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 -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가 아닌 온전한 나로 서기
정연희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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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딸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부모로 온전한 내 이름 석자를 들으며 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더라. 오히려 10대 시절 학생의 신분이었을때가 더욱 온전한 '나'로서 불리워지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저자 정연희는 자신의 딸이 마냥 어리다 여겼는데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생각해보니 딸아이는 품속의 아이가 아니라 엄연한 성인이었던걸 모른척하고팠던 부모였다. 그 한마디가 기점이 되어 작가는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어온 것들을 보태어 딸에게 해주고픈 말들. 이제는 엄마로서 여자로서 그리고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과 격려의 말들을 해주었다.


​006_ 딸의 인생엔 늘 엄마의 삶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느 구석엔가 숨어 있다가 모습을 나타낸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도 나의 엄마가 늘 어른거렸고, 딸도 살아가며 나의 그림자를 수없이 만나리라 생각한다.


싫든 좋든 나는 엄마 딸이라는 걸 증명하는 이른바 엄마의 복사본같은 느낌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어릴땐 이해가 되지 않던 모습들도 있었으나 결국 나도 엄마의 세월을 밟아가는 삶을 살다보니 이제서야 이해가되는 부분들이 있더라. 가끔씩은 삐딱선을 타며 '왜 저렇게 살아야하지'라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결국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닮은 복사본이라 그 세월 흔적 일부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되었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했고, 그 세월 속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시대의 유행이며 그 시절의 암묵적인 룰 같은거지.

나 역시 엄마의 복사본이다. 일부는 진하게 적혀있어서 나에게도 베여있으며, 일부는 흐릿해서 복사판인 나에겐 보일듯 말듯한 흔적만 남아있는 구간도 있다.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나는 엄마의 일부이고, 또 어떻게 보면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의 사람이라는 거지.


작가의 글들을 통해 나는 엄마의 일부를 만나고, 나머지 나로서의 일부를 좀 더 진하게 따라 적어보는 순간이 되길 바라며 프롤로그를 읽었다.


017_ “남이 너를 자기 딸로 여긴다니! 그 말이 너무 싫어서 배알이 꼴린 게 아닌가 싶다!”


아마 딸 가진 모든 엄마의 영문모를 배앓이 순간이 바로 이 타이밍 일거다. 사돈될 사람과 처음 마주하는 상견례자리. 결혼을 어떻게 진행 시킬건지에 대한 의견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각자의 자식들이 커온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길 하다가 끝맺음은 이걸로 마무릴 하더라. 딸로 여기며 잘 해주겠노라, 아들로 생각하며 예뻐하겠노라는 상견례 자리에서의 고정 엔딩멘트. 알고보면 오랜 과거부터 이어진 자동완성형 문장인데 곰곰히 단어들을 곱씹어보니 마음이 안 좋으신거였겠지. 당신도 살아보니 며느리와 딸은 단어부터 다르니까. 작가는 알수없는 배앓이를 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아버지가 그러하셨더라. 작가의 한마디를 통해 다시 떠올랐는데 말이야. 아빠가 그럴줄 몰랐어. 하하하.


079_ 말의 선언으로 며느리가 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한다는 말로 단박에 사랑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달콤하고 멋있는 말로 마법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린 알지 않는가? 세상은 마법의 세계, 동화의 세계가 아님을.


가끔 도리라는 기준이 말하는 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아야할까, 듣는 이가 느끼는 경계까지를 도리라 삼아야할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다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석연치않은 점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산후조리를 다 하지 못한 후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산후조리하며 힘들어하는 걸 보며 예전 며느리가 당신들을 위해 애써온 그 순간을 곱씹게된다. 그제서야 당신은 며느리가 얼마나 애썼는지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제서야 진심의 마음을 보태어 고맙다는 말을 한다. 고맙다는 말이 참 얄궂은게 단어의 표면이 불투명하고 두껍지 못하고 습자지처럼 얇고 속이 비친다는 점이다. 입모양으로 씰룩이는 고맙다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이게 진심의 따수운 단어인지 허울만 있는 단어인지 들여다 보인다는게 문제더라.

아직도 떠오르는게 올 봄에 병실에서 들었던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이다. 입도 굳어가고 혀도 바싹하니 말라서 단어 한마디 내 뱉는것도차 어려우면서도 시어머니는 당신이 많이 미안했고, 고맙다는 이야길 하셨다. 그동안 며느리 맘을 못 알아주어 많이 미안했다며 힘도 안 들어가는 손이 내 손을 잡을 땐 이렇게 달콤하고 밋었는 말을 더 이상 못 들을 듯한 느낌을 받을 땐 아쉬움이 컸다. 좀 더 마법같은 말들로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좀 더 길게 살 수 있다면 진짜 재미날텐데 결국 말은 다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어 홀로 이 흔적을 쥐고 사는 이는 더욱 더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112_ 난 늘 나 자신의 도전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그분들은 지나가는 말로 나의 도전을 믿을 수 없이 험난한 도전으로 밀어붙였다. 그 지나가는 말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슬픔과 두려움,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음을 그분들이 상상이나 하였을까 싶다.


스스로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점을 안다. 그렇지만 더 치열하게 살아도 되겠다 싶어 도전을 하게된다. 작가가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것보단 덜하겠지만 나역시도 하고픈게 있다면 한번은 시도를 하며 배우려하는 욕구가 큰 사람이다. 욕망의 덩어리가 학창시절에 샘솟았어야하는데, 늦바람인건지 다 커서 생긴다는 거다. 나이가 든 후 느낀건데 모든 배움에는 때가 있다지만 때와 함께 쩐도 있어야 됨을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도전들은 딱 내 깜냥에 맞게 하더라도 타인이 보기엔 일하고 살림살고 공부까지 하는 것이 벅차보이니 하나라도 잘 하길 바라는 잔소리로 번역이 되기도 한다. 내가 걱정이 되시는 걸까 가정에 충실치 못해서 함께 사는 이들이 옳게 대접받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시는 걸까 싶기도 해서인지 가끔은 정말 아무런 조건없는 응원이 고파지기도 한다.

201_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들다’ ‘어렵다’가 아니라 ‘참 고단한 일’이었다. 신의, 사랑, 존경이라는 좋은 단어들 뒤에는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었다.


가끔 남편과 우스개소리로 했던 말들이 있다. 내 통장 비밀번호며 간편인증 번호를 알려주며 혹여 내가 먼저 가거들랑 그거 다 챙기고, 내가 먼저 가는 것에 서운해하지말고 딱 3년만 그리워하고, 다른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 그러면 남편은 내 유언아닌 유언에 한술 더 떠서 말을 한다. 가는 거는 순서 없다며 본인이 편할라면 자기가 먼저 가겠다며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맞받아치곤 한다. 역시 당신은 내 남편이 될 자격이 충분해.ㅋㅋㅋㅋ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 어려움을 알고서도 뛰어든 둘이다. 그래서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을 감수하고 당신을 택한 거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나에게 이러한 시련과 댓가를 요구하나 싶지만 내 지랄같은 성격을 받아주기 위해 태어났기에 겸허히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의 그대여 연애5년과 결혼생활 7년을 버텨온다고 고생했소이다. 아직 버텨야 할 날이 창창하니 좀 더 애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저녁 맛있는 고기반찬을 올려봐야겠다.

262_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이전에 너는 처음부터 너였단다. 어찌 자랐든, 어떤 생김새든,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누구와 현재 살고 있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너는 네가 아닌 적이 없었단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사랑하는 딸에게 해주는 문장은 이거였다. 다른거 없다. 그냥 모든 본질의 시작은 '너'라는 것을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라는 말이다. 때때로 씌워지는 가면으로 누군지 헷갈릴 지언정 그 모든것이 나라는 점. 그러니 그 모든 순간에 등장하는 배역은 달라도 등장인물의 실명은 딱 한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너도 그렇게 믿으라는 말이었다.

엄마들은 다 그런가봐. 작가도 그러했고, 나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그녀의 문장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다보면 따뜻하면서도 물기가 스미는 듯 하다. 딸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며,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한들 엄마에겐 가장 소중하고 소담스러운 딸이니 자신이 겪어온 힘든 과정을 따라 겪지 않았음 하는 애틋함이 있었다. 작가도 아는거였다. 작가의 딸도 본인의 복사본처럼 많이 닮아있음을 알고있으니 힘들고 험한 과정은 힘껏 점프하여 지나쳐주길 바라는 거겠지.

각각의 글들은 몇해 전 내가 결혼식을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친정부모님이 봉투에 곱게 접어준 편지처럼 여겨졌고, 시간을 쪼개어 그녀의 허한 순간을 채우기 위해 나섰던 모녀 데이트같았다. 엄마가 신이나서 내 어릴적 이야기와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 듯한 오붓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페이지가 휘리릭 넘겨졌고, 여전히 나는 엄마의 귀한 딸이라는 확신을 한번 더 주는 듯 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게 맞는지 아닌지 헷갈릴때 쥐어주고픈 모든 딸들을 위한 응원의 책 같아서 책 페이지를 다시 처음으로 넘겨 표지에 적힌 제목을 매만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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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이정섭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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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비슷한 부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궁금해서 찾아본 이정섭 작가의 책. ‘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이라 함은 결국 우리 부부 또한 개인주의적 성격의 지분이 많아서 이렇게 사는 걸까? 싶은 의문형도 생겼고, 따로 또 함께 라는 일상의 행복 중 모르고 지나친 것은 없었는지 얻어갈게 많은 글이겠단 기대감으로 시작을 했다.




■019_ 주변에선 “각방 쓰면 멀어져” “그래도 자식은 있어야지”등 남들이 만든 정답과 기준을 끊임없이 들이밀었지만, 우린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 우리가 진짜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행복할 수 있었고, 독립적이기에 진짜 필요한 순간 지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다.

참 많이도 들었던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 순간마다 넘어야 하는 필수 수행 과제가 있는 느낌이다. [초→중→고]에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반 강제적인 인간 완성 모양틀.(얼음트레이에 비유) 모양틀에 나를 부었을 때 넘치면 버려야하고(버려지고) 남는 공간은 부단히 노력해서 채우고, 그러고 나서 성인이 되면 더욱 까다로운 세부 공정으로 이어진다. [대학→직장인→연애→결혼→출산→육아&직장인→부모와 자식의 보호자]로 분신술까지 해가며 나를 여기저기 필요로 하는 곳곳에 심어 두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뭐지? 뭐가 남지?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누구의 남편이나,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보호자. 그 누구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체적인 ‘나’란 놈만의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를 다들 한결같이 강요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싶은 질문과 답을 하며 더욱 복잡해진 길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니 제발 부부간에 결정지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입을 대지 않았음 하는 마음이 크다. 감 나라 배 나라 한다고 진짜 당신들의 말처럼 감도 자라고 배도 자라는 뿌리면 뭔들 못하겠소. 당신들도 못했던 인륜지대사에 대해 강요하지 않았음 하는 간절함이 크다.

그래서 우린, 진심을 다해 우리의 소리만을 귀 담아 듣기로 했고 그 외의 이야기는 흘리자 다짐했던 신혼 초가 생각났던 단락이다.(사람 나름이라고 흘리고 싶어도 흘려듣지 못하면 때때로 그 말의 독성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병이 생기기도 하니 흘려듣자 할 때 미련 없이 흘려버리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022_ 모든 사소한 일이 연인과 함께라는 이유로 즐길 거리가 되는 셈이다. 어제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사랑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어제와도 같으며, 그제와도 별반 다르지 않는 일상이며 똑같은 장면의 연속이다. 으레 매일매일 방영하는 일일 드라마였다면 구독자는 다시보기 할 때 스크롤을 당겨보거나 스킵을 누를 장면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가장 재미난 장면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연애를 하면 모든 것들이 우리 위주로 돌아가고, 모든 사랑 노래가 우리 이야기였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118_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 둘이 만나 이루는 결혼이란 우주가 그리 단순할리 없다.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뒤집어 말해 부부가 자기들의 기준으로 결혼생활을 꾸려 나가면 거기에 일반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의 의지와 노력만 남는 셈이다.

광활한 우주 속, 그 지구라는 작은 행성, 수많은 나라와 인구 속에서 당신과 내가 만날 확률만큼이나 우리는 참 많이 다르기도 하고, 어쩜 이래? 라는 의문이 날 정도로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천생연분인가보다 싶은 생각을 하고, 다르면 당신의 모자란 부분을 내가 채워주려고 이렇게 만난 것이라고 멋대로 로맨스 소설을 짜 맞추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린 부부이고, 그러니깐 어쩔 수 없이 당신 옆에 내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이왕 그렇게 제멋대로 내 맘대로 지어낸 사랑이야기라면 끝까지 기승전행복론을 이어갔음 한다. 은비 까비 속 동화도 그랬고, 배추도사 무도사 아저씨들도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꺼내준 것들이 전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이었으니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다는 믿음을 이어가며 우리도 행복하자는 거다.

결국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당신과 나 뿐이니깐 우리 둘만 잘하면 되는 거야.



■157_ 사람들은 우리 부부에게 나이 들어서 둘만 있으면 외롭지 않겠냐고 말한다. 다음 세대가 없으면 어떤 희망이 있냐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처럼 희망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 눈엔 반복돼 보이는 삶 속에서 사소한 발전을 찾기로 했다.

... ... 5년 뒤 혹은 10년 뒤를 생각했을 때 우리 곁에 사소한 변화는 있을 것이고, 그 정도 희망의 감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결혼 초반에 이 질문을 받으면 감정이 요동치며 반감이 더 세게 들었다. ‘당신이 왜?’라는 반박을 하며 양 손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그렇게 혼자 가시를 세우지만 정작 표현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으며 느끼는 감정으로서는 당신이 보기엔 내가 평범한 다른 이들과 다르니 ‘걱정’되어 하는 말 이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고쳐 받아들이고 있다. 작가의 주변 사람들처럼 우리를 둘러싼 친구네 부부들도 아이 없이 둘만이 행복하게 잘 살자고 마음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듯 결혼과 출산의 순서를 밟아가는 가정도 있다. 인류의 다양성 중 한 갈래로 좋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작사가 김이나님이 한 예능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희 같은 부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식을 가진 기쁜 우주를 체험해보지 못하겠지만 다른 부부들은 체험 못 하는 아이 없이 부부끼리만 사는 즐거움은 (그 부부들이) 절대 못 경험하니까.”라는 대답이었다. 12년째 아이를 갖기 않고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너무 만족스럽고 좋다고 이야길 하는 모습이 우리가 하고팠던 대답이고, 계속 이어나갈 목표이기도 하다.




■176_ 그래서 노후를 위해 또 한가지 준비할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즐기는 습관이다.

내가 자녀를 안 낳으려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부분이기도 하다. 내 노후를 위해서 자녀를 낳진 않고 싶었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부모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이가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심어주고 싶진 않았다. 그 아이도 존재로서의 가치와 삶의 이유가 있을 텐데, 어느 시점부터는 본인보다 부모의 부양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그게 재미난 삶으로 분류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으레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면 부양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애쓸 자식들이다. 결국 나도 그러한 수순을 밟고 있으니 효자 효녀 유전자는 대물림인가보다.

나는 그러한 유전자를 내 선에서 끊어냈으니 배우자와 나를 위해 더 견고하게 노후를 준비해야한다. 노후 대비를 다 하더라도 둘 중 한명을 먼저 이승으로 보내기라도 한다면 그 허전함은 남은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의 공간이다. 가족들의 탄생과 사망을 다 본 나로선 슬픔과 행복의 깊이와 농도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그렇다고 그 죽음에 대한 대비만하며 살기엔 죽기만을 바라는 삶처럼 여겨지니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될지 모르는 일상에서 슬픔보단 기쁨의 순간이 더 많았으면 한다. 그게 남겨질 사람에게 남아있을 추억도 될 테니 말이다.

내 또래라면 이 CF 광고 문구를 기억 할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광고에서도 인생을 즐기라며 말하는데, 이렇게 산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으니 제발 누리고 즐기고 표현했음 싶다.





■185_ 그러다가 생각한다. 둘만이 존재하는 완벽한 순간이다.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너랑 내가 좋아서 한 결혼이고, 그래서 같이 살 자 했으니 다른 것 필요 없고 ‘너랑 나’만 생각하며 살자고 했던 남편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문장이다.

작가의 부부의 일상들과 우리 부부의 에피소드들이 참 많이 겹쳐 보이던 책이다. 비슷한 생각과 행동들 덕에 이 책에 더 깊이 몰입을 했고, 나의 속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고 말해주는 듯한 문장들이 가득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 내가 말해도 이해 못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면 내 모자란 어휘력 때문에 표현하지 못한 내 생각들을 다 알아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우린 공장에서 찍어낸 인간1, 인간2가 아니다. 각자의 뜻하는 바와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삶의 기대치 또한 다른 것을 인정해 준다면 마주보는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부부와 타인간의 시선의 온도도 조금은 따수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크다.


이 리뷰는 출판사 허밍버드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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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박한선.구형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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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시작된 마스크 생활화는 이제 일상이 되어 생필품 구매 목록의 0순위가 되었다. 1년이 넘어선 지금은 언제 끝날지를 예측하는 언론의 보도에 콧방귀를 뀌듯 쓸데없는 소리로 여겨진다. 당장 올해? 아니 내년? 글쎄 가까운 시일 내는 아니라고 보여지니깐. 의료계 종사자도 아닌 내가 보기에도 우리의 일상에 너무 녹아든 감염균. 

작년 봄 예전에 읽었던 '페스트' 를 다시 찾아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과거엔 세계문학 명작이라고 읽었다면 다시 읽어보면서부터 나도 어쩌면 이 시대속의 어떤 이가 되는 건 아닐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본 기억이 있다.

계속 변해가며 견고해지는 감염병의 온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 보기로 한다.


■ 뭔가 이상한데도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격다짐으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대부분 아주 유치한 원인을 들이댑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국민성'이죠. ... ... 이렇게 서로 병립할 수 없는 음모론이 난무합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미국인 네명 중 한명이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습니다.

음모론. 그리고 여론 흔들기. 이런 사건들과 기사들은 대기업들이나 정치적인 사건을 두고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쓰이는 단골 용어라 여겨왔다. 그런 음모론이 이러한 감염병을 두고 나오는 단어라는게 기가 찰 뿐이다. 그리고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자극적인 결말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들을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도 집중을 해야 한다. 수 많은 정보들 중에서 정확한 펙트만을 집어내어 이해하는 것. 그것에 집중 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본 후에 보도기사 솎아내기도 괜찮은 방법이라 여겨지는 초입이었다.


​■ 코로나-19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조상의 삶, 우리 조상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인류가 역병을 접했을 때 보이던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 '우리 안의 원시인' 입니다.

사회적 갈등. 심리적 불안. 오늘을 살아오면서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산 건 아니다. 우리는 탄생의 순간부터 다양한 균속의 일부가 되어 자라났다. 과거 오랜 시간동안 생존해왔을 감염균도 있을테고, 그 질긴 인연의 고리를 끊고자 개발된 감염균 퇴치 항생제를 몸에 투여하면서 인간은 좀 더 우월한 생명체로 살아왔다. 우리가 손에 꼽기도 힘들도록 수 없이 앓아온 감기부터 시작하여 그 나이 또래들이 한번씩 앓는다는 수두나 수족구까지. 과거엔 치사율이 높았더라도 지금은 치료제가 개발되어 병원 주사 한방이면 끝이나는 단순 과정으로서의 절차로 오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우리는 과거 인류가 느꼈던 많은 갈등을 무시해선 안되겠지. 우리 이후의 세대가 과거 인류의 기록을 찾아볼 땐 똑같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는거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 애써 개발한 항생제도 결국 다양한 내성균을 양산했지만, 그래도 항생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항생제 덕을 참 많이 본 나로서는 내성균보단 맨몸으로 버티는게 더 두려운 순간으로 여겨진다. 인생의 큰 굴곡 없이 살아왔지만 잔잔한 너울은 무시 할 수 없더라. 잦은 잔병치레와 함께 가족의 걱정과 근심이었던 나로서는 묵묵하게 감염병과 싸워 이기는 것 보다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처방받아 멀쩡해지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으니 인류의 많은 고난과 함께 개발된 치료제가 가장 고마웠던 수혜자였다.

과로를 해서 20대 초반에 대상포진에 걸렸던 악몽같은 기억은 면역력에 대한 중요성도 일깨웠지만 항생제 없이는 어찌 버티며 다시 일하러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면역력이 크게 떨어지거나 심한 염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할 텐가. 내성균에 대한 예후보다는 당장 내가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결정이 우선시 되리라 본다. 그러니 항생제가 없는 세상은 상상 그 이상으로 고난과 재난이 겹친 재앙의 핵이 될지도 모르겠다.


■ 아이가 새로 태어나거나 오래 두고 먹을 음식을 새로 만드는 것, 이렇게 중요한 일일수록 경험적 행동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게 됩니다.

의례와 관습화된 절제된 행동규약. 전통적으로 내려온 감염에 대한 대응. 예전 우리 또래는 알 거다. 배추도사 무도사나 은비까비의 전래동화 TV만화들을 보면 그 마을에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문 밖에 금줄이라며 고추나 숯, 솔잎을 볏집 사이에 엮어서 걸어두며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두었다. 그러면 그 집에는 금줄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게되고, 더욱더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게 된다. 그 시절 면역이라는 단어가 있었겠는가. 그저 세상의 빛을 본 아이에게 악한 기운이 외부로부터 깃들지 않도록 하자는 옛 선조들의 지혜가 스며든 삶의 방식이지.

그걸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생아의 면역을 위해서도, 외부의 감염균에 대한 대응을 위한 최선의 조치. 거리두기이자 자가격리와도 같은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관례와 규범 덕에 인류는 그 많은 고비를 다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모두가 모두를 혐오합니다. '나'말고는 다 더럽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감염병 상황에 부닥치면 모두 불안합니다. 누가 감염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약간의 부정적 단서만 있어도, 금세 역겨워집니다. 서로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감염병 유행에 원인 제공자라고 지목되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삿대질을 하고 눈을 흘깁니다. 강력한 처벌,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성이 차지 않으면 사적 제재에 나섭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가속화됩니다. 고리를 끊지 않으면 끔찍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미 무수하게 겪어온 일입니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는 세상이다. '나' 말고는 다 더럽다는 저자의 문장에 살짝 비틀자면, 가끔은 '나'마저 더럽다는 느낌을 주는 세상이다. 지역감염자 번호로 메겨지는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은 사라지고 감염자인 내가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더불어 다시 사회에 스며들어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되는 갉아먹고 뜯어먹는 댓글과 혐오성 발언들. 최선을 다해 방역하고 조심하며 애써왔던 순간이 감염자와 동선이 겹쳤고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보람 없는 시간. 

저자는 프롤로그 말미에 이런 이야길 했다. '우리는 분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막혔고, 앞에는 아무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있습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가. 또, 이 또한 얼마나 절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문장인가. 


뭐, 인류가 겪은 어떤 팬데믹도 단기간에 종결된 적이 없음을 미리 이야길 해주었으니 짤아도 몇 년, 길면 수백 년 감당해야 할 몫이긴 하다. 1년이 지옥같았고, 1년을 넘긴 지금은 익숙함에 젖어들어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마스크 이전의 삶이 어색하고 낯설기만하다. 오죽하면 TV재방송을 볼때 길거리의 시민들이 얼굴이 노출(?)된 채로 지나는걸 볼 때 이 녹화는 코로나 사태 이전인가보다 라는 날짜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페스트'에서는 페스트균이 졀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있을 수 있다고 했다. 꾸준히 살아남아있다 또 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름돋는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게 픽션같지만 팩트로 다가온다. 


감염병을 중심에 두고, 인류학 / 진화학 / 종교학 / 면역학 등 다양한 분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느 하나 배제할 만한 학문이 없었다. 인류가 만들었으며 사회가 키웠고 미래엔 더 복잡한 지도를 그려가며 확대해 나갈 진득하고 끈덕한 인류와의 대립적 정체. 같은 인류라면 말이라도 하고 설득이라도 할 텐데, 이 균은 무언(無言)의 형태로 분열하고 번식하며 생을 이어간다. 그래서 더 환장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가 아니다. 기초 과학만 아는 정규교육만을 받아온 평범한 사람1에 불과하다. 의료계 종사자도, 과학분야 발전에 기여하는 인물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이가 감염병에 대해 좀 더 수월하게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기록들을 뒤져보는 수고로움 없이 책 한권으로 이해하기엔 참 괜찮은 페이지들의 조합이다.


다만 에필로그에서 말한 어두운 미래에 나왔던 페스트의 문장이 바로 코앞의 미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덮게 된다.


◎ 이 책은 창비 출판사의 스위치 서평단을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고 기록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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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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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었던 두 번째 엔딩에서 다시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요 근래 흥미있게 읽었던 작품들의 또 다른 엔딩을 이야기했던 단편집들인데 거기서 만난 김중미 작가의 소설 '모두 깜언'은 과거 초등학교 방과후 글쓰기 선생님을 우연찮게 만나 반가움에 눈이 커지고 말이 빨라지는 그런 반가움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또 다시 작품과 인연이 되어 곧 출간 될 새로운 책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다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였던 소설의 1970년대 은강은 다시 지우, 강이, 여울이의 이야기로 현재의 은강을 들려주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로 밀려난 은강은 여전히 할머니, 어머니, 딸들의 세대를 이어가는 삶의 터전임은 변함이 없다. 근현대사를 버텨왔고 또 달라질 내일을 기다리는 은강에서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38) 우리의 삶은 영화에서처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구차하고 힘들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이 악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 주연과 조연으로 어찌 나누겠는가. 모두가 각각의 단편 영화 하나씩 찍으며 아주 굵고 짙은 굴곡을 지닌 주인공으로 살아감을 느낀다. 은강을 배경삼아 각각의 옴니버스 단편들이 모여 아주 스케일이 큰 영화가 시작됨을 알리는 듯 한 문장이다.

 

먼저 이야기의 물꼬를 터준 지우. 지우 / 강이 / 여울이 고3 3인방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굵직한 갈래가 나뉘어져 있었다. 시작은 지우의 이야기. 아버지는 학원강사이며 지역 인터넷 신문에서 은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 엄마는 돌봄 보조교사이며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배움을 하며 은강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찾으시는 분. 아무래도 부모의 영향력은 무시 할 수 없겠지. 나고 자란 이 지역 은강을 사랑하고 주변을 살펴 볼 줄 아는 지우로 성장하게 한건 주변 어른들의 영향이 큰 듯 했다. 시작을 열어주는 지우. 이 아이가 생각하고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보다 잘난 듯 해서 얄미운 구석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다 바른 말이라 미워할 수 없는 똑순이라 느껴졌다.

 

■ 41) 나는 언니의 체념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언니의 선택을 믿고 싶다. 나의 북극성은 언니였다. 나는 언니가 선택해 가는 길을 지지하고 싶다.

 

꿈과 현실은 늘 멀찍이 떨어져있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 듯 한 인물. 언니는 영화감독을 꿈꾸었고, 현실에서 원하는 꿈은 9급 공무원이다. 왜 전부 공무원을 희망하냐는 동생 지우의 이야기에 언니는 지금 우리 나라의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을 알려주는 듯 했다. 공무원은 일단 학력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이 없이 시작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은강에서 살고있는 자신들 처럼 이른바 백 없는 사람도 유일하게 공정한 경쟁을 제공하는 것임을 동생에게 일러주었다.

 

꿈이나 전공이야말로 돈 있는 애들이나 꾸는 것이라며 알려주는데 왠지 진학을 고민하던 고3때와 진로가 아니라 진짜 먹고 살아가는 것에 고민하던 나의 대학 졸업반 시절이 떠올랐다. 3때엔 막연히 대학을 가고 하고팠던 공부를 하는게 당연하다 싶었지만 당장 수중에 쥐어진 돈에 대한 걱정을 해야하니 꿈을 찾아가지 못했고, 대학 졸업반 시절엔 전공을 따라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현실 넘치는 이야기를 하며 취업이 꿈이자 목표로 변했던 것 같다. 10년도 더 이전인 그때와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꼈다.

 

꿈은 바라지도 않고, 정규와 비정규의 갈림길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갈망하는 모습이 참 아쉬웠다. 요즘 학교에서는 장래희망이 뭔지 진로가 뭔지 말하면 다들 유투버나 공무원을 말한다 하더라. 돈을 한순간에 많이 벌거나 안정적인 직장만을 바라는 아이들. 아이들의 생각이 잘못 된게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속에서 자라다보니 엄마아빠, 이모삼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걸 보며 자랐으니 그게 제일 안정적이고 이탈 없는 인생 살이라 느끼지 않았을까. 공무원이 되어도 똑같은 사람들간의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이라 태움도 있고 사건이 없는 구성원이 아닌데도 일단 되고나면 자진퇴사 아니고서야 철밥통이라 하는 속된 말은 예나 지금이나 쭈욱 지속되는 듯 하다.

 

꿈만을 쫒는 미련함도, 현실을 자각하고 그 속에서 맞춰가는 인생도 다 애쓰는 청춘이다. 그래서 지우는 무조건적으로 언니를 지지해주려 하는게 아닐까.

 

■ 49) 은화동은 내 청춘의 화양연화야. 초등학교 때 오라비랑 놀던 골목,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놀던 곳도 그대로지. 집에서 은강방직까지 걸어 다니던 길도 그대로고. 해고된 뒤 노동교회에 있을 때는 경찰들이 우리를 감시했단 말이야. 누가 뭐래도 이 은화동 골목은 내가 잘 알지. 숨바꼭질하듯 요리조리 피해 다녔어. 골목마다 추억이 새겨져 있고, 나랑 친구들이 흘린 피눈물이 고여 있어.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녀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은강이 품고있는 세월의 기록이기도 했다. 은강방직의 노동자로 살아온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 연재되고있는 은강의 연대기 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도 있을 법한 해고노동자들의 긴 싸움. 너무 현실같아서 마음이 더 쓰이는 이모할머니의 외로운 투쟁같았다. 많은 유혹이 있었을거다. 애썼다고 이정도면 정말 노력 많이 한거니깐 이제 그만하자고 주변에서 말리는 분들도 더러 있었을거다. 그럼에도 이모할머니의 삶을 받쳐가며 공부하며 노력했던 이유는 이러한 부당한 것들이 이모할머니로서 끝이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으리라 보여진다. 포기하면 사측은 그 선례를 기반으로 하여 현재의 노동자에게 똑같은 방식을 고수할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까지 싸워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 사측과 노동자의 불공평한 관계는 당신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언론이나 주변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대접받고 싶으며 그동안 행해온 부당함에 사측에게 사과를 받고싶고 당연했던 권리를 찾으려는 것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삶이라 하지만 소설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그 사람다운게 참 어렵다.

 

■ 134) 언젠가는 언니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정집 아이도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 동네에 산다고해서 모두가 같은 조건과 환경속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만큼 다양한 가정형태로 살고 그 안에서도 또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을 품고 살다보니 속속들이 모든걸 이해할 순 없는 것. 부모가 다 곁에 있다고해서 부유하거나 행복하지도 않고, 부모가 없다고해서 불행하고 삶의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픔의 깊이와 넓이가 멀찍이 바라 볼때와 발목이 젖어들어 그 속으로 들어갔을때엔 확연히 다른 법. 그러니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누가 더 암울하고 누가 덜 걱정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등수매기기는 하지 않았음 좋겠다. 정민이도, 지우도 슬픔의 카테고리만 다를 뿐 모두가 마음 한 켠에 주먹만한 슬픔 덩어리 하나씩은 갖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길 바란다. 정민이나 지우나 지금의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알겠지. 너도 너 나름대로 애쓰고, 나도 나 나름대로 애닳는 슬픔이 있다고.

 

■ 229)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대학에 가서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줄은 몰랐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눈부신 결과를 기대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단계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나만 잘하고 나의 가치관만 확고하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빛을 보진 않았다. 은강 안에서 똑부러지고 뛰어나다 한들 은강 밖을 벗어났을땐 또 다른 환경에서 적응을 해야만했다. 더 많은 기회를 통해 미리 시각을 넓힌 주변 친구들. 재력에서 기반된 능력 높이뛰기를 한 것에 비해 한울은 그 발판 조차 없는 상황. 엄마가 보기에 아들이 철없이 방황한다고 치부했던 건 그 또래가 겪는 당연한 고뇌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 한울은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다시 시작할 시작점을 찾았다는 것에 기특함이 느껴졌다. 다시 시작할 시작점을 찾았다는건 돌고도는 미로같아보여도 결국 출구를 향해 빠져나갈 의욕이 생겼다는 거니까.

 

■ 239) 그렇지만 내 주변에 게으른 사람은 별로 없어. 네가 언젠가 말했지? 가난이 가진 원심력이 대단하다고. 근데 가난이 진짜 힘이 셀까?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 거길 빠져나오기 위한 사다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원해서 꿰어진 가난의 고리는 아니다. 어떻게든 아등바등 허우적거려서라도 그 고리를 끊고 나가고 싶어하는건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걸 끊어내는 가위 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마트에서 가위를 쓰려고 가위를 사도 아주 꼼꼼하게 봉합이되어있는 가위. 이걸 자르려면 또 다른 가위가 필요한 허탈한 상황.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지우가 했던 말에 여울이도 공감을 할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린다고 기회는 오지 않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기다리기 보단 무엇이라도 해보며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더 많다. 더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이 팔을 뻗는 그 움직임의 파동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같이 움직여주는 법을 배우며 함께 힘을 보태는 거겠지.


■ 241) 사람들은 주변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잖아.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지. 눈길의 가장자리가 더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우리처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보고 더 빛날 수 있잖아.

 

지우와 여울이의 대화에서도 다른 온도를 느낀다. 늘 주변을 살피고 함께 일어서려는 지우와 어떻게서든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좀 더 냉철해지는 여울을 보면 다 그럴수 있겠구나 싶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나는 두 아이의 의견 모두 존중하고싶다. 다 맞는 말이니깐.

 

■ 244) 나는 단지 평범한 사람, 딱 중간쯤으로 사는 게 목표다. 그런데 그 목표로 가는 길도 수월치 않다.

 

여울이가 원하는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목표. 남들 다 하는 중간쯤. 그리고 사람답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남들처럼. 가난이 가진 원심력을 벗어나고픈 간절함을 품은 '평범함'이라는 단어. 그래서 더욱 아등바등 전교1등에 목을 메고, 일류 대학보다 교대를 꿈꾸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파하는 아이. 그렇게 해야만 은강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공했다, 장하다는 뜻이 되기도 하니까. 여기 은강을 벗어나고파 하니 어쩌면 여울이가 그토록 원하는 '참 잘했어요' 칭찬은 티 안나는 조용한 쓰담쓰담이지 않을까? 어려운 환경에서 잘컸다는 도장마저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내가 아는 동네 동생 여울이라면 잘 하고 있다는 등 쓰담쓰담으로 조용히 응원을 해주고팠다.

 

■ 354) 세상이 갑자기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거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수찬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슬픈 기억은 빨리 잊고 싶어 한다. 고통은 늘 당사자만의 몫이다.

 

수찬이를 통해 청소년들의 아르바이트 실태를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수찬이도 느꼈을 주변의 시선. 사고치는 아이들. 이른바 날나리 문제아들만의 돈벌이 수단으로 오토바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비뚤어진 시각.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수찬이는 주변 라이더 형들을 통해 가지 말아야 할 길과 닮아보고픈 삶의 의욕을 배웠다.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는 사람도 있었고, 청소년이더라도 올바른 대우를 해주며 법의 제도 안에서 그에 맞는 수당을 지급하는 고용주를 통해 자신이 사회에 필요로한 구성원임을 일깨워주는 부분을 보면 현 시대와 책 속의 시대는 참 많이 닮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을 통해 수찬이도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있는 현 시대의 문제점들을 둘러볼 기회를 얻은 듯해 다행이라 싶었다. 그저 작은 웅덩이속에서 허우적거렸다면 수찬이는 은강팸에서 깊게 파고들었던 가난을 상품화시켜 허울좋게 포장하려 했던 사건을 시작으로 동네 개발프로젝트며 또래집단에서 만나게된 다문화 가정, 취업을 고민하는 또래 형누나의 고민들, 외국인 노동자 누나, 보육교사 누나와 친구 엄마의 다단계, 또래가 느끼는 진로에 대한 고민. 그리고 좀 더 크게 확장하여 다른 지역이지만 같이 고민하고 힘을 보태고픈 세월호의 이야기까지. 마침 오늘이 그날이라 더 마음이 가는 노란 리본의 기억까지.

 

잊고 모른척하면 살아는 지겠지만 잊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기위해 마음을 모으는 방식을 배운 수찬이는 은강팸과 이어진 인연이 참 감사한 사회생활 공부 같이 보였다.

 

■ 371) 아파트는 층수와 넓이로 타인과 자신의 부를 비교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함이 그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규격화된 창문의 디자인을 통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때로는 남들보다 낫다는 위로를 받는다.

 

아파트 층수와 넓이로 비교되는 부의 무게. 예전에 언니가 가르치던 유치원생 아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막만한 아이들이 먼저 하는 말이 '너 어느 아파트 살아?'라고 시작되고, '너네 엄마는 무슨 차 타?'라며 스스럼 없던 모습에 놀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임대아파트 아이들,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 아이들로 나뉘어지는 놀이의 무리들을 보며 저리 작은 아이들부터가 그런데 어른들은 오죽할까 라는 말을 했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깐 다들 그렇게만 보는 거겠지 싶다가도 모두가 '다들'이라는 착각속에만 있어 다름을 상품화 시키려는 모습. 부의 상품화보다 가난의 상품화가 더 자극적인 소재라 요상하게 비꼬아서 보는 눈길. 생각의 고리를 엮어가다보면 그게 더 가난함을 부끄럽게 만들고 숨어버리게 만드는건 아닐까 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남들의 이목을 더 중시하는 삶을 개선 할 수 없고, 가난을 해소할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사회라면 적어도 그 것이 하찮음으로 분류되진 않았음 한다. 가난하다고 꿈도 못 꾸고, 미래가 없다고 단정짓는 청년이 없었음 좋겠고, 정말 바르게만 산다면 사람답고, 사람대접 받는 삶의 의욕을 돋우어주는 곳이면 좋겠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데 바빴다. 지금에서야 보면 반복되는 삶인데 뭐 그리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 생활에 적응된지도 한참인데, 틈을 안 만들고 눈 돌려 주변을 볼 생각조차 없던 경주마처럼 사는게 편해졌나보다.

 

작가가 들여주었던 청소년 아르바이트며, 다단계,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청춘, 여성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것들을 모두 내가 겪어온 시간의 키워드인데 잊어버리고픈 마음이었나보다. 오늘을 살아오면서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 사건들인데 모른척 하지 말자. 모른척 하기엔 나의 청춘이 알고, 당신들의 젊음이 엮인 일이니깐. 그리고 내 동생들이나 자라나는 내 조카들도 슬픔의 고리처럼 엮일수 있으니 늘 기억하고 잊지말고 내 손길이 닿길 원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내 손을 빌려줄 준비를 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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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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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용하는 온라인 인터넷 서점의 소설 MD님은 “살아남은 모든 여성에게 존경과 사랑을”이라는 문구로 소개를 했다.

 

 

심시선이라는 연결고리를 중심으로 이뤄진 가족의 이야기. 어머니이고 할머니인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기점으로 남들과는 다른 제사를 지내며 심시선 여사를 기억하는 이야기이다. 두 번의 결혼과 다른 성으로 이뤄진 자식들. 그리고 그녀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억하는 손주들.

그 시절 여인 중 가장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 심시선. 예술가이면서 비극적 천재화가의 뮤즈. 방송인이면서, 칼럼리스트이고, 통쾌한 언변으로 세대를 아울렀던 작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사이다 발언을 해주는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득하다.

책속에서만 존재해서 아쉽고, 또 어쩌면 책속에서라도 존재해주어 감사한 그녀. 단락마다 소개되던 그녀의 인터뷰 내용과 칼럼, 자전 소설의 짤막한 문장들은 하나라도 놓치기 아쉽다. 그래서인지 밑줄이 많이 그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시선으로부터,’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마음들이다.

​01_ “난 항상 할머니가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대 여자들 중에는 말야.”

그 지점에서 우윤의 의견은 지수와 갈렸다. 우윤은 할머니가 행복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만났던 심시선 가계도. 흔한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은 것. 고모들 사이에서 “....걔?”라고 불리운 심여사의 셋째 명준의 자식인 우윤. 이 10주기 제사를 이끄는 첫째 명혜의 둘째 지수. 각자가 다른 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기억들. 우리가 알던 그 시절의 흔한 할머니 상은 아니겠구나 싶은 시선의 뿌리들.

​09_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어머니의 유언 같은 말을 꼭 지키고 싶었지만 10주기 만큼은 그녀의 뿌리들다운 방식으로 추모하는 제사. 일부만 고생하며 차리고, 죽은이가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거하게 내어 두는게 아니었다. 역시 심 여사 자식들다운 발상이었다. 어찌하다보니 나의 부모 또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위해 몇 십년 동안 그리 고생을 하시는게 어린 나는 마뜩치 않았다. 이렇게 한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왜 그 많은 자식놈들 중에 나의 엄마와 아빠만 그리 고생을 하나 싶은 삐뚤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왜 진즉 이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추모하고 마음만 있다면 그게 다인데, 고생은 고생대로 했고, 주변에선 당연하게 여겼으나 그 당연함이 귀한 시간을 내어 수고로움을 감수한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왜 없었나 생각이 든다.

22_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네, 다른 사람입니다. 부모도 결국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걷어내주시기야 해야겠지만, 가능성이 조금 번쩍대다 마는지 오래 타는지 저가 알아서 확인 하도록 두십시오.

심 여사가 1984년 초청된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들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들을 빌어 볼 때 다섯 손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걸 어른들이 굳이 조작하려 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느끼기도 했다.

회사에서 뜻하지 않게 염산테러를 당했지만 꿋꿋하게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화수나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떠난 하와이에서 만난 이의 도움으로 무지게 사진을 얻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려할 때 마음속에 감춰있던 움직임에 반응하고 칠레 연안 유조선에서 야생동물 구조를 위해 비행기 표를 바꾼 지수. 어릴 때 크게 아팠던 것에 대한 기억에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파도를 타면서 이겨내려 애쓴 우윤. 엄연히 보면 심 여사의 핏줄이 아니지만 그녀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인 듯한 삶을 사는 규림. 곤충 학자인 아빠를 닮은건지 새에 빠져있지만 가치관만은 뚜렷한 해림까지.

내가 보기엔 모두 ‘시선’스럽게 잘 살아가고있고, 각자 처한 환경에서 잘 버텨주는 거라 보였다.

31_ “심시선 여사를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지수의 행동을 보고 명혜가 했던 말. 그래, 심시선 여사의 손주라면 어련히 잘 할 거라는 그런 암묵적인 믿음 같은 것.

가부장제가 필요 없는 곳. 아버지의 성을 따라 살든 심 여사의 성을 따라 살든 어쨌든 살아가는 것에는 이름 앞에 붙은 성씨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

여자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됨을 상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로서 살아감에 스스로를 던져도 좋다는 먼저 살아온 선배가 해주는 이야기들의 기록.

과거의 1세대 심시선 여사가 했던 말들은 3세대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이 살아가는데 기초가 되어줄 귀한 문장들이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요즘 치부되는 꼰대적 발상이 아니어 좋다. 그 시절엔 튀는 언변이라 하겠지만 결국 꼭 필요한 생각들. 그래 우리 꼰대적 인생 말고 ‘시선’적 인생을 살아보자. 무엇을 하더라도 실패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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