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 -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가 아닌 온전한 나로 서기
정연희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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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딸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부모로 온전한 내 이름 석자를 들으며 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더라. 오히려 10대 시절 학생의 신분이었을때가 더욱 온전한 '나'로서 불리워지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저자 정연희는 자신의 딸이 마냥 어리다 여겼는데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생각해보니 딸아이는 품속의 아이가 아니라 엄연한 성인이었던걸 모른척하고팠던 부모였다. 그 한마디가 기점이 되어 작가는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어온 것들을 보태어 딸에게 해주고픈 말들. 이제는 엄마로서 여자로서 그리고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과 격려의 말들을 해주었다.


​006_ 딸의 인생엔 늘 엄마의 삶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느 구석엔가 숨어 있다가 모습을 나타낸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도 나의 엄마가 늘 어른거렸고, 딸도 살아가며 나의 그림자를 수없이 만나리라 생각한다.


싫든 좋든 나는 엄마 딸이라는 걸 증명하는 이른바 엄마의 복사본같은 느낌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어릴땐 이해가 되지 않던 모습들도 있었으나 결국 나도 엄마의 세월을 밟아가는 삶을 살다보니 이제서야 이해가되는 부분들이 있더라. 가끔씩은 삐딱선을 타며 '왜 저렇게 살아야하지'라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결국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닮은 복사본이라 그 세월 흔적 일부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되었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했고, 그 세월 속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시대의 유행이며 그 시절의 암묵적인 룰 같은거지.

나 역시 엄마의 복사본이다. 일부는 진하게 적혀있어서 나에게도 베여있으며, 일부는 흐릿해서 복사판인 나에겐 보일듯 말듯한 흔적만 남아있는 구간도 있다.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나는 엄마의 일부이고, 또 어떻게 보면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의 사람이라는 거지.


작가의 글들을 통해 나는 엄마의 일부를 만나고, 나머지 나로서의 일부를 좀 더 진하게 따라 적어보는 순간이 되길 바라며 프롤로그를 읽었다.


017_ “남이 너를 자기 딸로 여긴다니! 그 말이 너무 싫어서 배알이 꼴린 게 아닌가 싶다!”


아마 딸 가진 모든 엄마의 영문모를 배앓이 순간이 바로 이 타이밍 일거다. 사돈될 사람과 처음 마주하는 상견례자리. 결혼을 어떻게 진행 시킬건지에 대한 의견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각자의 자식들이 커온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길 하다가 끝맺음은 이걸로 마무릴 하더라. 딸로 여기며 잘 해주겠노라, 아들로 생각하며 예뻐하겠노라는 상견례 자리에서의 고정 엔딩멘트. 알고보면 오랜 과거부터 이어진 자동완성형 문장인데 곰곰히 단어들을 곱씹어보니 마음이 안 좋으신거였겠지. 당신도 살아보니 며느리와 딸은 단어부터 다르니까. 작가는 알수없는 배앓이를 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아버지가 그러하셨더라. 작가의 한마디를 통해 다시 떠올랐는데 말이야. 아빠가 그럴줄 몰랐어. 하하하.


079_ 말의 선언으로 며느리가 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한다는 말로 단박에 사랑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달콤하고 멋있는 말로 마법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린 알지 않는가? 세상은 마법의 세계, 동화의 세계가 아님을.


가끔 도리라는 기준이 말하는 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아야할까, 듣는 이가 느끼는 경계까지를 도리라 삼아야할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다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석연치않은 점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산후조리를 다 하지 못한 후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산후조리하며 힘들어하는 걸 보며 예전 며느리가 당신들을 위해 애써온 그 순간을 곱씹게된다. 그제서야 당신은 며느리가 얼마나 애썼는지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제서야 진심의 마음을 보태어 고맙다는 말을 한다. 고맙다는 말이 참 얄궂은게 단어의 표면이 불투명하고 두껍지 못하고 습자지처럼 얇고 속이 비친다는 점이다. 입모양으로 씰룩이는 고맙다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이게 진심의 따수운 단어인지 허울만 있는 단어인지 들여다 보인다는게 문제더라.

아직도 떠오르는게 올 봄에 병실에서 들었던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이다. 입도 굳어가고 혀도 바싹하니 말라서 단어 한마디 내 뱉는것도차 어려우면서도 시어머니는 당신이 많이 미안했고, 고맙다는 이야길 하셨다. 그동안 며느리 맘을 못 알아주어 많이 미안했다며 힘도 안 들어가는 손이 내 손을 잡을 땐 이렇게 달콤하고 밋었는 말을 더 이상 못 들을 듯한 느낌을 받을 땐 아쉬움이 컸다. 좀 더 마법같은 말들로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좀 더 길게 살 수 있다면 진짜 재미날텐데 결국 말은 다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어 홀로 이 흔적을 쥐고 사는 이는 더욱 더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112_ 난 늘 나 자신의 도전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그분들은 지나가는 말로 나의 도전을 믿을 수 없이 험난한 도전으로 밀어붙였다. 그 지나가는 말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슬픔과 두려움,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음을 그분들이 상상이나 하였을까 싶다.


스스로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점을 안다. 그렇지만 더 치열하게 살아도 되겠다 싶어 도전을 하게된다. 작가가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것보단 덜하겠지만 나역시도 하고픈게 있다면 한번은 시도를 하며 배우려하는 욕구가 큰 사람이다. 욕망의 덩어리가 학창시절에 샘솟았어야하는데, 늦바람인건지 다 커서 생긴다는 거다. 나이가 든 후 느낀건데 모든 배움에는 때가 있다지만 때와 함께 쩐도 있어야 됨을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도전들은 딱 내 깜냥에 맞게 하더라도 타인이 보기엔 일하고 살림살고 공부까지 하는 것이 벅차보이니 하나라도 잘 하길 바라는 잔소리로 번역이 되기도 한다. 내가 걱정이 되시는 걸까 가정에 충실치 못해서 함께 사는 이들이 옳게 대접받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시는 걸까 싶기도 해서인지 가끔은 정말 아무런 조건없는 응원이 고파지기도 한다.

201_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들다’ ‘어렵다’가 아니라 ‘참 고단한 일’이었다. 신의, 사랑, 존경이라는 좋은 단어들 뒤에는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었다.


가끔 남편과 우스개소리로 했던 말들이 있다. 내 통장 비밀번호며 간편인증 번호를 알려주며 혹여 내가 먼저 가거들랑 그거 다 챙기고, 내가 먼저 가는 것에 서운해하지말고 딱 3년만 그리워하고, 다른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 그러면 남편은 내 유언아닌 유언에 한술 더 떠서 말을 한다. 가는 거는 순서 없다며 본인이 편할라면 자기가 먼저 가겠다며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맞받아치곤 한다. 역시 당신은 내 남편이 될 자격이 충분해.ㅋㅋㅋㅋ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 어려움을 알고서도 뛰어든 둘이다. 그래서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을 감수하고 당신을 택한 거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나에게 이러한 시련과 댓가를 요구하나 싶지만 내 지랄같은 성격을 받아주기 위해 태어났기에 겸허히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의 그대여 연애5년과 결혼생활 7년을 버텨온다고 고생했소이다. 아직 버텨야 할 날이 창창하니 좀 더 애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저녁 맛있는 고기반찬을 올려봐야겠다.

262_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이전에 너는 처음부터 너였단다. 어찌 자랐든, 어떤 생김새든,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누구와 현재 살고 있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너는 네가 아닌 적이 없었단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사랑하는 딸에게 해주는 문장은 이거였다. 다른거 없다. 그냥 모든 본질의 시작은 '너'라는 것을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라는 말이다. 때때로 씌워지는 가면으로 누군지 헷갈릴 지언정 그 모든것이 나라는 점. 그러니 그 모든 순간에 등장하는 배역은 달라도 등장인물의 실명은 딱 한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너도 그렇게 믿으라는 말이었다.

엄마들은 다 그런가봐. 작가도 그러했고, 나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그녀의 문장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다보면 따뜻하면서도 물기가 스미는 듯 하다. 딸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며,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한들 엄마에겐 가장 소중하고 소담스러운 딸이니 자신이 겪어온 힘든 과정을 따라 겪지 않았음 하는 애틋함이 있었다. 작가도 아는거였다. 작가의 딸도 본인의 복사본처럼 많이 닮아있음을 알고있으니 힘들고 험한 과정은 힘껏 점프하여 지나쳐주길 바라는 거겠지.

각각의 글들은 몇해 전 내가 결혼식을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친정부모님이 봉투에 곱게 접어준 편지처럼 여겨졌고, 시간을 쪼개어 그녀의 허한 순간을 채우기 위해 나섰던 모녀 데이트같았다. 엄마가 신이나서 내 어릴적 이야기와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 듯한 오붓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페이지가 휘리릭 넘겨졌고, 여전히 나는 엄마의 귀한 딸이라는 확신을 한번 더 주는 듯 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게 맞는지 아닌지 헷갈릴때 쥐어주고픈 모든 딸들을 위한 응원의 책 같아서 책 페이지를 다시 처음으로 넘겨 표지에 적힌 제목을 매만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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