들. 이미 나무가 뽑히고 다양한 모양으로 재단이 되어지니 생(生)이라 할 순 없겠지만 살아가는 생이라 한정짓기 어려운 그 너머의 다양한 삶의 연속성들. 머물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며 변화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나룻배가 되고, 수레가 되기도하며,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다가, 천 길 땅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검은 석탄으로서의 제법 많은 삶도 살아갈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붙겠지. 멈춰있는 것에 가득한 평안을 바래선 안된 다는 가장 큰 조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_ 나의 젊은 날은 남들처럼 예와 아니오를 가르느라 다 지나가버렸다. 나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
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진짜 이야기. 파울 첼란의 '그대도 말하라'라는 시에서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말을 하라. 그러나 그 말에서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라는 문장.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었던,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뼈아프게 다가온 저자의 시절들. 그는 자신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음에 아쉬워했으나 독자로서 바라볼 때엔 문장을 통해 자각하며 자신의 삶에 빗대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새겨보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서 갑작스레 삶의 방식을 바꾸라 종용하는 이도 없을텐데 반성하고 고치려 애쓰는 마음을 보면 여전히 그가 사유하는 모든 것은 다른이들보다 좀 더 긴 청춘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왼발과 오른발_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는 이런 분업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불확실한 미래로 발을 내딛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일을 할 때 나의 왼발은 무엇이고 오른발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딛는가. 이것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할 만한 전진인가. 이 모험을 감당할 만큼 내가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는가.
생각해보면 의식해서 숨을 쉬고, 의식해서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해가며 걷지 않는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우며, 으레 당연한 일 인 것 처럼 행하게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걸 매번 자각하며 예의주시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모든 행위에는 영원이 없으니 말이다. 숨쉬는 것과 걸어 나아가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목적을 갖고 노력이라는 마음을 쏟아야 하는 거라면 오죽할까.
한 발은 땅을 딛고있고, 다른 한 발은 허공에 떠 있는 불안함. 그건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도 그러하고, 낯선 여건에 떨어진 어른도 동일한 아찔함을 얻게된다. 그렇다고 영영 한 쪽 발만 띄워 둘 수도 없다. 움직여야 다른 발이 평온을 찾고 또 다른 발은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머물기만 하면 매번 똑같고 지루하니까, 그 고루한 삶보다 자분자분 거리게되지만 조금씩 스텝을 밟아 나가는 삶에 재미를 붙여보면 좋겠다.

📖짧은 만남, 긴 이별_ 외로움에 대한 내성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이다. 그가 보여준 삶이 그렇고, 또 나를 일찌감치 떠나보냄으로써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운 그의 결정이 또한 그렇다. 내 속에는 나의 아버지가 그대로 살아 계신다.
비단 외로움 뿐이겠는가. 저자 자체도 그러하고, 그를 비추고 있는 빛 뒤에 자리잡은 그림자 마저도 아버지가 남겨둔 생의 일부이기도 하다.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다고 닮지 않거나 사랑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득히 애쓰며 풀어냈을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내 속에 나의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있다고 여기는 걸로 보였다. 당신이 애써왔을 마음을 아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지남에도 애틋해지는게 아닐지.
사물을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들. 일반적으로는 그것에 대한 쓰임새나 외형에 대한 직관적인 것들로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저자는 자신의 상황에 투영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이 자라왔을 환경과 버텨왔을 시간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유하다'에 대한 정확한 예시를 마련해 주었고, 두루 살핀다는 것, 부러 미사여구만을 늘어뜨려 허울만 좋은 껍데기를 씌우지 않는 방식을 알려주는 이야기. 그래서 더 다양해질 사물에 대한 사유와 그림이야기가 기다려지고, 닮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