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까?

논술 시험을 준비 할 때엔 한국사회비평 파트를 매일 한 단락씩 읽어가며 칼럼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렇게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과 할 말이 많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순간 그러한 고민과 생각들 조차 피로감이 몰려옴을 느꼈다. 내가 이걸 고민하고 논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걸 알았고, 내 목소리로 인해 바뀔 세상도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어 어련히 잘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에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방관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일처럼 보다보니 문득 걱정거리가 기어 오르더라. 과연 나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확신 할 수 있는 세상인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당연히 그러지 못할거라는 뻔한 답변까지.

나는 누가봐도 소수자이며 약자의 입장이다. 도의적인 판단에서는 우세할 수도 있겠다만 현실만 놓고보면 무한한 지지를 받을 여력이 안 된다. 그래서 일단 아는 것 부터가 수반되어야 내 물음과 내 외침에 단단한 지지를 받을 것 같아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꼼꼼하게 읽어갔다.


총 3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공익을 보호할지에 대한 논의 / 불온한 사익 투쟁의 이면 / 변호사로서 바라보는 사익에 대한 견해까지. 3가지의 큰 사례 속 각각의 실재하는 사건들을 담아두었다. 체감 할 수 있던 사회적인 사건들이 담겨있으니 이해 할 수 있는 사익과 공익에 대한 사건의 갈래들. 시민의 편의, 사회적 합의, 다수의 행복이 진짜 모두가 허용할 수 있는 공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다시금 생각을 하면서 그 틈을 비집고 사익으로 한 몫 챙길 이들의 나쁜 손들에 대한 경계를 갖춰본다.



📖들어가는 글_ '그럼에도 불구하고'같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너무 극단적, 급진적, 강경일변도라면 곤란하겠지만 하여튼 택일을 해야하는 실존적 순간은 분명히 있다. 개개인 인간에게 고결하고 위대한 뭔가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강자가 지배하는 현 상태를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중립 아니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게된다. 자신은 중립이라 생각 할 지라도 결국엔 강자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것이기도 하며,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신은 우세한 쪽에 서서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얄팍한 행실인 것. 불합리한 것과 불의한 것은 알지만 그 고래싸움에 끼기 싫어 하는 무사안일한 생각을 나도 해봤기에 잘잘못을 구분 할 줄 알고, 설령 결과가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과에 순응하기보다 이것은 옳지 못한 판결로 결론지어진 사례라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스쿨미투, 국가는 가해자의 대변인이었다_ 후속 조치는 참담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자기들만 믿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권력과 계층으로 얻어지는 힘은 사회 어느곳이든 존재한다. 학생과 교사의 신분을 활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놓은 원래의 구조가 바라는 상호작용을 무시한 채 벌어지는 일들. 이러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이쪽으로만 더 악랄하게 파고들어가는 사건들을 보면 피해자만 왕따를 시키고 지들끼리 한통속인냥 연대를 하는 것에 씁쓸해질 뿐이다. 스쿨미투에 대한 것은 비단 현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반에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묵과했다. '감히'라는 높은 벽을 스스로 쌓아가며 반박 할 수도 없는 틈을 벌여놓았다. 고발은 엄두도 못 내었고, 입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쉬쉬하며 피해자들은 조용히 졸업식만을 기다렸던 그들의 눈물을 기억한다. 정보의 공개 여부도, 법꾸라지라는 악명도 감수하면서도 지들끼리 연대를 이뤄 조용히 다른 사건으로 덮여지길 바라며 알권리를 묵상시키는 검은 손들.

모두의 책임은 무책임이 되어 소송하는 동안에 저들은 아주 편히 지냈다지? 어릴때부터 생각해보던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방식을 대입해본다. 당신들의 금쪽같은 자식들이 이러한 사건에 연류되어 매번 피눈물을 흘린다면 그때도 묵과할 것인가, 그때도 법꾸라지라는 말들로 손가락질 당한다 할지라도 조용히 세상속에서 잊혀지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당신의 눈에서 피눈물이 안 흘렀기에 평생 자신은 그러한 일을 겪지 않을거라는 아주 당당한 자부심이 있기에 지금도 그냥 그렇게,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걸 보면 누가 먼저 지치느냐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싸움 같다.



📖'영혼 살인' 경비 노동자의 유언_ 피해자에게 정말 간절한 것은 그 순간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의 도움이다. 이웃들의 관심과 작은 실천이다. 방관은 결과에 있어 저마다의 몫의 책임을 남긴다. 방관은 나쁜 결과를 낳고, 또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용 형태에 대한 문제를 먼저 논해야 할까, 기본 인식의 문제를 먼저 언급하며 경비 노동자를 '머슴'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개선과 함께 사회적인 분위기의 개선하는 것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까. 직장내에서 이뤄지는 갑질과 괴롭힘이든, 직장 밖에서 근로자를 향해 쏟아지는 하대 또한 일종의 분풀이 이며 감정조절의 무능함에서 오는 무지의 표출방식이라 말해주고싶다. 넓게 보면 고용의 형태와 근로 실태 개선이 필요한 사회구조적 고름을 짜내는게 우선이겠다만 문제 자체를 직면할 때엔 사람으로서의 도리의 문제로 저마다의 책임을 분배시켜 각자의 몫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용서가 필요해 보였다. 기초적인 사회성에 대한 조화로운 삶의 방향성, 공동체의 삶에서 해선 안되는 행위,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해야하는 각자의 역할과 공동상생을 위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예의. 초등학생 때 배우고 익히던 기초적인 사회생활 법을 잊고 사는 듯 해 고인의 쓸쓸한 마지막이 더욱 안타까워졌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라_ 내가 괴롭더라도 상대방을 괴롭히는 걸 멈출 수 없는 형국이다. 국가가 '유책사유', 이혼 사유 열거주의를 택함으로써 이런 비극 상태를 조장하는 셈이다. 부부관계가 파탄 난 게 분명한데, 이 가정이 유지되면 될수록 모두의 불행만 커질 게 뻔한데 국가가 이혼을 강제로 막는다. 이혼하기 어려운 나라는 불행한 나라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다라.

저자도 인용했지만 안나 카레니나 속 이야기를 통해 행복과 불행의 양면성을 떠올려본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 속에 답이 나와있음을 느낀다. 행복한 사람들이라면 뭔들 문제가 있겠는가. 불행하기에 발치에 채이는 사사로운 것 마저도 다툼의 씨앗이 되고, 불화의 시점이 되는것이니 모두가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려면 유교적 사상의 이념이든, 사회적인 소속감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떠나서 사람답게 살도록 각자의 자유를 주는게 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누군가의 아내이며 누군가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그리 불리워지기 이전에 나로서의 존재 자체의 목적이 흐릿해져서는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에 갖힌 채로,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평범치 못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기에 어떻게든 붙들고 살아야한다 생각하고 집구석에서 으르렁거리는 꼴이 되어버린다.(때론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하니 이 또한 대응의 극단적임에 말을 아끼게된다) 이혼이라는 과정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을 보며 이런 이유로 갈라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관계속에서 유일하게 사익을 따지지 않길 바라는 사례였다.


먹고 사는 것에만 능통하지 법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다. 몰라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것들에서 소리없는 외침만 하는 경우를 마주한다. 우리는 변호사를 통해 법의 지푸라기라도 잡아당겨보며 숨구멍을 찾게 되면서 간절함을 호소하고 명백함을 입증받고 싶어한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면 좋겠지만 냉철하게 사건을 바라보며 때론 차갑더라도 확실한 해결책과 사례 제시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바랄뿐이다. 그게 저자가 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착한건 나중 일이다. 내가 이 사례들의 당사자라면 따뜻한 위로도 좋겠지만 확실한 방향성 제시와 함께 최악만을 피해주길 바라지 않을까를 생각하게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며 내가 저자와 같은 변호사를 설득하는 것에도 버거웠을테니,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과 집단,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대립할 지라도 떨지말고, 버벅거리지말고, 이른바 쫄지 말고 야무지게 대응하며 나의 말에 힘을 싣어주길 바란다.

'공익'도 결국 누군가의 '사익'과 '이권'이었다. 그럼에도 공익이라 부르는 것에 허용 될 수 있도록 '사회적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을 구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공익의 틀 안에서라도 제대로 된 정당한 권리를 받고 받을 수 있도록 도의적 선의가 어색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투쟁으로 얻어낸 귀한 공익이라는 말도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을까를 기대해본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 루나파크 일력 (스프링) - 매일매일 심력 충전
루나(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매전 제품 사진을 보았지만 역시나 실물을 못 따라가는구나. 2025 루나파크 일력(스프링) 25,000 일력이 들어있는 박스마저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은 쫌쫌따리 빼곡히 채워진 캐릭터들. 박스가 예쁘고 빳빳하니 질이 좋아서 이 박스 못 버릴거 같네. 사무용집게나 클립 넣어두면 딱이겠어.




보통 시판용 라텍스 고무장감 M사이즈를 껴도 공간이 남는 내 손. 이러한 사람의 손 안에 쏘옥 들어가는 일력. 어찌보면 2025년의 365일의 심력은 내 손안에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하는거 같단 말이지. 하루에 한장씩 넘길 때마다 마음이 힘이 더 세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기대해본다.




루나파크가 전해주는 심력의 응원을 받고 넘기는 1월 1일. 한장한장 넘기기 쉽도록 스프링제본타입인데 링이 단단하고 큼지막해서 마음에 드는구만. 상단에는 월을, 상단 오른편에는 요일이 적혀있고, 가독성 좋도록 일자 표기는 중간에 아주 큼지막하게 기재되어있다.




루나파크의 공감툰은 물론이고 한마디씩 적어둔 멘트는 공감 안 할 수 없는 문장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렇지그렇지. 1월 1일은 새해라 좋고, 1월 2일은 신년 첫 출근으로 회사 시무식을 시작으로 소란스럽겠지만 작년 출근이든 올해 출근이든 회사 노비로 사는 사람으로서 별반 다를거 없는데 시무식으로 신년인사 하며 승진자 축하하며 그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1시간 정도 잡아 먹을거 생각하니 진짜 나 역시도 안 새롭고 안 기쁘고 그렇다.ㅋㅋㅋㅋㅋ 진짜 연차 지긋한 카피라이터로 살아온 사람 다운 공감들이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내 책상 위. 심력 키우기엔 사무실만한게 없잖아? 자존감 떨어지고, 삶의 목적이 느슨해지는 공간에서 심력 단련을 위한 루나파크의 일력을 시선이 가는 곳에 두면 올 해보단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미디어창비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시드 드림 창비청소년문학 130
강은지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어른들이 잠들어 버린 세상에서 방황하고 성장하며 어떻게든 이겨내는 청소년의 성장 소설. 어른들의 시계는 멈췄고, 아이들만 남겨진 곳. 겪어보지 못한 상황으로 혼란은 계속되고 조금만 버티면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지쳐가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속에 살아내는 법을 터득하고 숫자로서 분류되는 성인의 나이가 된다. 어른 없던 세상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세상. 바뀐건 그저 시간이 흘러 나이만 먹은것이며 어제와 오늘은 별반 다르지 않은듯 한데 모두가 어른으로 바뀌었다. 그 경계를 넘어서면 다를 줄 알았는데 그걸 즐길 겨를 없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이고 어찌되든 버텨야하는 세상에 놓여져있다.

이야기는 강희가 남겨놓은 일기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애살있게 챙기지 않는 엄마. 기대와 주목은 쌍둥이 강석에게 넘겨진 시선. 어느순간 돌아오지 않는 아빠. 아빠가 보고싶고 그리운 강희. 사춘기 소녀. 아이가 보고있는 세상은 여느 여고생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아빠를 만나면'으로 지금보다 다른 세상을 기대하지만 갑작스러운 바이러스 창궐로 어른들이 모두 잠든다. 지쳐있던 어른들이 그렇게 도망치듯 꿈으로 잠적한 것. 어른들도 어른이 되고팠던게 아니었던 거지. 책임질게 많고 마음을 숨기며 살다보니 속 안이 곪은 듯 하다. 그렇게 우울 속으로 파고들어 꿈 속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있고픈 자기만의 굴로 들어간다. 그 자리, 그 상태로 잠든 어른들의 표정은 지금껏 보아왔던 모습과 달리 평온해 보이니 어떻게든 깨워야 할지 꿈 속에서라도 평안하길 바라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 미쳐 버린 건 세상이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 뭐가 됐든, 미친 세상에선 우리도 미쳐야 했다.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주던 어른들이 잠들었으니 규율이 무의미해졌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권리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다. 잠든 부모의 생명을 유지시켜야했고, 자신도 살아나야 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 언니의 울타리 속에 있던 여린 화초같은 아이들이 어른을 챙겼고, 약탈하는 존재와 대립하기도 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몰고, 자기보다 더 약자인 어린 아이를 챙겼다. 아파하면 잠을 줄여서라도 친구를 치료했고, 나보다 더 급박한 상황이면 마음을 가다듬은 후 양보하기도 했다. 이기주의보단 같이 살려고, 같이 살아내어 이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마치 아이들의 보호자가 자신들에 해주었던 배려와 양보를 빼다 박은 듯 그렇게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처럼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른들이 스스로를 가둬둔 꿈의 세상을 본 윤서. 루시드 드림을 겪으며 그 속에서 자신만이 누렸던 찰나의 행복 속에 갖혀있는 걸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꿈속에서라도 행복하는게 나을까, 꿈에서 깨어나 숨가쁘지만 그래도 살아봤던 진짜 삶의 문턱으로 넘어오도록 계속 부르는게 맞을까.

윤서가 잠을 깨우는 과정을 통해 아이가 되어도 봤고, 어른으로도 살고 있는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그리 많은 시간의 삶을 넘어 온 존재는 아니지만 사람에겐 촘촘한 감정의 겹으로 싸여 있음을 느낀다. 잔망스런 미운 다섯살 시절부터 시작해서, 흑염룡에 씌였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중2시절의 질풍노도를 거쳐, 신분증제시하며 당당하게 술 마실 수 있지만 아직 모르는게 많았던 스무살. 책임질게 늘어나더니 이젠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버린 30대의 지금까지. 그러고보면 매번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와 감정의 울렁임은 많이 벅차고 감당하지 못할 거라 지레 겁먹었음을 느낀다. 이제와 되돌아보면 제법 잘 버텨왔고 모나지 않게 흘러감을 느낀다. 힘들어도 뭐 내일은 괜찮겠지라며 무던하게 넘어가는 사람으로 바뀌다보니 단꿈이 주는 황홀함보단 현실에서 좀 더 사사로운 행복을 찾았음에 감사하게되는 단단한 마음이다. 그렇다고 꿈에 빠져있는 어른들을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만의 서사가 있었고, 생의 굴곡은 다르니 나는 다행히 잠을 쫒을 재간이 있었다고 말해주고싶은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어렸다면 꾸고 싶은 꿈을 마구마구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난다거나 마법을 부린다거나, 내가 어떤 나라의 왕이나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되는 상상. 하지만 어떤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어른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상황과 현실이 알려주는 삶의 방식. 꿈보단 절망을 더 깊게 겪었으니 이들은 꿈에 잠식되지 않겠노라는 마음이 크다. 어려움은 나에게만 오는 것도 아니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틸 여력을 마련하면 도움 준 만큼 도움 받게되는 삶의 순리를 받아들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끝이 보일 때 과연 이 책은 '모든걸 극복했습니다!' 라는 급작스러운 화사한 엔딩으로 마무리 하지 않아 좋았다. 이야기를 급히 끝마치고, 이 책을 읽을 청소년들에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기뻐하시죠!' 라는 강요가 없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세상은 유치원에서 보던 전래동화의 해피엔딩만 있는게 아니니 좀 더 현실적인 마무리를 해 준 듯 했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아이들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고, 많이 다쳐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틈에서 자신보다 약자를 어떻게든 지키내려는 모습이 짠하고 기특하며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른들은 긴 겨울 잠을 끝내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중간에 길을 잃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잠들 수도 있음을 예견하며 다가올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려 마음을 잡아두고 있었다. 모르고 맞딱들이는 당황스러운 현실보단 두렵지만 다가올 것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이제 진짜 어른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고, 잘 버티고 있는 듯 해 마음을 한시름 놓아본다.

팍팍하지만 손만 뻗으면 내 사람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현실, 몽글거리며 행복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의 경계. 어른들은 그렇게 도피하는게 맞냐고 버럭 성질을 내고 싶으나 나의 어른들도 어른이 되에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처음부터 어른인 적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나보다 더 막막하고 무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이 짠하고 가엾은 어른들의 찰나에 무던하게 등을 쓸어내려주고 싶어진다.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도, 앞으로 살아가며 어른이 될 아이들도 이 친구들처럼 서로가 무너질 것 같을 때 단단히 손깍지 껴주며 힘을 보태어주길 바라게된다.


📖 출판사를 통해 가제본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의독백 - 발견, 영감 그리고
임승원 지음 / 필름(Feelm)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기한 책을 발견했다. 책등이며 책장의 끄트머리가 표지의 색처럼 주황으로 염색되어있는게 고전 원서 같기도 하면서 비밀에 쌓여있는 듯한 이야기를 꺼내보게 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마지막 단어가...모놀로그가 아니네? 원올로그? 이런 단어도 있었나 싶어하며 모놀로그를 검색해서 내가 아는 정의가 맞는지 한번 더 확인 후 앞의 스펠링을 w로 바꿔서 다시 검색해봤다. 이 책의 저자의 유튜브가 상위에 검색된다. 나무위키가 친절하게 알려주네. 독백이라는 단어와 저자 임승원의 won을 합쳐서 wonologue라는 말로 유튜브를 개설하여 운영중인 크리에이터. 언어 유희에 능한 사람이다 싶으면서 이정도의 위트와 생각이라면 그가 전하는 독백도 마냥 가볍지는 않을거라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남아있는 오늘의 시간을 함께 하려한다.


📖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해준 당신에게

그렇지 모. 모두를 만족 시킬 순 없지. 모두가 나를 좋아 할 순 없으며, 반대로 모두가 나를 싫어 할 수도 없으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더 집중하는 방향을 기대하며 이 책을 선택한 나같은 독자에게 전하고픈 말들이길 기대하게 만든다.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되는 책입니다.

인트로를 지나서 가이드 문구들을 넘어보면 발견 / 영감 / 원의독백 / 코멘터리로 이어지는 4개의 분류.

처음 발견은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였다. 나를 둘러싸고있는, 나를 표현하기 좋은 단어들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이자 단단하게 지키고자 하는 자신만의 사상등이 적혀있는데 이는 그 시절 그 나이 대에 생각했던 신념이며 좀 더 진득하게 이어가고픈 진심이 담겨있었다.

영감을 주는 것들. 좀 더 긴 호흡으로 말하는 것들에는 자신이 해왔고, 이후에도 계속 해가길 바라는 미래의 자신에게 전하는 듯한 충고.

원의 독백. 유튜버로서의 삶으로 살다보니 바라보게되는 모습들.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익숙했던 사람이 카메라 렌즈로 한번더 꺾은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서 듣는 또 다른 삶의 굴절.

코멘터리. 원의 독백을 먼저 읽고 추천 남겨주는 사람들의 인터뷰. 모두가 하나같이 원올로그의 덕후가 되어 원의 독백으로 인해 자기만의 독백의 순간이 오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바람들. 그러니 이 모든 챕터를 다 읽고 나면 당신들도 코멘터리를 남겨줄 수 있을 만큼의 원을 덕질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여겨졌다.

글쎄, 아직 나는 완독 하기 전이니까 마지막 코멘터리에 대한 생각은 여백으로 남겨두고 읽어보겠어.




📖 그저 이 이야기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평범한 저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작점 정도라고 할까요.

기대하지 말라하지만 결국은 당신도 기대 하게 될 텐데, 그래도 그 마음을 접을거야? 그럴꺼야? 라는 식의 살짝 얄미운 확신에 대한 확인 문장. 원은 말한다. 위대한 철학적 가치관도, 전문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이어온 문인도 아님을. 그렇지만 그럼에도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내 눈앞에도 있듯 결과물로 손에 쥘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걸 보니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언제까지 남의 이야기에 대한 코멘터리만 써 줄 꺼야? 당신도 당신 이야길 써도 될거 같은데, 이미 충분할 거 같은데 왜 망설여? 크리에이터 수업도 들어보며 독립출판 클래스도 많이 하더만 해보는게 어때? 브런치에서도 쓸 수 있고, 당신 블로그에 간행물로 하다가 시도해봐도 되지 않아? 해볼래? 강요는 아니고, 해도 좋을거 같아서....' 이 많은 문장들이 한방에 와르르 쏟아져 나에게 온 건 아니고 잘 지내다가도 한 마디 씩 툭툭 던져가며 잔잔한 내 마음에 물결을 치고 아닌척 쑥 빠져버리곤 했다. 내가 남의 의야기는 잘 듣고 감 나라 배 나라는 잘 할 수 있는데 내 이야기는 한 없이 평범하고 지루해서 안된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답변을 해주는 사람이다. 저 사람들도 그리 대단한 삶은 아냐. 결국 이야기는 표현하기 나름이니까. 충분하니까 해봐. 기한을 잡지 말고 그냥 써봐. 라는 식의 대화로 나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남편이든, 저자든 모두 하나같이 '가능성'에 대한 큰 힘을 믿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은 늘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그거 그런 작은 외침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 이외의 사람들은 어찌그리도 그 단어가 크다고 여길까. 가능성의 가능성이라. 믿음에 많은 배신을 당한 나라서 그런가 가능성이 줄 힘을 아직 잘 모르겠다.


📖 일찍 일어나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출근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퇴근 시간이 되면 일제히 집을 향해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 오르는 삶. 그래야 나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알아줄 테니까.

이건 평범한 삶이길 바라는 사람의 기대치이며 무난하게 살고 싶어하는 군중속 무리를 지향하는 인간의 심리다. 내가 그렇다. 꿈과 열정을 버리고 택한 삶이 이런 것이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있는 삶의 패턴이다. 소심한 관종끼가 다분했던, E의 기질이 한줌 정도 더 있던 10대엔 특별한 삶을 꿈꾸며 남들이 놀 때 그렇게 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픈 사람이 되고자 했다. 허나 내 인생에 입김을 불어넣는 사람들에게 휘청이다보니 20대 후반부터는 저자가 말하는 루틴을 갖고 24시간을 주5회씩 도장 찍어내듯 복사 붙여넣기 하고 있는 삶으로 살고 있다. 싫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깔나게 좋은것 또 아니고, 때때로 이전에 꿈꾸던 삶이 어떤지 맛도 보지 못해서 그런가 뒷북치듯 이제서야 눈길이 가긴 한다. 이제는 E의 성향보다 하다못해 소문자 I의 성향으로 기울어진 삶으로 굳혀진 인생이되었다. 남들 쉴 때 다 쉬고 남들 일할 때 그냥저냥 일하며 얇고 길게 가는 삶이 최고구나를 생각한다. 내 사업 보다 남의 회사 노비마냥 출퇴근 똑바로하고 하라는 것만 야무지게 한 후 더 잘 하려고도 안하는 월1회 통장 찍히는 만큼의 삶. 이러한 삶의 방향성만 봐도 나는 크리에이터가 되긴 글러먹은 떡잎같네.



📖 그래서 나는 무작정 호의를 베풀 수 없다. 베풀었던 호의가 손해로 돌아오면 상실감은 몇 배로 크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리. 굳게 결심하고 야심차게 집 밖으로 나선 그날 아침, 이름 모를 남자의 어깨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내 사과를 받았다.

.... .... 이윽고 그 승리가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배려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자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그들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과 마음들. 그거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못된 성질머리 구간 아니었나? 나도 종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당연하리만큼 삐딱하게 봐지는 삶의 매운 구간인데 이게 있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미운 구석을 알 수 있고 나도 그 사람을 미워함과 동시에 그러한 짓을 따라 하고 있다는 걱 자각하며 나는 저딴 인간처럼 살지 말아야지를 알아채는 과정더라. 그래도 이정도면 양반이지. 똑같이 했더라도 금새 알아차리고 고개 저어가며 머릿속에 있는 나쁜놈을 떨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나는 혐오하는 것들 중에 개선이 될 놈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 모든 것을 안고 갈 수도 없다. 하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만 할 수 있다. ...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비 주행'을 해야한다.

삶은 장거리 운전이었다. 엔진소리 빵빵 틔워가며 전력질주 한들 코앞에 있는 신호에 멈춰버리면 연비도 안 좋고, 브레이크 밟는 횟수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니 좀 길게 보고 좌우 사이드미러며 룸미러로 내 뒤를 경주마처럼 압박하는 것들에도 주시하며 이리저리 차선도 변경 할 줄 아는 요령피우는 놈으로 살고파진다. 매일매일 왕복 60KM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니 나도 요령이라는게 생긴 것 처럼, 내 삶을 주행 하는데에도 딱 이정도의 꼼수가 하나씩 늘어가길 바랄 뿐이다. 나는 여전히 내 차 뒤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여두고 있다. 할 줄 안다고 나대다가 시야밖의 무언가에 큰 이벤트가 생길 수도 있으니 하나 정도의 제어장치를 쥐고 있는 셈이다. 연비 주행하고, 눈치 주행하며, 떄때로 꼼수 변경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의 엔진이며 절제의 브레이크 패드가 다른 이들보다 늦게 마모되길 바라는 삶의 주행. 그걸 바라는 거다.



📖 무조건 좋아하는 걸 하라니.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건가? BUT,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일머리를 아는 것 만큼이 중요한게,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것에 대한 재미를 알아서 뭘 하더라도 눈에 총기가 있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욕망덩어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게 결국 지 좋은 것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거니까 어떻게든 해 내고 싶은 마음, 더 잘 하고파서 근질거리는 손. 그게 잘할라고 하는 사람들의 드글드글 거리는 손이라는 것에서 보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이길 자는 없음에 말의 힘을 보태본다. 뭘 하든 애정만큼 큰 부스터는 없는걸 나도 느끼며 살아왔으니 저자가 한 이말은 진짜 찐이다.

관련 전공자가 가진 어휘 구사력이라던지 말을 끌어가는 힘을 무시 할 순 없다. 하지만, 비 전공자(나처럼 저자도 경영학 전공이네?)가 끌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일렁임은 또 다른 끌림을 안겨준다. 사적인 발견이며 누구나 영감이 되는 나, 너 우리에 대한. 모두의 오리지널리티에 관한 기록이 담긴 이 시그널은 결국 우리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것에서 부터 시작했다. 코멘터리 파트에서 보면 류덕환 배우는 저자의 글을 본 후 모두가 독백하길 바라며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나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건 오롯한 '나의 독백'뿐임을 말해줬다. 마케터이자 작가인 이승희님은 책에서 다큐를 마주했다고 적어둔 문장에서 확신했다. 그가 하고픈 말은 결국 '다큐 3일', '인생극장' 같은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아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생각, 지금만 느낄 수 있는 감각, 잊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원의 독백'처럼 당신들만의 독백 파트를 꼭 마련하길 바란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는 블로그를 통해 나만의 독백을 하고있었음을 깨우치게 한 저자의 단상들을 통해 나도 나만의 독백을 긴 호흡으로 끌어가고 싶어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말은 안 되지만 트리플 27
정해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개의 단편이 싣려있는 소설이다보니 등장인물이 복잡하지 않다. 인물관계도를 그려가면서 머리싸매고 책을 째려보듯 뚫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도 훌렁훌렁 페이지가 넘어가더라. 그럼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제대로 박히는 기분.




제목에서도 언급했지만 결국 제 보고싶은대로, 제 마음대로, 제 듣고싶은대로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는 '미스터리-공포-환상'으로 이어지는 장르의 세계관의 모음이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알려준 '현실적인 말 안 되는 세상'에 이야기 이다보니 그 세계에서 미간에 힘을 주고 보게되며 호흡할수록 침잠하는 생의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된다. 




 


📖관심이 필요해_ 속았다. 아니, 속은 것은 아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다.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색안경. 자신이 당한 것을 아이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모정을 일반화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에 있어 아주 진득하과 명확하게 겪어온 것이니 그게 당연하게도 믿는 증명과도 같았다. 과거의 중혁이 그러했으니 영우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건 남이 보면 착각이고 자신이 마주 할 땐 다들 그리 겪는 것으로 체감하게되는 학습의 결과물이겠지.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거다. 나도 겪었는데, 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형사든, 프로파일러든 그러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마주하는 직군이 아니라면 이러한 단면적인 반응이 오히려 당연했을수도 있다. 나는 중혁이 품었던 의문과 신고에 대해서는 차라리 잘 한 일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라도 문제를 끌어냈으니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게 된 거니까. 과거 어린 중혁은 커서도 고생을 했지만, 현재 어린 영우는 엄마의 잘못도 아니고 영우가 치료 받으면 되는 결론으로 마칠 수 있어 다행스러울 뿐이다.




📖관심이 필요해_ 아이를 간호하느라 일을 나가지 못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느라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던 그 여자에게 아이를 잘 돌보라고 말해야 한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에게 당신 때문에, 당신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아이가 계속 병을 얻는 거라고 말해야 한다.

때때로 누군가의 진심어린 시선과 손길이 어떠한 필터를 거치면 큰 문제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트릭으로 보이기도 하며, 자신을 더 돋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느껴 질 경우가 있다. 살아온 학습의 효과 일 수도 있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의 비중이 그리로 향한다면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으로 덮여질 수 있는 장면들이다. 우린 아무런 필터 없이 오롯이 현상만을 마주하고 대응 할 순 없다. 그간 살아온 경험과 귀동냥 해서 얻어진 정보는 다른 이들보다 잘나고 우월하게 비출 수 있는 무기가 되니 손발 다 잘라둔 채 눈알만 굴려가며 바라보는게 어렵다는 것이다. 중혁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관심이었고, 중혁만이 할 수 있었던 의심의 가닥이었으니 나는 그 관심과 예측을 감사하게 여길 뿐이다.



📖드림 카_ 도움받을 거라 기대했다가 당하는 거절은 더한 수치심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자괴감에 치를 떨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돈이든 능력이든 설령 무리에서 뒤쳐지는 카드를 쥐고 살았다가 바뀐 판세의 흐름이라 할 지라도 이 놈의 내면은 원래부터 이렇게 악아 받친 놈이었음을 짐작하게하는 문장이다. 그냥 외면하면 그만이고, 모르쇠 하며 저 혼자만 잘 살며 신나게 살아도 될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는 걸 보면 받은걸 되갚기 보단 곱절로 얹어서 치를 떨며 떨어져나가길 바라는 심리가 얹어져있어 이놈은 이야기 끝에 뭔가 호되게 당하겠구나를 내다보게 만든다.




📖말은 안 되지만_ 혐오감으로는 말이 훨씬 앞서지요.

... ... ...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겠어?

분명 사람이었었다. 헌데 자고 일어나니 말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은 돼지가 되었다. 그럼 전부 이상한건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변화는 당연한 인간의 변태 과정이었고, 말이든 돼지든 우월함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비중에서 한 쪽은 일반화로 간주되고 다른 한 쪽은 기이한 무언가로 덮어두고 숨겨야하는 부류로 변모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보기엔 돼지든 말이든 도긴대긴인데 그들의 세상에서는 거진 하늘과 땅의 구분처럼 대하고 있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성형이든 제모든 외형을 숨겨야했고,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면서까지 수면아래로 잠식하게 하려는 반응을 보며 어딘게 모르게 익숙한 냄새를 풍긴다.

겉 껍데기가 바뀐 상태이며, 보여지는 것으로 인해 혐오를 표출하는 세상. 분류하는 종이 바뀐 거니까 뭐 그렇다 쳐. 그런데 인간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딴 혐오로 뒤덮여있었던걸 잊고 있었다. 같은 인간인데 생김에 따라 눈에 힘주고 부정적인 반응을 내리 꽂는다. 잘생기고 예쁜걸 떠나서 외형적으로 본인의 마음에 들지 못하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남들과 다르다고 감추려하고 숨기려하는 걸 심심찮게 봐왔다. 돼지가되고 말이되어버린 세상이나 다 같은 인간인데 지들끼리 위아래로 줄세우는 세상이나 죄다 질리게 만드는 가학의 재능꾼들이시다.





📖말은 안 되지만_ 수많은 어쩌지가 가슴에서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평범하게 살거면 소수보단 다수의 무리에서 숨듯 살아야했고, 그게 안되는 소수의 부류라면 뭐 하나라도 잘나야 욕 덜 먹으며 그나마 인정 받는 존재로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말이 되고 훈련을 하고 뒤쳐지는 다른 이들을 마주하며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보니 제발 이 장면들이 지독했던 꿈이길 바라게된다. 앞서 말한 것들에서 다 해당이 안되면 다들 그렇듯 미친놈으로 분류되거나 말고기처럼 취급받는거지.

그래도 다행이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는 가족들이 홀로 말이 된 존재를 외면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가족이고 제 새끼였으니 마구간을 지어두고 하염없이 기다렸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울컥하게된다. 이 가족들은 그래도 앞에 있던 단편의 인우같은 놈은 아니구나에 깊은 숨을 몰아쉬며 '어쩌지? 어쩌나!'를 두고 발끝을 콩콩 찧으며 망설였던 순간을 무색하게 만들어주어 세 작품을 통틀어 가장 마음을 놓이게 만들었다.




세 편의 소설 / 세 종류의 글 / 작가-독자-작품을 잇는다는 의미의 트리플 시리즈의 27번째 도서.

반전은 있지만, 결말도 나왔지만, 개운하지 않을게 분명해보이지만 읽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았다. 작품마다 그 속에 빠져들면서 이 각각의 작품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봤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중혁의 시선을 넘어선 영우의 시점을, 그리고 영우 엄마의 숨가쁜 삶으로 녹아들었다면 이 이야기는 지금과는 다르게 진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심리치유의 분류로 넘어가 늘어지는 가닥을 붙잡아가 뻔한 이야기로 흘러갈만한 시점에서 담백하게 멈춰주어 독자게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글이었다.

사람의 욕망이 지닌 잔인함. 부를 얻은 과정을 처음부터 다 내어놓지 않아 좋았다. 인우가 마이바흐를 몰기 전과 후로 비교하게 되는 시선과 대우. 이건 돈이 주는 우월성도 있었지만 이야기의 끝에 독자가 체감하기엔 그 돈마저 그리 써야하는 놈인가? 싶어하며 혀를 차며 바라보는 시선들이기도 했던 거였다. 자신은 부러움으로 해석했던 눈길이 진실에서는 치욕스러운 놈을 바라보는 분노의 시선으로 힘주어 봤던거라는 결론을 내어주었다. 이 놈 마저 결국 제가 보고 싶고 제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던 주위의 반응이었다.

마지막 소재는 제일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제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웠던 마음이다. 글의 주인공만 말이 된 건데 사람이 말이 되나 돼지가 되나 둘다 매한가지로 이상한 일임에도 변화된 모습에 대한 혐오보다는 수적인 열세로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류에 들어가는 것으로 받게되는 대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를 수도 있지만 달라서 세상이 무너질 듯한 감정을 모든 감각을 통해 얻어낸다. 무리에서 튀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놈이 되어서도 안되는 집단. 걔중에 쟤보단 나아야되지 않겠냐며 밟고 올라서야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며 눈알 열심히 굴리고 살아야하는 고달픈 말 안되는 삶을 그려냈다. 그래서 서글픈 우리 이야기 처럼 느껴졌다.


현대과학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것에서 오는 공포는 없다. 결국 사람이 제일 무섭더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어도 될 만큼 사람이 하는 편향되어있는 관점에서 훅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 두려웠다. 같은 껍데기를 덮고있는 인간임에도 다른 생각을 통해 선을 그어 '금을 밟았어? 금을 넘었다고?' 바로 거부반응 일으키게되는 감각의 반응들이다. 아는데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이 온 감각을 따갑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