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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애용하는 온라인 인터넷 서점의 소설 MD님은 “살아남은 모든 여성에게 존경과 사랑을”이라는 문구로 소개를 했다.
심시선이라는 연결고리를 중심으로 이뤄진 가족의 이야기. 어머니이고 할머니인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기점으로 남들과는 다른 제사를 지내며 심시선 여사를 기억하는 이야기이다. 두 번의 결혼과 다른 성으로 이뤄진 자식들. 그리고 그녀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억하는 손주들.
그 시절 여인 중 가장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 심시선. 예술가이면서 비극적 천재화가의 뮤즈. 방송인이면서, 칼럼리스트이고, 통쾌한 언변으로 세대를 아울렀던 작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사이다 발언을 해주는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득하다.
책속에서만 존재해서 아쉽고, 또 어쩌면 책속에서라도 존재해주어 감사한 그녀. 단락마다 소개되던 그녀의 인터뷰 내용과 칼럼, 자전 소설의 짤막한 문장들은 하나라도 놓치기 아쉽다. 그래서인지 밑줄이 많이 그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시선으로부터,’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마음들이다.
01_ “난 항상 할머니가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대 여자들 중에는 말야.”
그 지점에서 우윤의 의견은 지수와 갈렸다. 우윤은 할머니가 행복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만났던 심시선 가계도. 흔한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은 것. 고모들 사이에서 “....걔?”라고 불리운 심여사의 셋째 명준의 자식인 우윤. 이 10주기 제사를 이끄는 첫째 명혜의 둘째 지수. 각자가 다른 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기억들. 우리가 알던 그 시절의 흔한 할머니 상은 아니겠구나 싶은 시선의 뿌리들.
09_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어머니의 유언 같은 말을 꼭 지키고 싶었지만 10주기 만큼은 그녀의 뿌리들다운 방식으로 추모하는 제사. 일부만 고생하며 차리고, 죽은이가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거하게 내어 두는게 아니었다. 역시 심 여사 자식들다운 발상이었다. 어찌하다보니 나의 부모 또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을 위해 몇 십년 동안 그리 고생을 하시는게 어린 나는 마뜩치 않았다. 이렇게 한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왜 그 많은 자식놈들 중에 나의 엄마와 아빠만 그리 고생을 하나 싶은 삐뚤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왜 진즉 이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추모하고 마음만 있다면 그게 다인데, 고생은 고생대로 했고, 주변에선 당연하게 여겼으나 그 당연함이 귀한 시간을 내어 수고로움을 감수한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왜 없었나 생각이 든다.
22_ 아이들을 움직이는 엔진은 다른 사람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네, 다른 사람입니다. 부모도 결국 다른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걷어내주시기야 해야겠지만, 가능성이 조금 번쩍대다 마는지 오래 타는지 저가 알아서 확인 하도록 두십시오.
심 여사가 1984년 초청된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들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들을 빌어 볼 때 다섯 손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걸 어른들이 굳이 조작하려 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느끼기도 했다.
회사에서 뜻하지 않게 염산테러를 당했지만 꿋꿋하게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화수나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떠난 하와이에서 만난 이의 도움으로 무지게 사진을 얻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려할 때 마음속에 감춰있던 움직임에 반응하고 칠레 연안 유조선에서 야생동물 구조를 위해 비행기 표를 바꾼 지수. 어릴 때 크게 아팠던 것에 대한 기억에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파도를 타면서 이겨내려 애쓴 우윤. 엄연히 보면 심 여사의 핏줄이 아니지만 그녀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인 듯한 삶을 사는 규림. 곤충 학자인 아빠를 닮은건지 새에 빠져있지만 가치관만은 뚜렷한 해림까지.
내가 보기엔 모두 ‘시선’스럽게 잘 살아가고있고, 각자 처한 환경에서 잘 버텨주는 거라 보였다.
31_ “심시선 여사를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지수의 행동을 보고 명혜가 했던 말. 그래, 심시선 여사의 손주라면 어련히 잘 할 거라는 그런 암묵적인 믿음 같은 것.
가부장제가 필요 없는 곳. 아버지의 성을 따라 살든 심 여사의 성을 따라 살든 어쨌든 살아가는 것에는 이름 앞에 붙은 성씨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
여자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됨을 상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로서 살아감에 스스로를 던져도 좋다는 먼저 살아온 선배가 해주는 이야기들의 기록.
과거의 1세대 심시선 여사가 했던 말들은 3세대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이 살아가는데 기초가 되어줄 귀한 문장들이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요즘 치부되는 꼰대적 발상이 아니어 좋다. 그 시절엔 튀는 언변이라 하겠지만 결국 꼭 필요한 생각들. 그래 우리 꼰대적 인생 말고 ‘시선’적 인생을 살아보자. 무엇을 하더라도 실패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