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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까?
논술 시험을 준비 할 때엔 한국사회비평 파트를 매일 한 단락씩 읽어가며 칼럼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렇게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과 할 말이 많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순간 그러한 고민과 생각들 조차 피로감이 몰려옴을 느꼈다. 내가 이걸 고민하고 논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걸 알았고, 내 목소리로 인해 바뀔 세상도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어 어련히 잘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은 마음에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방관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일처럼 보다보니 문득 걱정거리가 기어 오르더라. 과연 나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확신 할 수 있는 세상인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당연히 그러지 못할거라는 뻔한 답변까지.
나는 누가봐도 소수자이며 약자의 입장이다. 도의적인 판단에서는 우세할 수도 있겠다만 현실만 놓고보면 무한한 지지를 받을 여력이 안 된다. 그래서 일단 아는 것 부터가 수반되어야 내 물음과 내 외침에 단단한 지지를 받을 것 같아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꼼꼼하게 읽어갔다.
총 3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공익을 보호할지에 대한 논의 / 불온한 사익 투쟁의 이면 / 변호사로서 바라보는 사익에 대한 견해까지. 3가지의 큰 사례 속 각각의 실재하는 사건들을 담아두었다. 체감 할 수 있던 사회적인 사건들이 담겨있으니 이해 할 수 있는 사익과 공익에 대한 사건의 갈래들. 시민의 편의, 사회적 합의, 다수의 행복이 진짜 모두가 허용할 수 있는 공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다시금 생각을 하면서 그 틈을 비집고 사익으로 한 몫 챙길 이들의 나쁜 손들에 대한 경계를 갖춰본다.
📖들어가는 글_ '그럼에도 불구하고'같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너무 극단적, 급진적, 강경일변도라면 곤란하겠지만 하여튼 택일을 해야하는 실존적 순간은 분명히 있다. 개개인 인간에게 고결하고 위대한 뭔가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강자가 지배하는 현 상태를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중립 아니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게된다. 자신은 중립이라 생각 할 지라도 결국엔 강자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것이기도 하며,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신은 우세한 쪽에 서서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얄팍한 행실인 것. 불합리한 것과 불의한 것은 알지만 그 고래싸움에 끼기 싫어 하는 무사안일한 생각을 나도 해봤기에 잘잘못을 구분 할 줄 알고, 설령 결과가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과에 순응하기보다 이것은 옳지 못한 판결로 결론지어진 사례라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스쿨미투, 국가는 가해자의 대변인이었다_ 후속 조치는 참담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자기들만 믿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권력과 계층으로 얻어지는 힘은 사회 어느곳이든 존재한다. 학생과 교사의 신분을 활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놓은 원래의 구조가 바라는 상호작용을 무시한 채 벌어지는 일들. 이러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이쪽으로만 더 악랄하게 파고들어가는 사건들을 보면 피해자만 왕따를 시키고 지들끼리 한통속인냥 연대를 하는 것에 씁쓸해질 뿐이다. 스쿨미투에 대한 것은 비단 현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반에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묵과했다. '감히'라는 높은 벽을 스스로 쌓아가며 반박 할 수도 없는 틈을 벌여놓았다. 고발은 엄두도 못 내었고, 입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쉬쉬하며 피해자들은 조용히 졸업식만을 기다렸던 그들의 눈물을 기억한다. 정보의 공개 여부도, 법꾸라지라는 악명도 감수하면서도 지들끼리 연대를 이뤄 조용히 다른 사건으로 덮여지길 바라며 알권리를 묵상시키는 검은 손들.
모두의 책임은 무책임이 되어 소송하는 동안에 저들은 아주 편히 지냈다지? 어릴때부터 생각해보던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방식을 대입해본다. 당신들의 금쪽같은 자식들이 이러한 사건에 연류되어 매번 피눈물을 흘린다면 그때도 묵과할 것인가, 그때도 법꾸라지라는 말들로 손가락질 당한다 할지라도 조용히 세상속에서 잊혀지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당신의 눈에서 피눈물이 안 흘렀기에 평생 자신은 그러한 일을 겪지 않을거라는 아주 당당한 자부심이 있기에 지금도 그냥 그렇게,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걸 보면 누가 먼저 지치느냐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싸움 같다.

📖'영혼 살인' 경비 노동자의 유언_ 피해자에게 정말 간절한 것은 그 순간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의 도움이다. 이웃들의 관심과 작은 실천이다. 방관은 결과에 있어 저마다의 몫의 책임을 남긴다. 방관은 나쁜 결과를 낳고, 또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용 형태에 대한 문제를 먼저 논해야 할까, 기본 인식의 문제를 먼저 언급하며 경비 노동자를 '머슴'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개선과 함께 사회적인 분위기의 개선하는 것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까. 직장내에서 이뤄지는 갑질과 괴롭힘이든, 직장 밖에서 근로자를 향해 쏟아지는 하대 또한 일종의 분풀이 이며 감정조절의 무능함에서 오는 무지의 표출방식이라 말해주고싶다. 넓게 보면 고용의 형태와 근로 실태 개선이 필요한 사회구조적 고름을 짜내는게 우선이겠다만 문제 자체를 직면할 때엔 사람으로서의 도리의 문제로 저마다의 책임을 분배시켜 각자의 몫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용서가 필요해 보였다. 기초적인 사회성에 대한 조화로운 삶의 방향성, 공동체의 삶에서 해선 안되는 행위,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해야하는 각자의 역할과 공동상생을 위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예의. 초등학생 때 배우고 익히던 기초적인 사회생활 법을 잊고 사는 듯 해 고인의 쓸쓸한 마지막이 더욱 안타까워졌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라_ 내가 괴롭더라도 상대방을 괴롭히는 걸 멈출 수 없는 형국이다. 국가가 '유책사유', 이혼 사유 열거주의를 택함으로써 이런 비극 상태를 조장하는 셈이다. 부부관계가 파탄 난 게 분명한데, 이 가정이 유지되면 될수록 모두의 불행만 커질 게 뻔한데 국가가 이혼을 강제로 막는다. 이혼하기 어려운 나라는 불행한 나라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다라.
저자도 인용했지만 안나 카레니나 속 이야기를 통해 행복과 불행의 양면성을 떠올려본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 속에 답이 나와있음을 느낀다. 행복한 사람들이라면 뭔들 문제가 있겠는가. 불행하기에 발치에 채이는 사사로운 것 마저도 다툼의 씨앗이 되고, 불화의 시점이 되는것이니 모두가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려면 유교적 사상의 이념이든, 사회적인 소속감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떠나서 사람답게 살도록 각자의 자유를 주는게 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누군가의 아내이며 누군가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그리 불리워지기 이전에 나로서의 존재 자체의 목적이 흐릿해져서는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에 갖힌 채로,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평범치 못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기에 어떻게든 붙들고 살아야한다 생각하고 집구석에서 으르렁거리는 꼴이 되어버린다.(때론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하니 이 또한 대응의 극단적임에 말을 아끼게된다) 이혼이라는 과정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을 보며 이런 이유로 갈라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관계속에서 유일하게 사익을 따지지 않길 바라는 사례였다.
먹고 사는 것에만 능통하지 법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다. 몰라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것들에서 소리없는 외침만 하는 경우를 마주한다. 우리는 변호사를 통해 법의 지푸라기라도 잡아당겨보며 숨구멍을 찾게 되면서 간절함을 호소하고 명백함을 입증받고 싶어한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면 좋겠지만 냉철하게 사건을 바라보며 때론 차갑더라도 확실한 해결책과 사례 제시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바랄뿐이다. 그게 저자가 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착한건 나중 일이다. 내가 이 사례들의 당사자라면 따뜻한 위로도 좋겠지만 확실한 방향성 제시와 함께 최악만을 피해주길 바라지 않을까를 생각하게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며 내가 저자와 같은 변호사를 설득하는 것에도 버거웠을테니,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과 집단,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대립할 지라도 떨지말고, 버벅거리지말고, 이른바 쫄지 말고 야무지게 대응하며 나의 말에 힘을 싣어주길 바란다.
'공익'도 결국 누군가의 '사익'과 '이권'이었다. 그럼에도 공익이라 부르는 것에 허용 될 수 있도록 '사회적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을 구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공익의 틀 안에서라도 제대로 된 정당한 권리를 받고 받을 수 있도록 도의적 선의가 어색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투쟁으로 얻어낸 귀한 공익이라는 말도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을까를 기대해본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