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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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고독과 축복의 상반된 단어를 한 줄에 나열하여 촘촘하게 짜여진 삶에서 한 줄기의 빛과 기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보였다. 그래서 읽고싶게 만들었다. 나는 육아와는 별개의 삶이고, 매년 무얼 이루어야겠다는 성취에 대한 욕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계속 바뀌어가는 역할과 점차 줄어드는 존재의 집중도. 엄마로서의 비중이 늘어남과 동시에 달라진 시야.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두었다. 나 / 개인 / 주체 / 자립에 대한 사유는 물론이고 결혼 / 임신 /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변해가는 환경과 그에 맞춰 바뀌어야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적어두었다. 저자의 시간은 촘촘하게 채워져있고 근 5년간의 세상은 누구보다 바빴고, 다각화를 이루었음을 느꼈다. 내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매번 낯설었고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멀리하기보단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익숙해지려했고, 맞춰보는 삶을 살게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안정감은 더욱 두터워졌고, 행복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진 걸 글의 온도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기운에 안주하며 좀 편히 살아도 될지, 내가 겪어낼 생의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행복과 걱정을 차례차례 끼워넣어 두었다. 제법 괜찮은 삶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같이 나눠보면 좋겠다. 그리고 무수한 걱정과 근심 속 고독의 문에 막 입성한 나의 절친. 출산한지 갓 한달된 나의 그녀에게도 이 책을 전달해보고싶어졌다.



📖 아이가 둘이 되면서 나 자신을 돌보고 키울 시간은 당연하게도 줄었다. 뚜렷한 직장이 없는 내게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나의 밝은 미래 또한 수축하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생산성 없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 가치를 조금씩 갉아먹고 나는 영영 소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 그리고 긴 텀을 두지 않는 두 번의 출산. 남편의 직장에 맞춰 사는 지역마저 옮겨간다. 본인의 커리어는 고이 접어두어 일단 아쉬움의 후미진 곳에 밀어넣어두었다. 그렇다보니 그렇게 활동적이고 바삐살던 생산적인 인간에서 타인의 노고를 무전취식하는 자로 스스로를 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산성 없는 하루를 살고, 소비만 할 뿐 무언가를 위해 애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건 경력단절이든 잠시 육아휴직을 하든 똑같이 느끼는 양육자의 조급함이었다. 나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동료는 물론이고, 친구, 형제들의 육아휴직과 경력단절을 지켜본 입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얽힌 감정을 많이 학습해와 비슷한 경험이라도 한듯 공감을 하게되었고 저자의 쪼그라든 마음이 반듯하게 펴질 이후를 바라게되더라.

나의 어머니 시절은 당연히 저자의 나이 즈음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다. 이른바 독박육아가 당연했고, 그렇게 애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엄마로서의 인생 퀘스트라도 되는 듯 간주되기도했다. 이름을 불리우는 것 보다 OO엄마로 불리우는게 당연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도 그녀들은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많은 갈등을 혼자 버텨냈을 것이다. 지금 시대의 그녀들만 하는 잡생각이라 치부하지 않길 바란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도 나오는데 '결혼이란, 갖은 상황과 갈등을 조율하고 서로를 부양할 의무를 떠안으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뒤로하고 도박같은 선택을 감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로 속 시원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이 도박같은 선택, 이 얄궂은 인생의 원치않는 감정 변화 또한 감수하고 버틸 각오가 되어있으니 이 감정이 나만의 몫이 아님을 공유하는게 중요해보였다.


OO와이프, OO엄마로 살려고 내가 그렇게 12년은 기본이고 반년에 몇천이나 하는 대학 수업도 모두 이수했고, 뽀개기 어렵다는 취업 문턱도 넘어봤는데 그걸 썩히기 너무 아쉽다는거지. 이정도 열심히 산 거였으면 기회는 몇번이고 더 주어져야하고, 발에 채이는 보너스같은 순간도 있어야되지 않겠냐는 듯한 저자의 생각들. 나 역시 공감한다. 1인분의 육아가 아니라 공동 분배의 육아, 일종의 협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기길 바라게된다. 그러자고 결혼했고, 그러자고 같이 사니까 그럴때엔 '같이'의 의미를 서두에 두고 저자의 남편이 말한 '당신이랑 같이 키워야 재밌지'의 재미를 누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면한다.


📖 우리는 가만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 같지만 서로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의 키가 클 동안 우리는 늙어간다. 그리고 늙은 만큼 성장한다. 늙는 것도 크는 거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그동안은 미처 몰랐는데, 겪어보니 분명 늙었다는 것은 컸다는 뜻이다.

아마 저자를 보면 애가 애를 키우고 있다는 소릴들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애 낳고 나면 진짜 어른이라 말하는게 아닐까 싶으면서 하나의 주체적인 생명을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어렴풋이 예견해본다. 나의 부모는 나를 애틋해하고, 당신의 손주들을 사랑에 마지아니한다. 그리고 그 조막만한 녀석이 당신의 아들딸을 힘들게 할 까봐 더욱 크게 보듬어보려 애쓴다. 우리는 누군가에겐 영영 웃자란 녀석들일거고, 내 허리춤에도 못 오는 작은 아이의 세상엔 저자와 남편이 가장 큰 버팀목이고 비빌언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키우고 서로를 애틋해하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임을 느낀다. 결국 당신들이 나를 살리는거지.

'1인분의 육아', '살림노동'이라는 단어들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이 단어들에는 그림자처럼 '엄마'라고 불리우는 양육자가 따라붙는다. 성별을 논하고 싶진 않지만 단독적인 양육이 대부분 이뤄지는 환경이다보니 존재는 그대로를 유지하고있으나 불리워지는 호칭이 바뀌었고, 이전의 세상은 잠식당한 상태가 되어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저마다 고독하는 것과 어떤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 속에서 결국 우리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에 두고 해 볼 만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려 한다.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내 생에는 이 호칭과 역할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살아온 세월이라 그런지 때때로 이 사람들의 무한한 역량이 부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이렇게 빠르게 불태우며 노력하다보면 언제 한번 과부하가 와서 모든게 멈춰 버릴거 같거든. 저자를 보면서 똑같이 빠듯하지만 그럼에도 촘촘히 열심히 살라고, 무언간 해 내어 보라고, 생산적인 활동을 좀 해 보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각자의 방식과 속도와 여건이 있을테니 똑같이 뭘 어찌해보라는 말 대신 이렇게도 살아지고, 이렇게도 그 순간을 무난히 건너 올 수 있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걸 알려주고싶다. 나를 무조건 적으로 불태워 버리지도, 갉아 먹지도, 소멸 시키지도, 희생을 목적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럴 전제로 두며 이 책이 말하는 고독을 잘 채워 축복으로 감아 안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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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 월급사실주의 2025 월급사실주의 3
김동식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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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이야기는 특정한 직군이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집구석 제 식구 갉아먹기도 있었고, 또 어떤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생소한 직군에서 얻게되는 사람에게 질려버리는 세상살이 이기도했다. 역시나 그렇더라. 이러한 월급사실주의 밥벌이 애환은 일이 힘든 것 보다 일 이외의 요소에서 얻어지는 스트레스가 나를 찌른다는 것. 하루가 무사히 끝나길 바라고,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출근하는게 악몽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지만 그 바람보다 더 어려운 내일의 무사안일을 기대하는 삶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그건 마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것.

5월은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를 입사한 달이다. 다들 얼마 못 가서 퇴사 할 거라는 그들의 바람에 못 미쳐 미안하지만 12년 근속이며 이제 13년차로 접어들어보니 역시나 내 사업보다 돈 많은 오너님의 노비가 되는게 맘편하다는걸 다시금 느낀다. 일확천금은 못 누리더라도 제 날짜에 밀리는 법 없이 꼬박꼬박 급여 입금되는게 얼마나 무사한 일인지 직장인들은 공감하겠지? 오늘도 출근했고, 내일도 출근을 할 테니 뇌에 힘 주고 그럼에도 나는 이겨낸다는 마음으로 버텨보려한다.

📖쌀먹_ 현실이든 게임이든 어디서나 무시당하는 쓰레기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뭐? 내가 부럽다고? 김남우는 생각할수록 정재준에게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불꽃이 얹힌 것처럼 속이 끓고 갑갑했다. 다음날 그는 정재준에게 연락해서 쌍욕을 퍼부었다.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뭘 알고 내가 부러워 씨발!"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얻어내고 어려움없이 살고있는 평범한 단계를 자신만 버거워 할 때, 우리는 자격지심을 얻고 자존감을 갈취당한다. 남들 다 하는 직장생활, 남들 다 하는 사회생활, 남들 다 하는 인간관계가 그놈의 직장 하나 때문에 모든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생각한다. 적당한 회사, 적당한 벌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쏠쏠히 챙겨보는 행복이 딱 이거 같은데 자신은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해 쓰레기 같은 존재로 치부한다. 웃긴건 자신의 처지는 비관하되 높아진 눈은 낮출 줄 모른다는 것. 중소기업은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는 가성비 따위를 운운하며 그럴 바엔 한탕주의 처럼 쌀먹을 자처한다. 제 능력에 대한 가치와 자신이 두드릴 직업의 문턱은 손을 뻗어 닿지도 않을 고점을 찍고 있으며, 마주하는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이라며 노력이라는 개선점보다 현실 타박을 하는 쉬운 선택지에 도달한다.

그래서 나는 쌀먹이 짠하다. 평생 저러고 살거 같아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자신은 없고, 모니터 앞에서 일장연설 휘갈기며 쌀먹도 직업이라 운운하는 걸 보면 김남우는 평생 판교는 물론이고 사원증 걸 수 있는 회사 입사는 글러뵌다. 사무실 고인물로 살며 든자리 난자리 바라보는 구석탱이 과장 나부랭이 눈에는 딱 그렇게만 보였다.



📖올바른 크리스마스_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 회사가 시대와 발맞추어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필요한 얼굴. 화살표를 따라 올라갈수록 백인들만 남는 조직도를 감추기 위해 이용되는 얼굴.

이게 사람의 성향이기도 할 테고, 회사에 기여하는 바에 대비하는 기대치의 맞교환 일 수도 있겠는데, 암튼 이렇게 뭘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딴세상 이야기 처럼 들린다. 뭘 바라는거야? 라며 속으로 궁시렁되다보면 저 사람들에게 회사는 동반상생 기회의 땅으로 생각하는건가? 싶은 마음으로 계속 물음을 덧붙이게된다. 조직은 이율타산이 주된 목적이기에 인재 양성과 성장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큰 것에 거는 기대치는 없으며 보다 안정적이며 확신적인 선택지에 힘을 싣게된다. 회사가 필요한 인재는 아무리 인성이 지랄맞고 근태가 거지같아도 쥐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잘 할라 하고, 잘 하고 있는건 기본 옵션이다. 다양성? 글로벌? 미래지향적? 인재육성? 일단 사측도 먹고 살만한 위치에 도달해야 눈에 들어오는 항목들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기대 없이 급여 입금되는 몫 만큼의 1인분만 일하는 걸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주미의 기대하는 눈망울이 안쓰러울 뿐이다.(회사 고인물이라 이런 생각이 드는건지, 10년전의 나라면 주미처럼 살고 있진 않을지를 생각해보며 이 모든건 세월과 연차, 빤히 보이는 사내 정치가 눈에 훤히 보여 도무지 모른척 할 수 없는 시뻘건 동태눈깔이 된 나를 탓해야겠지)



📖아무 사이_ 정말이지 나는 이 일을 잘하고 싶었다. 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건 내게 있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잘 하고 싶은 마음,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잘 하는 사람이라 치켜세워주는 주변의 시선. 이건 어린 아이가 칭찬을 갈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른들이 회사에서 바라는 주변 반응이기도하다. 그래서 잘 하고픈 마음을 담뿍 담아 과하게 애정을 쏟게된다. 취업 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먼지같은 인간이라 여긴 놈이 여기오니 잘한다 해주고, 고맙다 해주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상에 괴리감도 들지만 이 폭닥한 시선이 싫지 않아 더 애를 쓰게 만든다. 쓸모있는 사람으로서의 기능 변경. 직업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만 있는게 아님을 보여주고있다. 잘한다 잘한다 해 주면 더 잘 하려는 마음. 애나 어른이나 그 요건이 충족되는 상황만 달라진 것이지 기대치와 순응치의 포만감 가득한 마음은 결국 똑같았다.



📖일괄 비일괄_ 나도 마찬가지야.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어. 그런데 지선아, 나는 가끔 전환이니 일괄이니 하는 그런 말 몇 마디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처럼 느껴져.

일괄 비일괄이니 하는 말들. 계약직과 정규직 사이 보이지 않는 가림막, 파견직이라며 같은 사무실 속 다른 소속감. 이런거 다 누려본 사람으로서 해탈하듯 사람들을 마주하게된다. 저 짓거리하는 인간이 애도 아니고 나이 먹을대로 먹은 어른이 이딴거 가지고 편가르기하고 개무시하는걸 종종 봐온 터라 이 제도 속에서 신명나게 놀아나는 인간들 속에서 느끼는 바가 컸다. 이 집구석에서 인류애는 찾아 볼 수 없겠구나, 콩가루같은 집안에서도 지 잘난 맛에 용의 머리로 착각하는 뱀의 머리들에게 영영 고인물 속에서 왕노릇 하느라 드글거리는게 징그러울 뿐이었다. 오너의 시선이 가거나 오너의 피드백을 받게되면 간택이라도 받은 듯 으쓱거리는 사람을 볼 때 일괄과 비일괄 그 경계는 회사가 판만 깔아놓았지 저들끼리 신나서 편가르기와 높낮이를 구분짓는 백성들 같아 사람에게서 질린다는게 이런 뜻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매일 똑같은 넥타이만 하는 노부장이나 육아휴직 연달아쓰고 퇴사를 한 지선이나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아등거리는 방식인거지 거기에 애먼 '나'를 개입시켜 '때문에~'를 붙여주진 않았으면 좋겠다. 일괄이든 비일괄이든 내 몫의 길이니 탓을 운운하는건 핑계거리 같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_ 직업적 성취감 같은 건 고용인이 만들어낸 사탕발림이다. 어차피 나는 계약직이다. 이 년 후면 바꿔치기당할 소모품. 그뿐이다.

개인의 성향과 상황, 특수성이 가장 짙에 담겨있는 단편. 여기에서 우리는 단숨에 바뀌는 고객과 직원의 입장을 마주한다. 사람도 유니폼도 그대로 이지만 지상으로 올라가 매장에 있으면 모든걸 다 내어줄 듯한 상냥하다못해 극진한 직원이되고, 지하로 내려와 여기 마사지 침대쪽으로 들어오면 세상 까칠한 고객이된다. 그게 저자가 종일 응대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직업적 성취감과 소명감을 강요했고, 그게 당연히 있어야 되는 줄 아는 고용인의 기대치. 무기계약직도 아니고, 자동 연장을 기대할 만한 조건도 아니다. 싫든 좋든 계약서에 사인한 만큼만 하고나면 자동적으로 갈라설 관계. 누군가에겐 그래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알다가도 모를 다음을 위해 좋은거 아니겠냐는 마음을 두며 잘 좀 해보라고 다정한 훈수(?)를 두지만 그 알다가도 모를 다음은 생각보다 다시 오질 않더라. 직업적 성취감이나 직업적 만족도는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갯수와 계약서에 사인 할 때 약속했던 사안에 대한 정확한 피드백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딱 1인분만큼만 하자는 마음이 생겨난 걸 지도 모르겠다.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없다 할 지라도 때에따라 1인분 만큼도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니 내가 말하는 '딱 1인분 만큼'도 아주 후한 마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건 전적으로 내 기준이지 남들에게 이걸 알아주길 바라는게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 뿐이지 모.



결국 돈이고, 그래도 돈이다. 돈 때문에 일하고, 돈을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있다. 모든 요건의 결론은 내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로 인해 모든 보상을 받게됨을 인식한다. 그래서 '월급사실주의'인 세상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무도 읽지 않지만 꼭 보내놓아야하는 이메일에 신경을 쓰게되고, 그러든 말든 일괄여부에 신경 안 쓰고 싶어도 결국 나는 어떤 집단의 소속이며 어떠한 갈래의 한 지점에 머물며 이 위치가 안전구역인지를 계속 살피게된다.

노동은 버겁다. 이게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일단 돈벌러 나가는 우리집 현관문 앞에서는 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어떻게 가야지. 내가 자처한 삶이니 다음달의 내가 카드값 멀쩡히 내려면 일단 문을 박차고 나가본다. 나가면 또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연스레 가고있고, 하고있을 나라는 걸 알기 떄문이다. 역시나 세상은 드라마와 영화가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다. 드라마의 '미생'도 시리즈물의 '슬기로운 OO생활' 시리즈도

마냥 밝지도 마냥 어둡지도 않은 모든 이면을 보여줬다. 헌데 삶은 그 순간의 틈에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이 더 많다는 걸 안다. 회사생활을 통틀어 17년째 접어든 동태눈깔 직장인으로 매일을 마주하면 그냥 산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살아지니까.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다들 그리산다. 그러니 나를 너무 가엾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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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김동식 소설집 5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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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으로 꾸린 단편집인데, 결론은 다르다. 뭐랄까 일행 여럿이서 원형테이블에 앉아 같은 이야기로 고민하고있으나 저마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결론들은 달라서 의중을 도무지 모르다가 헤어진 후 진짜 속내를 듣게되는 뉘앙스랄까? 하나의 주제를 던져놓고 각자가 이해하기 나름으로 보여지는 마침표의 위치처럼 당황스럽게 와닿는다. 관계와 소통, 자아, 자존감 등 인간에 대한 성찰을 21갈래로 나누어 담아둔 타인의 행복을 시기하는 마음, 가족 간의 애증, 살인 다단게 등 미묘하게 얽힌 인간관계와 자아의 문제를 김동식표 소설로 비틀고 꼬아서 쓰윽 내민다.


📖T컴퍼니_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로 큰 행운이네요.

나의 불행은 누군가의 행복으로 보상이되고, 또 다른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되는 엮이고 엮여있는 삶.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때때로 나도 누군가의 불행을 사주하고싶을 만큼 울화가 치미는 날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먹은 날이면 나도 꼭 한번은 다리를 절듯 순간 주저앉고 버벅거리는 때가 오곤 하더라. 세치 혀가 잘못 했고, 눈알굴리며 옳지 못한 생각을 한게 들킨듯 꼭 마땅한 죄를 받는 기분이랄까. 나도 모르게 T컴퍼니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삶은 아닌지 의심하게되는 단편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 세상 선한 사람, 바보같이 착한 사람. 그들도 알게 모르게 과거에 했던 마음의 빚이 있어 이토록 애쓰며 착하게 하는게 아닐지 나는 또 의심을 하게된다.




📖행복 상한제_ 빚을 낼까? 빚쟁이가 되면 내 인생이 더 불행해질 테고, 그럼 그것들도 훨씬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잖아?

상대적인 행복의 수치. 그러나 남과 비교하면 내 행복의 지점이 어느 정도에 도달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 A를 보고 내 처지가 비관적으로 느껴지면 A의 행복지수가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일테고, B를 보면 측은해지고 안쓰러워 보인다면 나는 적어도 B보다는 나은 행복의 지점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그런지 계속 비교하고 곁눈질로 하찮게 보기도하며 때론 타인의 그러한 눈길에 마음을 베이기도한다. 결국 이 행복의 수치는 내가 보고싶은 것들로만 꾸려지는 가장 사적인 수치라는 것. 그러니 이 행복 상한제에 대한 거래는 사람을 혹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되어진다.

나를 기준으로 삼아 나보다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인가 나보다 불행해지길 원하는가는 내가 거래하기 나름이다. 300만원으로 쟤를 나보다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면, 진짜 간절히 타인의 불행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어 주고픈 마음이 있을 수 있다. 300만원이 사라지는 것 보다 내 자존감을 올려주는게 사는데에 덜 불행할 것 같거든. 조갈나있던 행복에 대한 비교를 시원하게 하니 한 숨 돌렸다 싶지만 사람의 욕심은 왜 이리 중간이 없을까. 내가 패가망신의 길로 가더라도 상대도 똑같이 길거리에 나앉듯 불행에 흠뻑 젖어드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게 느끼는 심보.

에휴- 그래 이렇게라도 최고로 행복해졌으면 된거지 모. 아무리 말린들 끝을 봐야 멈출테니 말이다. 그래그래, 누구든 한명이 옴팡지게 행복하면 된거다.(씁쓸해지는 결론. 그런데 나도 한번쯤은 거래하고 싶어지는 달콤한 제도라 제발 내 앞에는 이 직원이 눈에 안 띄면 좋겠다)



📖내가 뭘 사과해야 하는가?_ 그 아가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직접적인 사유가 있지 않는 것 같은데, 사과를 해야하는 이유. 사과를 강요받는 것에 대한 마음을 생각해본다. 내가 그 아가씨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강요했을까 부터 시작하여 이 간절함을 들어주어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까지. 각자의 입장에서의 미안한 마음을 놓아보고 무엇이 가장 크고 깊은 잘못을 했는지를 따지우려 하지만 결국 그 줄세우기는 치워버리게된다. 그 여자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거 같았던 경험을 갖고있으니 나 만큼의 후회도 덜고 살길 바라는 이미 해본자의 마음을 앞에두고 사과라는걸 하는 모습을 만난다. 그렇게 한다고 돈이 들지도 않고, 내가 낯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니 일단은 여기 누워있는 그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 사과라는걸 한다.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_ 궁금하다. 그동안 번 돈을 아내를 위해 바친다 해서 이제 와 아내가 기뻐할까? 아내가 날 용서해줄까?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말을 하는 사람치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아무렇지 않다 여기는 사람은 이러한 말을 뱉을 생각조차 안 하니까. 미안한데,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해소 할 지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방어 식으로 무딘척 보이고싶어하는 허세가 이런게 아닐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렇지 않고 싶은데 후회만 가득하고, 이제와 사과한들 소용이 없는건 알지만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마냥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은 마음. 앞서 봤던 단편 '내가 뭘 사과해야 하는가?'의 아가씨같은 마음이 차고 넘쳐 흐른 후가 이 남자의 상태가 아닐지.

아무렇지 않고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은 없더라. 내가 봐온 몇 안되는 이들은 다 이러했다.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 말로 다 포현하지 못할 감정이지만 말 밖에 못하는 그 또한 미안한 마음.

역시나 훌훌 읽히는데 다 읽고 나면 머리가 멍 해진다. 나 또한 이러한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나는 이 상황이라면 주인공과 똑같은 행동을 할까? 미안하지만 미안하지 않다는게 내 진심이 맞는걸까? 분위기에 휩쓸려 사과를 한다거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내 진심과는 다르게 세상에서 모나지 않게 살려고 선택을 했던적은 없던가를 되묻게된다. 그러다 욱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면서 T컴퍼니가 필터처럼 눈 앞에 씌워진다. 에라이 하는 마음에 행복 상한제가 있다면 나는 어떤 오더를 넣을지.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여기는데 내가 뭘 사과해야만 했던 것인지. 그간 읽은 짤막한 장면들을 내 삶에 연결해본다. 나라는 인간에게 질문을하고, 너라는 존재에 대해 나와의 관계성을 찾아가며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가설을 남기는 중이다. 김동식표 소설의 5번째 이야기 역시 계속된 질문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약을 박아두는데 내 생엔 이러한 사건이 없고, 이러한 결정이 없으리라는 보장을 못하겠다. 그래서 짧은 단편이 끝나면 혼자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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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 - 건설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 삶, 투쟁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외 기획, 이은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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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건설 노동자들은 '노가다'라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지칭되며 꼭 필요하지만 나서서 하지 않으려는 직군으로 분류가 되었다.

국어사전에서 '노가다'라는 명사를 검색해보면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며, 막일, 막일꾼으로 불리우는 일본어이다. 노동자라는 명확한 명사가 있음에도 그 뜻을 알면서도 하대하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건설 노동자로서의 전문성과 노하우는 무시되었다. 사회를 꾸려나가는 역할이지만 그 능력에 대한 가치는 외면하고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같은 직군에 속한 사람들끼리라도 뭉쳐야하는데, 임금 체불, 단가 후려치기, 하청에서 하청으로 이어지는 임금 착취는 집밖에서도 대우 받지 못하는 이들을 집 안에서도 외면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 환경 속 2007년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꾸려진다.

기본 8시간 근무 외의 추가 작업 시간에는 수당을 지급받게 되고, 이해관계 속에 얽혀있던 그들의 갑질은 예전보다 줄어든 모습을 보였다. 장시간의 근로로 인해 피로누적에 대한 우려도 있었는데 정해진 휴식 시간과 함께 식사시간, 폭염기간의 오침시간 확대에 대한 것들까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려 애쓰는걸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알아줘야 밖에 나가도 대우받는다는 말, 그 말이 어떤건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노조 활동. 이는 목소리를 높이고, 의견을 피력하고 개선점을 도모하는 과정. 공중에 흩어지던 말들을 모아 대변하는 행위. 그게 노조였다. 하지만 마음같지 않은 것들도 수반된다. 왜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인지, 왜 가족들의 신변에 걱정을 쏟아야하는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는 귀동냥, 눈동냥으로 얻은게 많아 그런지 노조활동보다 여성 노동자, 이주 노동자,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여건상 뛰어들게 된 노동현장. 아이를 키우며 먹고 살아야했음에도 집에서 밥이나하지, 술집 도우미나 하지 라는 말들에 마음이 까이고 서러움이 딱지처럼 앉았을 시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내가 당신들보다 잘하리라'라는 독한 마음이 얼마나 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 당장의 병원비보다 애드 통닭 시켜주고 맛있는거 사주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낀 이들의 애틋함이 철근 못지 않게 단단하게 엮여있음을 느낀다.


가끔, 이런 이야기도 한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추울 때 추운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한다고. 그래서 그러한 직종은 죄다 외국인이 그 역할을 대변하기도 했다. 날씨와는 상관 없이 하루에 정해진 물량을 다 채워야했고, 그렇지 못하면 임금을 보장받지도 못했다. 욕설과 체불은 어찌 그리 세트처럼 나란히 오는 가 싶은 걸 보면 하대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다들 하나같이 동등함이 아니라 우월함에 희열을 느끼는 근로환경을 조성했다.

싸움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여건. 왜? 돈을 안 주니까! 정당한 요구인데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흐름은 노동조합으로 목소리를 같이 키우는 방식이었다. 일용직, 일 한 만큼 받아가는 사람들. 그런데 당연한 수순을 어그러뜨리니 결국 이러한 꼴을 보이게된다.

어떤 이의 가장, 누군가의 아버지, 또 세상 귀한 자식, 애틋한 가족인데 이 현장에만 발을 딛으면 모든게 의미를 잃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노동에는 마침표가 없다. 세상이 굴러가고 사회가 유지되려면 노동이 필요하고, 타인의 수고스러움이 필요로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정적이며 쉬쉬하는 세상으로 보여지길 원한다. 노동의 가치는 알지만 빛을 보게 하면 안되는 듯 한 쉬쉬하는 세태. 이른바 블루컬러가 존중받는 사회까지 바라지 않는다. 블루컬러의 노동자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식하고 알아 주는 것만이라도 사회가 당연시 여겨주길 바라며 이 책의 근로자들에게 힘을 싣어본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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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 어느 30대 캥거루족의 가족과 나 사이 길 찾기
구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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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즈음 되면 활동 반경이 정해져있고, 만나는 사람도 손에 꼽히며, 도전보다는 좀 더 나은 안전함과 편안함을 추구하게된다. 그래서 빨리 집에 가고 싶고, 내 몸 뉘일 익숙한 곳을 찾게되고, 마음 덜 쓰고 지낼 곳에서 머리쓰는 일을 줄이게된다. 그게 내 집이고, 부모와 함께 있는 공간이다. 어릴적부터 나를 키워 온 사람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들. 입 바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해 줄 구성원들 속에서 머무는 순간. 타인의 세치 혀에 눌리고, 시선에 찔리며 아파 했던 순간을 보상받는 곳. 거기에다가 덧붙여지는 재정상태와 사회적 치안에 대한 안심까지.

오죽하면 결혼 비용이 우주여행보다 비싸다할까. 출산하기엔 하고 싶은 일들과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으며 그 틈에서 사회생활을 병행하며 내집마련한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면 두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명언을 남긴 세대들. 다들 으레 그 나이 즈음에 한다는 것들을 무던히 해나간 이들은 '평범함'이 아니라 '비범함'으로 보여지기도한다.


구희 작가는 독립을 꿈꾸지만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임을 깨닫는다. 무심한 듯 내 울타리가 되어주고 단단하고 묵직한 천장이 되어 세상 풍파를 아무렇지 않게 막아주는 이들. 당연할 수 없는 것인데 당연한 것이라 여기도록 버텨주는 부모와 가족이라는 집단속에서 마음이 들뜨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마다 이들이 있기에 캥거루 족이라 일컫지만 이 폭닥함 품을 더욱 지키고싶어한다.

구희 작가와 달리 나는 20대 중반 부모의 울타리를 박차고 내 세상을 새로 꾸렸다. 독립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을 꾸린거니 독립과 함께 호적 갈아타기(?)가 되어버렸지. 그러하니 구희 작가가 말하는 30대 캥거루족과는 상반된 30대 가정이 있는 아줌마다. 그래서 내 삶과 비교하며 구희작가가 걱정하는 세상이 자신에게 향해있는 시선들에 대한 우려를 조금은 알고있다. 더군다나 구희 작가 직업에 대한 특성까지. 어느하나 같을 수 없는 나(=독자)와 구희 작가의 환경. 그래서 저자가 마음쓰는 구석들을 더 편견없이 보려했다. 긴 글 보단 짤막한 대화와 그림을 통해 무겁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안일하게 보지 않으려했다.

저자 : 캥거루족, 웹툰작가, 서른이 넘음. 부모와 함께 서울 거주. 독립할 생각 없음

독자 : 독립함, 8to5 주5일 근무 직장인, 서른이 넘음. 결혼 후 남편과 지방 거주. 독립한 상태이며 2세 계획 없음

어떻게 이렇게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을까.

저자는 네버랜드 속의 영원을 바라지만 자신이 나이 드는 만큼 부모의 인생 속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에 걱정이 커진다. 인생 퀘스트는 어느정도 헤쳐나갔다 싶은데 성인 이후 직장인이 된 다음, 독립과 결혼, 출산에서 절고 있는건 아닌지. 주변 친구들과 다른 노선으로 가는게 괜찮은지 우려하고 조바심에 머리가 복잡해짐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독립은 꼭 해야하는 것인지, 결혼은 필수인지, 출산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과정의 일부인지를 고민하지만 여기에는 확고한 해답이나 선택에 대한 굳은 확신은 없다. 그저 구희 작가 나름의 선택이었고 딱 그만큼 느끼는 행복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엄마와 아빠가 꾸린 세상에서 불안함을 덜고 사는 것. 답답하기도하고 믿었던 사람이 툭툭 뱉어내는 잔소리에 마음이 까이기도한다.


결국 이러나 저러나 혼자 살 순 없고, 어떻게든 닿아있음을 인정한다. 어찌 살지,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에 정을 줄지를 계속 고민하고 자기 물음을 이어가는 고민 가득한 어른이의 만화이니 나만 이러고 있지 않음에 위안을 삼고싶은 어른이가 있다면 이 책으로 다같이 가쁜숨 한번 고르며 어른이가 어른으로 되는 찰나에 응원을 받길 바라게된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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