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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 월급사실주의 2025 ㅣ 월급사실주의 3
김동식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몇몇 이야기는 특정한 직군이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집구석 제 식구 갉아먹기도 있었고, 또 어떤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생소한 직군에서 얻게되는 사람에게 질려버리는 세상살이 이기도했다. 역시나 그렇더라. 이러한 월급사실주의 밥벌이 애환은 일이 힘든 것 보다 일 이외의 요소에서 얻어지는 스트레스가 나를 찌른다는 것. 하루가 무사히 끝나길 바라고,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출근하는게 악몽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지만 그 바람보다 더 어려운 내일의 무사안일을 기대하는 삶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그건 마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것.
5월은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를 입사한 달이다. 다들 얼마 못 가서 퇴사 할 거라는 그들의 바람에 못 미쳐 미안하지만 12년 근속이며 이제 13년차로 접어들어보니 역시나 내 사업보다 돈 많은 오너님의 노비가 되는게 맘편하다는걸 다시금 느낀다. 일확천금은 못 누리더라도 제 날짜에 밀리는 법 없이 꼬박꼬박 급여 입금되는게 얼마나 무사한 일인지 직장인들은 공감하겠지? 오늘도 출근했고, 내일도 출근을 할 테니 뇌에 힘 주고 그럼에도 나는 이겨낸다는 마음으로 버텨보려한다.

📖쌀먹_ 현실이든 게임이든 어디서나 무시당하는 쓰레기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뭐? 내가 부럽다고? 김남우는 생각할수록 정재준에게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불꽃이 얹힌 것처럼 속이 끓고 갑갑했다. 다음날 그는 정재준에게 연락해서 쌍욕을 퍼부었다.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뭘 알고 내가 부러워 씨발!"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얻어내고 어려움없이 살고있는 평범한 단계를 자신만 버거워 할 때, 우리는 자격지심을 얻고 자존감을 갈취당한다. 남들 다 하는 직장생활, 남들 다 하는 사회생활, 남들 다 하는 인간관계가 그놈의 직장 하나 때문에 모든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생각한다. 적당한 회사, 적당한 벌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쏠쏠히 챙겨보는 행복이 딱 이거 같은데 자신은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해 쓰레기 같은 존재로 치부한다. 웃긴건 자신의 처지는 비관하되 높아진 눈은 낮출 줄 모른다는 것. 중소기업은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는 가성비 따위를 운운하며 그럴 바엔 한탕주의 처럼 쌀먹을 자처한다. 제 능력에 대한 가치와 자신이 두드릴 직업의 문턱은 손을 뻗어 닿지도 않을 고점을 찍고 있으며, 마주하는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이라며 노력이라는 개선점보다 현실 타박을 하는 쉬운 선택지에 도달한다.
그래서 나는 쌀먹이 짠하다. 평생 저러고 살거 같아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자신은 없고, 모니터 앞에서 일장연설 휘갈기며 쌀먹도 직업이라 운운하는 걸 보면 김남우는 평생 판교는 물론이고 사원증 걸 수 있는 회사 입사는 글러뵌다. 사무실 고인물로 살며 든자리 난자리 바라보는 구석탱이 과장 나부랭이 눈에는 딱 그렇게만 보였다.

📖올바른 크리스마스_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 회사가 시대와 발맞추어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필요한 얼굴. 화살표를 따라 올라갈수록 백인들만 남는 조직도를 감추기 위해 이용되는 얼굴.
이게 사람의 성향이기도 할 테고, 회사에 기여하는 바에 대비하는 기대치의 맞교환 일 수도 있겠는데, 암튼 이렇게 뭘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딴세상 이야기 처럼 들린다. 뭘 바라는거야? 라며 속으로 궁시렁되다보면 저 사람들에게 회사는 동반상생 기회의 땅으로 생각하는건가? 싶은 마음으로 계속 물음을 덧붙이게된다. 조직은 이율타산이 주된 목적이기에 인재 양성과 성장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큰 것에 거는 기대치는 없으며 보다 안정적이며 확신적인 선택지에 힘을 싣게된다. 회사가 필요한 인재는 아무리 인성이 지랄맞고 근태가 거지같아도 쥐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잘 할라 하고, 잘 하고 있는건 기본 옵션이다. 다양성? 글로벌? 미래지향적? 인재육성? 일단 사측도 먹고 살만한 위치에 도달해야 눈에 들어오는 항목들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기대 없이 급여 입금되는 몫 만큼의 1인분만 일하는 걸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주미의 기대하는 눈망울이 안쓰러울 뿐이다.(회사 고인물이라 이런 생각이 드는건지, 10년전의 나라면 주미처럼 살고 있진 않을지를 생각해보며 이 모든건 세월과 연차, 빤히 보이는 사내 정치가 눈에 훤히 보여 도무지 모른척 할 수 없는 시뻘건 동태눈깔이 된 나를 탓해야겠지)

📖아무 사이_ 정말이지 나는 이 일을 잘하고 싶었다. 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건 내게 있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잘 하고 싶은 마음,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잘 하는 사람이라 치켜세워주는 주변의 시선. 이건 어린 아이가 칭찬을 갈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른들이 회사에서 바라는 주변 반응이기도하다. 그래서 잘 하고픈 마음을 담뿍 담아 과하게 애정을 쏟게된다. 취업 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먼지같은 인간이라 여긴 놈이 여기오니 잘한다 해주고, 고맙다 해주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상에 괴리감도 들지만 이 폭닥한 시선이 싫지 않아 더 애를 쓰게 만든다. 쓸모있는 사람으로서의 기능 변경. 직업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만 있는게 아님을 보여주고있다. 잘한다 잘한다 해 주면 더 잘 하려는 마음. 애나 어른이나 그 요건이 충족되는 상황만 달라진 것이지 기대치와 순응치의 포만감 가득한 마음은 결국 똑같았다.

📖일괄 비일괄_ 나도 마찬가지야.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어. 그런데 지선아, 나는 가끔 전환이니 일괄이니 하는 그런 말 몇 마디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처럼 느껴져.
일괄 비일괄이니 하는 말들. 계약직과 정규직 사이 보이지 않는 가림막, 파견직이라며 같은 사무실 속 다른 소속감. 이런거 다 누려본 사람으로서 해탈하듯 사람들을 마주하게된다. 저 짓거리하는 인간이 애도 아니고 나이 먹을대로 먹은 어른이 이딴거 가지고 편가르기하고 개무시하는걸 종종 봐온 터라 이 제도 속에서 신명나게 놀아나는 인간들 속에서 느끼는 바가 컸다. 이 집구석에서 인류애는 찾아 볼 수 없겠구나, 콩가루같은 집안에서도 지 잘난 맛에 용의 머리로 착각하는 뱀의 머리들에게 영영 고인물 속에서 왕노릇 하느라 드글거리는게 징그러울 뿐이었다. 오너의 시선이 가거나 오너의 피드백을 받게되면 간택이라도 받은 듯 으쓱거리는 사람을 볼 때 일괄과 비일괄 그 경계는 회사가 판만 깔아놓았지 저들끼리 신나서 편가르기와 높낮이를 구분짓는 백성들 같아 사람에게서 질린다는게 이런 뜻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매일 똑같은 넥타이만 하는 노부장이나 육아휴직 연달아쓰고 퇴사를 한 지선이나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아등거리는 방식인거지 거기에 애먼 '나'를 개입시켜 '때문에~'를 붙여주진 않았으면 좋겠다. 일괄이든 비일괄이든 내 몫의 길이니 탓을 운운하는건 핑계거리 같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_ 직업적 성취감 같은 건 고용인이 만들어낸 사탕발림이다. 어차피 나는 계약직이다. 이 년 후면 바꿔치기당할 소모품. 그뿐이다.
개인의 성향과 상황, 특수성이 가장 짙에 담겨있는 단편. 여기에서 우리는 단숨에 바뀌는 고객과 직원의 입장을 마주한다. 사람도 유니폼도 그대로 이지만 지상으로 올라가 매장에 있으면 모든걸 다 내어줄 듯한 상냥하다못해 극진한 직원이되고, 지하로 내려와 여기 마사지 침대쪽으로 들어오면 세상 까칠한 고객이된다. 그게 저자가 종일 응대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직업적 성취감과 소명감을 강요했고, 그게 당연히 있어야 되는 줄 아는 고용인의 기대치. 무기계약직도 아니고, 자동 연장을 기대할 만한 조건도 아니다. 싫든 좋든 계약서에 사인한 만큼만 하고나면 자동적으로 갈라설 관계. 누군가에겐 그래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알다가도 모를 다음을 위해 좋은거 아니겠냐는 마음을 두며 잘 좀 해보라고 다정한 훈수(?)를 두지만 그 알다가도 모를 다음은 생각보다 다시 오질 않더라. 직업적 성취감이나 직업적 만족도는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갯수와 계약서에 사인 할 때 약속했던 사안에 대한 정확한 피드백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딱 1인분만큼만 하자는 마음이 생겨난 걸 지도 모르겠다.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없다 할 지라도 때에따라 1인분 만큼도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니 내가 말하는 '딱 1인분 만큼'도 아주 후한 마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건 전적으로 내 기준이지 남들에게 이걸 알아주길 바라는게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 뿐이지 모.

결국 돈이고, 그래도 돈이다. 돈 때문에 일하고, 돈을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있다. 모든 요건의 결론은 내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로 인해 모든 보상을 받게됨을 인식한다. 그래서 '월급사실주의'인 세상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무도 읽지 않지만 꼭 보내놓아야하는 이메일에 신경을 쓰게되고, 그러든 말든 일괄여부에 신경 안 쓰고 싶어도 결국 나는 어떤 집단의 소속이며 어떠한 갈래의 한 지점에 머물며 이 위치가 안전구역인지를 계속 살피게된다.
노동은 버겁다. 이게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일단 돈벌러 나가는 우리집 현관문 앞에서는 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어떻게 가야지. 내가 자처한 삶이니 다음달의 내가 카드값 멀쩡히 내려면 일단 문을 박차고 나가본다. 나가면 또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연스레 가고있고, 하고있을 나라는 걸 알기 떄문이다. 역시나 세상은 드라마와 영화가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다. 드라마의 '미생'도 시리즈물의 '슬기로운 OO생활' 시리즈도
마냥 밝지도 마냥 어둡지도 않은 모든 이면을 보여줬다. 헌데 삶은 그 순간의 틈에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이 더 많다는 걸 안다. 회사생활을 통틀어 17년째 접어든 동태눈깔 직장인으로 매일을 마주하면 그냥 산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살아지니까.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다들 그리산다. 그러니 나를 너무 가엾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