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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최근에 읽었던 ‘두 번째 엔딩’에서 다시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요 근래 흥미있게 읽었던 작품들의 또 다른 엔딩을 이야기했던 단편집들인데 거기서 만난 김중미 작가의 소설 '모두 깜언'은 과거 초등학교 방과후 글쓰기 선생님을 우연찮게 만나 반가움에 눈이 커지고 말이 빨라지는 그런 반가움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또 다시 작품과 인연이 되어 곧 출간 될 새로운 책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다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였던 소설의 1970년대 은강은 다시 지우, 강이, 여울이의 이야기로 현재의 은강을 들려주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로 밀려난 은강은 여전히 할머니, 어머니, 딸들의 세대를 이어가는 삶의 터전임은 변함이 없다. 근현대사를 버텨왔고 또 달라질 내일을 기다리는 은강에서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38) 우리의 삶은 영화에서처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구차하고 힘들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이 악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 주연과 조연으로 어찌 나누겠는가. 모두가 각각의 단편 영화 하나씩 찍으며 아주 굵고 짙은 굴곡을 지닌 주인공으로 살아감을 느낀다. 은강을 배경삼아 각각의 옴니버스 단편들이 모여 아주 스케일이 큰 영화가 시작됨을 알리는 듯 한 문장이다.
먼저 이야기의 물꼬를 터준 지우. 지우 / 강이 / 여울이 고3 3인방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굵직한 갈래가 나뉘어져 있었다. 시작은 지우의 이야기. 아버지는 학원강사이며 지역 인터넷 신문에서 은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 엄마는 돌봄 보조교사이며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배움을 하며 은강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찾으시는 분. 아무래도 부모의 영향력은 무시 할 수 없겠지. 나고 자란 이 지역 은강을 사랑하고 주변을 살펴 볼 줄 아는 지우로 성장하게 한건 주변 어른들의 영향이 큰 듯 했다. 시작을 열어주는 지우. 이 아이가 생각하고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보다 잘난 듯 해서 얄미운 구석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다 바른 말이라 미워할 수 없는 똑순이라 느껴졌다.
■ 41) 나는 언니의 체념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언니의 선택을 믿고 싶다. 나의 북극성은 언니였다. 나는 언니가 선택해 가는 길을 지지하고 싶다.
꿈과 현실은 늘 멀찍이 떨어져있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 듯 한 인물. 언니는 영화감독을 꿈꾸었고, 현실에서 원하는 꿈은 9급 공무원이다. 왜 전부 공무원을 희망하냐는 동생 지우의 이야기에 언니는 지금 우리 나라의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을 알려주는 듯 했다. 공무원은 일단 학력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이 없이 시작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은강에서 살고있는 자신들 처럼 이른바 백 없는 사람도 유일하게 공정한 경쟁을 제공하는 것임을 동생에게 일러주었다.
꿈이나 전공이야말로 돈 있는 애들이나 꾸는 것이라며 알려주는데 왠지 진학을 고민하던 고3때와 진로가 아니라 진짜 먹고 살아가는 것에 고민하던 나의 대학 졸업반 시절이 떠올랐다. 고3때엔 막연히 대학을 가고 하고팠던 공부를 하는게 당연하다 싶었지만 당장 수중에 쥐어진 돈에 대한 걱정을 해야하니 꿈을 찾아가지 못했고, 대학 졸업반 시절엔 전공을 따라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현실 넘치는 이야기를 하며 취업이 꿈이자 목표로 변했던 것 같다. 10년도 더 이전인 그때와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별반 달라진게 없음을 느꼈다.
꿈은 바라지도 않고, 정규와 비정규의 갈림길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갈망하는 모습이 참 아쉬웠다. 요즘 학교에서는 장래희망이 뭔지 진로가 뭔지 말하면 다들 유투버나 공무원을 말한다 하더라. 돈을 한순간에 많이 벌거나 안정적인 직장만을 바라는 아이들. 아이들의 생각이 잘못 된게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속에서 자라다보니 엄마아빠, 이모삼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걸 보며 자랐으니 그게 제일 안정적이고 이탈 없는 인생 살이라 느끼지 않았을까. 공무원이 되어도 똑같은 사람들간의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이라 태움도 있고 사건이 없는 구성원이 아닌데도 일단 되고나면 자진퇴사 아니고서야 철밥통이라 하는 속된 말은 예나 지금이나 쭈욱 지속되는 듯 하다.
꿈만을 쫒는 미련함도, 현실을 자각하고 그 속에서 맞춰가는 인생도 다 애쓰는 청춘이다. 그래서 지우는 무조건적으로 언니를 지지해주려 하는게 아닐까.
■ 49) 은화동은 내 청춘의 화양연화야. 초등학교 때 오라비랑 놀던 골목,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놀던 곳도 그대로지. 집에서 은강방직까지 걸어 다니던 길도 그대로고. 해고된 뒤 노동교회에 있을 때는 경찰들이 우리를 감시했단 말이야. 누가 뭐래도 이 은화동 골목은 내가 잘 알지. 숨바꼭질하듯 요리조리 피해 다녔어. 골목마다 추억이 새겨져 있고, 나랑 친구들이 흘린 피눈물이 고여 있어.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녀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은강이 품고있는 세월의 기록이기도 했다. 은강방직의 노동자로 살아온 이모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 연재되고있는 은강의 연대기 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도 있을 법한 해고노동자들의 긴 싸움. 너무 현실같아서 마음이 더 쓰이는 이모할머니의 외로운 투쟁같았다. 많은 유혹이 있었을거다. 애썼다고 이정도면 정말 노력 많이 한거니깐 이제 그만하자고 주변에서 말리는 분들도 더러 있었을거다. 그럼에도 이모할머니의 삶을 받쳐가며 공부하며 노력했던 이유는 이러한 부당한 것들이 이모할머니로서 끝이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으리라 보여진다. 포기하면 사측은 그 선례를 기반으로 하여 현재의 노동자에게 똑같은 방식을 고수할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까지 싸워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 사측과 노동자의 불공평한 관계는 당신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언론이나 주변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대접받고 싶으며 그동안 행해온 부당함에 사측에게 사과를 받고싶고 당연했던 권리를 찾으려는 것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삶이라 하지만 소설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그 사람다운게 참 어렵다.
■ 134) 언젠가는 언니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정집 아이도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 동네에 산다고해서 모두가 같은 조건과 환경속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만큼 다양한 가정형태로 살고 그 안에서도 또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을 품고 살다보니 속속들이 모든걸 이해할 순 없는 것. 부모가 다 곁에 있다고해서 부유하거나 행복하지도 않고, 부모가 없다고해서 불행하고 삶의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픔의 깊이와 넓이가 멀찍이 바라 볼때와 발목이 젖어들어 그 속으로 들어갔을때엔 확연히 다른 법. 그러니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누가 더 암울하고 누가 덜 걱정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등수매기기는 하지 않았음 좋겠다. 정민이도, 지우도 슬픔의 카테고리만 다를 뿐 모두가 마음 한 켠에 주먹만한 슬픔 덩어리 하나씩은 갖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길 바란다. 정민이나 지우나 지금의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알겠지. 너도 너 나름대로 애쓰고, 나도 나 나름대로 애닳는 슬픔이 있다고.
■ 229)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대학에 가서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줄은 몰랐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눈부신 결과를 기대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단계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나만 잘하고 나의 가치관만 확고하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빛을 보진 않았다. 은강 안에서 똑부러지고 뛰어나다 한들 은강 밖을 벗어났을땐 또 다른 환경에서 적응을 해야만했다. 더 많은 기회를 통해 미리 시각을 넓힌 주변 친구들. 재력에서 기반된 능력 높이뛰기를 한 것에 비해 한울은 그 발판 조차 없는 상황. 엄마가 보기에 아들이 철없이 방황한다고 치부했던 건 그 또래가 겪는 당연한 고뇌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 한울은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다시 시작할 시작점을 찾았다는 것에 기특함이 느껴졌다. 다시 시작할 시작점을 찾았다는건 돌고도는 미로같아보여도 결국 출구를 향해 빠져나갈 의욕이 생겼다는 거니까.
■ 239) 그렇지만 내 주변에 게으른 사람은 별로 없어. 네가 언젠가 말했지? 가난이 가진 원심력이 대단하다고. 근데 가난이 진짜 힘이 셀까?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 거길 빠져나오기 위한 사다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원해서 꿰어진 가난의 고리는 아니다. 어떻게든 아등바등 허우적거려서라도 그 고리를 끊고 나가고 싶어하는건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걸 끊어내는 가위 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마트에서 가위를 쓰려고 가위를 사도 아주 꼼꼼하게 봉합이되어있는 가위. 이걸 자르려면 또 다른 가위가 필요한 허탈한 상황.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지우가 했던 말에 여울이도 공감을 할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린다고 기회는 오지 않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기다리기 보단 무엇이라도 해보며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더 많다. 더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이 팔을 뻗는 그 움직임의 파동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같이 움직여주는 법을 배우며 함께 힘을 보태는 거겠지.
■ 241) 사람들은 주변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잖아.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지. 눈길의 가장자리가 더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우리처럼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보고 더 빛날 수 있잖아.
지우와 여울이의 대화에서도 다른 온도를 느낀다. 늘 주변을 살피고 함께 일어서려는 지우와 어떻게서든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좀 더 냉철해지는 여울을 보면 다 그럴수 있겠구나 싶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나는 두 아이의 의견 모두 존중하고싶다. 다 맞는 말이니깐.
■ 244) 나는 단지 평범한 사람, 딱 중간쯤으로 사는 게 목표다. 그런데 그 목표로 가는 길도 수월치 않다.
여울이가 원하는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목표. 남들 다 하는 중간쯤. 그리고 사람답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남들처럼. 가난이 가진 원심력을 벗어나고픈 간절함을 품은 '평범함'이라는 단어. 그래서 더욱 아등바등 전교1등에 목을 메고, 일류 대학보다 교대를 꿈꾸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파하는 아이. 그렇게 해야만 은강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공했다, 장하다는 뜻이 되기도 하니까. 여기 은강을 벗어나고파 하니 어쩌면 여울이가 그토록 원하는 '참 잘했어요' 칭찬은 티 안나는 조용한 쓰담쓰담이지 않을까? 어려운 환경에서 잘컸다는 도장마저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내가 아는 동네 동생 여울이라면 잘 하고 있다는 등 쓰담쓰담으로 조용히 응원을 해주고팠다.
■ 354) 세상이 갑자기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거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수찬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슬픈 기억은 빨리 잊고 싶어 한다. 고통은 늘 당사자만의 몫이다.
수찬이를 통해 청소년들의 아르바이트 실태를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수찬이도 느꼈을 주변의 시선. 사고치는 아이들. 이른바 날나리 문제아들만의 돈벌이 수단으로 오토바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비뚤어진 시각.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수찬이는 주변 라이더 형들을 통해 가지 말아야 할 길과 닮아보고픈 삶의 의욕을 배웠다.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는 사람도 있었고, 청소년이더라도 올바른 대우를 해주며 법의 제도 안에서 그에 맞는 수당을 지급하는 고용주를 통해 자신이 사회에 필요로한 구성원임을 일깨워주는 부분을 보면 현 시대와 책 속의 시대는 참 많이 닮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을 통해 수찬이도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있는 현 시대의 문제점들을 둘러볼 기회를 얻은 듯해 다행이라 싶었다. 그저 작은 웅덩이속에서 허우적거렸다면 수찬이는 은강팸에서 깊게 파고들었던 가난을 상품화시켜 허울좋게 포장하려 했던 사건을 시작으로 동네 개발프로젝트며 또래집단에서 만나게된 다문화 가정, 취업을 고민하는 또래 형누나의 고민들, 외국인 노동자 누나, 보육교사 누나와 친구 엄마의 다단계, 또래가 느끼는 진로에 대한 고민. 그리고 좀 더 크게 확장하여 다른 지역이지만 같이 고민하고 힘을 보태고픈 세월호의 이야기까지. 마침 오늘이 그날이라 더 마음이 가는 노란 리본의 기억까지.
잊고 모른척하면 살아는 지겠지만 잊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기위해 마음을 모으는 방식을 배운 수찬이는 은강팸과 이어진 인연이 참 감사한 사회생활 공부 같이 보였다.
■ 371) 아파트는 층수와 넓이로 타인과 자신의 부를 비교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함이 그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규격화된 창문의 디자인을 통해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때로는 남들보다 낫다는 위로를 받는다.
아파트 층수와 넓이로 비교되는 부의 무게. 예전에 언니가 가르치던 유치원생 아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막만한 아이들이 먼저 하는 말이 '너 어느 아파트 살아?'라고 시작되고, '너네 엄마는 무슨 차 타?'라며 스스럼 없던 모습에 놀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임대아파트 아이들,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 아이들로 나뉘어지는 놀이의 무리들을 보며 저리 작은 아이들부터가 그런데 어른들은 오죽할까 라는 말을 했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깐 다들 그렇게만 보는 거겠지 싶다가도 모두가 '다들'이라는 착각속에만 있어 다름을 상품화 시키려는 모습. 부의 상품화보다 가난의 상품화가 더 자극적인 소재라 요상하게 비꼬아서 보는 눈길. 생각의 고리를 엮어가다보면 그게 더 가난함을 부끄럽게 만들고 숨어버리게 만드는건 아닐까 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남들의 이목을 더 중시하는 삶을 개선 할 수 없고, 가난을 해소할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사회라면 적어도 그 것이 하찮음으로 분류되진 않았음 한다. 가난하다고 꿈도 못 꾸고, 미래가 없다고 단정짓는 청년이 없었음 좋겠고, 정말 바르게만 산다면 사람답고, 사람대접 받는 삶의 의욕을 돋우어주는 곳이면 좋겠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데 바빴다. 지금에서야 보면 반복되는 삶인데 뭐 그리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 생활에 적응된지도 한참인데, 틈을 안 만들고 눈 돌려 주변을 볼 생각조차 없던 경주마처럼 사는게 편해졌나보다.
작가가 들여주었던 청소년 아르바이트며, 다단계,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청춘, 여성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것들을 모두 내가 겪어온 시간의 키워드인데 잊어버리고픈 마음이었나보다. 오늘을 살아오면서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시대를 반영한 사건들인데 모른척 하지 말자. 모른척 하기엔 나의 청춘이 알고, 당신들의 젊음이 엮인 일이니깐. 그리고 내 동생들이나 자라나는 내 조카들도 슬픔의 고리처럼 엮일수 있으니 늘 기억하고 잊지말고 내 손길이 닿길 원하는 곳이라면 언제든 내 손을 빌려줄 준비를 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