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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고독과 축복의 상반된 단어를 한 줄에 나열하여 촘촘하게 짜여진 삶에서 한 줄기의 빛과 기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보였다. 그래서 읽고싶게 만들었다. 나는 육아와는 별개의 삶이고, 매년 무얼 이루어야겠다는 성취에 대한 욕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계속 바뀌어가는 역할과 점차 줄어드는 존재의 집중도. 엄마로서의 비중이 늘어남과 동시에 달라진 시야.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두었다. 나 / 개인 / 주체 / 자립에 대한 사유는 물론이고 결혼 / 임신 /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변해가는 환경과 그에 맞춰 바뀌어야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적어두었다. 저자의 시간은 촘촘하게 채워져있고 근 5년간의 세상은 누구보다 바빴고, 다각화를 이루었음을 느꼈다. 내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매번 낯설었고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멀리하기보단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익숙해지려했고, 맞춰보는 삶을 살게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안정감은 더욱 두터워졌고, 행복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진 걸 글의 온도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기운에 안주하며 좀 편히 살아도 될지, 내가 겪어낼 생의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행복과 걱정을 차례차례 끼워넣어 두었다. 제법 괜찮은 삶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같이 나눠보면 좋겠다. 그리고 무수한 걱정과 근심 속 고독의 문에 막 입성한 나의 절친. 출산한지 갓 한달된 나의 그녀에게도 이 책을 전달해보고싶어졌다.

📖 아이가 둘이 되면서 나 자신을 돌보고 키울 시간은 당연하게도 줄었다. 뚜렷한 직장이 없는 내게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나의 밝은 미래 또한 수축하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생산성 없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 가치를 조금씩 갉아먹고 나는 영영 소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 그리고 긴 텀을 두지 않는 두 번의 출산. 남편의 직장에 맞춰 사는 지역마저 옮겨간다. 본인의 커리어는 고이 접어두어 일단 아쉬움의 후미진 곳에 밀어넣어두었다. 그렇다보니 그렇게 활동적이고 바삐살던 생산적인 인간에서 타인의 노고를 무전취식하는 자로 스스로를 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산성 없는 하루를 살고, 소비만 할 뿐 무언가를 위해 애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건 경력단절이든 잠시 육아휴직을 하든 똑같이 느끼는 양육자의 조급함이었다. 나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동료는 물론이고, 친구, 형제들의 육아휴직과 경력단절을 지켜본 입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얽힌 감정을 많이 학습해와 비슷한 경험이라도 한듯 공감을 하게되었고 저자의 쪼그라든 마음이 반듯하게 펴질 이후를 바라게되더라.
나의 어머니 시절은 당연히 저자의 나이 즈음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다. 이른바 독박육아가 당연했고, 그렇게 애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엄마로서의 인생 퀘스트라도 되는 듯 간주되기도했다. 이름을 불리우는 것 보다 OO엄마로 불리우는게 당연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도 그녀들은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많은 갈등을 혼자 버텨냈을 것이다. 지금 시대의 그녀들만 하는 잡생각이라 치부하지 않길 바란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도 나오는데 '결혼이란, 갖은 상황과 갈등을 조율하고 서로를 부양할 의무를 떠안으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뒤로하고 도박같은 선택을 감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로 속 시원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이 도박같은 선택, 이 얄궂은 인생의 원치않는 감정 변화 또한 감수하고 버틸 각오가 되어있으니 이 감정이 나만의 몫이 아님을 공유하는게 중요해보였다.
OO와이프, OO엄마로 살려고 내가 그렇게 12년은 기본이고 반년에 몇천이나 하는 대학 수업도 모두 이수했고, 뽀개기 어렵다는 취업 문턱도 넘어봤는데 그걸 썩히기 너무 아쉽다는거지. 이정도 열심히 산 거였으면 기회는 몇번이고 더 주어져야하고, 발에 채이는 보너스같은 순간도 있어야되지 않겠냐는 듯한 저자의 생각들. 나 역시 공감한다. 1인분의 육아가 아니라 공동 분배의 육아, 일종의 협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기길 바라게된다. 그러자고 결혼했고, 그러자고 같이 사니까 그럴때엔 '같이'의 의미를 서두에 두고 저자의 남편이 말한 '당신이랑 같이 키워야 재밌지'의 재미를 누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면한다.

📖 우리는 가만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 같지만 서로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의 키가 클 동안 우리는 늙어간다. 그리고 늙은 만큼 성장한다. 늙는 것도 크는 거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그동안은 미처 몰랐는데, 겪어보니 분명 늙었다는 것은 컸다는 뜻이다.
아마 저자를 보면 애가 애를 키우고 있다는 소릴들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애 낳고 나면 진짜 어른이라 말하는게 아닐까 싶으면서 하나의 주체적인 생명을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어렴풋이 예견해본다. 나의 부모는 나를 애틋해하고, 당신의 손주들을 사랑에 마지아니한다. 그리고 그 조막만한 녀석이 당신의 아들딸을 힘들게 할 까봐 더욱 크게 보듬어보려 애쓴다. 우리는 누군가에겐 영영 웃자란 녀석들일거고, 내 허리춤에도 못 오는 작은 아이의 세상엔 저자와 남편이 가장 큰 버팀목이고 비빌언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키우고 서로를 애틋해하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임을 느낀다. 결국 당신들이 나를 살리는거지.
'1인분의 육아', '살림노동'이라는 단어들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이 단어들에는 그림자처럼 '엄마'라고 불리우는 양육자가 따라붙는다. 성별을 논하고 싶진 않지만 단독적인 양육이 대부분 이뤄지는 환경이다보니 존재는 그대로를 유지하고있으나 불리워지는 호칭이 바뀌었고, 이전의 세상은 잠식당한 상태가 되어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저마다 고독하는 것과 어떤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 속에서 결국 우리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에 두고 해 볼 만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려 한다.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내 생에는 이 호칭과 역할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살아온 세월이라 그런지 때때로 이 사람들의 무한한 역량이 부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이렇게 빠르게 불태우며 노력하다보면 언제 한번 과부하가 와서 모든게 멈춰 버릴거 같거든. 저자를 보면서 똑같이 빠듯하지만 그럼에도 촘촘히 열심히 살라고, 무언간 해 내어 보라고, 생산적인 활동을 좀 해 보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각자의 방식과 속도와 여건이 있을테니 똑같이 뭘 어찌해보라는 말 대신 이렇게도 살아지고, 이렇게도 그 순간을 무난히 건너 올 수 있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걸 알려주고싶다. 나를 무조건 적으로 불태워 버리지도, 갉아 먹지도, 소멸 시키지도, 희생을 목적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럴 전제로 두며 이 책이 말하는 고독을 잘 채워 축복으로 감아 안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