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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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하이쿠를 처음 접했다. 일본 문학 속에 간간히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하이쿠라는 작품을 읽은건 처음이었다. 이 책엔 굉장히 많은 하이쿠작품이 실려 있는데 작품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설로 함께 읽을 수 있고 작품과 함께 매우 많은 수의 시인 역시 소개받을 수 있다. 대표적인 하이쿠시인 바쇼와 부손, 잇사, 시키를 포함하여 전시대의 다양한 시인과 작품을 만날수 있다. 해설을 꼼꼼히 읽으며 작가들을 시대순으로 줄세워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누구의 제자, 누구의 친구 등으로 시인들 간의 관계를 적어보는것도 재밌었다. 일종의 하이쿠시인 연보를 굳이 만들어가며 공부하듯이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는데도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굉장히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시인들에 대한 해설이 재밌었고 시대불문하고 동서양을 오가는 다양한 시인과 철학자들의 문구를 인용한 것도 인상깊었다.

 

하이쿠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 약간은 하이쿠 찬양으로 보일 정도로 장점들만 나열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좋은 작품만을 선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책을 읽은 후에 하이쿠가 매력있는 문학이라는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르의 특성만큼이나 장단점이 확고하기 때문에 최대한 걸출한 작품만을 골라 소개하며 독자에게 하이쿠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한 엮은이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작품들을 잔뜩 만난 후에 책 뒤편에 나오는 <언어의 정원에서 읽는 열일곱 자의 시>에서는 그 앞에서 미리 보여준 여러 시인과 작품을 통들어 하이쿠의 역사를 간편하게 추려놓았는데, 하이쿠라는 장르와 문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처음엔 왜 이 부분이 뒤에 있는걸까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를 앞세우고 사례를 살피는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도 흥미를 끌만한 좋은 작품들을 제멋대로 살펴보고 관심을 가진 후에 역사를 비롯한 공부를 하는 것이 독자를 위해 더 좋은 차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과 질이 모두 높은 수준인 책인 것 같다. 한참동안 하이쿠라는 늪에 빠져서 즐겁게 허우적 거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이 찾아오는 사계절의 풍성한 계절감을 음미하고 즐기는 방법을 하나 더 배운 것 같다. 아주 짧은 약식의 형식만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즐기고 사색하고 인생을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첫만남에서 깊은 인연을 맺기란 힘든 일이지만 일단 하이쿠와는 아주 기분 좋은 첫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당장 하이쿠와 관련된 다른 책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관심이 가는 시인들의 하이쿠 작품집을 구할 수도 있을지 궁금하다. 이번엔 도서관에서 빌려보았지만 앞으로는 소장본으로 더 다양한 하이쿠 책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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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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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다, 마음 먹기 나름, 골을 먹다, 한솥밥 먹는 사이 등등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그리고 먼 옛날부터 자주 쓰여 관용적인 표현이 된 표현중에는 유독 먹는다는 말과 관련된 것이 많다. 조금만 관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한국인의 언어 특징 중 하나이다. 비록 미리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앞서 예시로 쓴 몇몇 표현의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인의 식문화를 통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통합을 이야기한다. 언어적 문화적 특징이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세계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소하지만 곳곳에 남은 이런 증거들을 저자가 꼭꼭 짚어주는데 친숙하지만 미리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재미있기도 하고 새삼 놀랍기도 했다.

 

 

디지로그라는 용어가 그리 널리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디지털기술과 아날로그적 감성의 결합은 유효한 마켓팅의 방법으로 이제 제법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다. 2006년에 중앙일보에 연재된 칼럼을 엮어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벌써 약 10년전에 쓰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 속에 쓰인 이야기는 아직까지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우리 문화속에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과 특징이 디지털시대의 다양한 기술과 결합되어 지금까지의 성장을 이루었으며, 앞으로도 이런 형태의 결합이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 경제발전 및 특정분야에서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는 곧 디지로그형 정보사회를 도래하는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이러한 사회발전 형상이 과거, 현재에 걸쳐 일어나고 있음을 다양한 예를 통해 보여준다. 가장 쉬운 예로는 애플사의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로고를 들 수 있다.(참고로 이 책에는 이 로고에 얽힌 다양한 루머를 함께 다루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단편으로 쓰여진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 통일적인 강한 주장은 없지만, 빠짐없이 디지로그에 대한 개념을 언급한다. 어려운 이론을 피력하거나 지루한 설명을 늘어놓는 칼럼이 아니라, 모아놓으니 더 풍성한 이야기와 사례를 담고 있는 책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디지로그라는 용어는 낯설지 몰라도 그 개념만은 아직 사회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앞으로도 꽤 꾸준히 이용될만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분야의 책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는데, 어렵지 않게 흥미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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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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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 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니 무엇을? 누군가의 선언같이 들리는 이 책의 제목이 나를 끌어당겼다. 책속에선 소라와 나나, 나기라는 세명의 인물이 있다. 그들의 어머니인 애자와 순자도 있지만 앞의 세사람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화자로, 중심인물로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과연 이 중에 누구일까, 설레하며 책장을 넘겼다. 

 

 

소라는 나나의 언니. 나기는 두 자매의 이웃. 나나는 나기에게 도깨비같은,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존재. 단순하게 스토리로 보자면 나나가 가장 중심인물이고 소라, 나나, 나기 순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세사람은 각자의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설명을 앞세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라는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나나의 임신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 한다. 소라와 애자, 소라와 나나의 이야기가 전부다. 나나나 나기처럼 강하게 연결된 인물은 없지만 셋중에 가장 평범하게 주변인물을 사랑하고 적당히 미워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나나 역시 나나와 소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기 그리고 아기 아버지인 모세, 그리고 나기에 대한 이야기도. 깊은 애정을 지닌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가족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지는 않더라도. 소설의 제목인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이야기 중간중간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인물이 바로 나나다. 하고싶은 것이든 하고싶지 않은 것이든 꿋꿋하게 애써보겠다듯이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할때마다 응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책 제목을 보고 받았던 첫인상처럼. 꿋꿋하게 하지만 처량하지 않은 태도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나를 대표로 소설 속 평범한 듯 조금은 독특한 인물들이 완벽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나기는 나기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된다. 나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떠오르는 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나나가 그만큼 사랑해주니까 자신도 나나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는 그 역시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 나기의 사랑은 순애보인 동시에 신파같다. 고전적이지만 고전적이지 않다. 소라와 나나의 이야기와는 좀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오히려 더 집중해서 읽었다.

 

 

줄거리를 이렇게밖에 쓰지 못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굵직한 몇가지 사건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의 사유에 치우친 서술을 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시간은 자연스레 흘러가 몇가지 사건을 맞부딪히지만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각각의 인물은 현실에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제 자신에 몰입해 생각에 빠져있다. 상황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절묘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인물들의 머리속 사연과 감정은 읽는 이를 단숨에 빨아들인다. 사건과 상황과 대화와 생각이 자유롭게 얽혀있다.

 

황정은의 소설은 유독 그렇다. 사건을 주로 다루는 소설적 특징을 무시하지는 안되, 짧은 순간 인물의 감정에 너무 깊게 빠지게 만들어서 힘들게한다. 책을 읽은 때나 읽고나서. 누가 박아놓은 것마냥 그저 단순한 문장이었던 몇 줄의 글이 계속해서 생각난다. 자주 반복되서라기보다는 그 상황을 아주 주의깊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매혹당해서. 그래.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나면 꼭 무언가에 홀린것 같은 기분이다. 뭔가 당한 느낌. 이번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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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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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의 대화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동한 대사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이 서평에서는 너무 많은 부분을 노출시키기보다 기본적으로 책에 소개되어 있는 각 막에 프롤로그처럼 쓰여있는 글들을 먼저 보여주고 싶다.

 

 

 

1막. 손을 밟히면 하늘을 올려다보죠. / 하늘에 물고기가 날아다녔어요
2막. 전 금방 얼 거예요. / 얼어서 눈동자가 제일 먼저 깨질 거예요.

/
깨진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겠죠.
3막. 말해줘. 사랑이 뭐야? / 이불속에서 지느러미를 부비며 노는 거.


 

 

 

시극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작품을 읽어보기 전에는 이미 쓰여진 시가 차용되거나 시의 형태를 따라 대사가 만들어진 연극대본이라고 상상은 했었다. 실제로 극의 일부분으로 시를 차용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러한 정의는 딱히 절적한 것은 아닌것 같다. 시는 소설보다 혹은 다른 풀어쓴 글들보다 정제되어 있는 단어와 문장을 구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정제되어 있다거나 상징적이라거나 이렇게 어려운 풀이를 제쳐두고서라도 시는 그 시라는 단어에서부터 특유의 울림을 준다고 늘 생각했다. 어떠한 형태로 쓰여졌더라도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할 때가 있다. 어떤 대사 한 부분이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혹은 이 전체의 시극자체가 읽는 이에게 울림을 준다면 그게 시극인걸까 하고 애매모호하게 생각해봤다.

 

 

시극의 정의를 찾아봤다. 시극이란 1. 운문(韻文)이나 시의 형식으로 쓰인 희곡. 2.대사가 시형으로 꾸며진 연극을 시극이라 한다. 운문 형식을 띠는 것이 통례이지만 산문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현대극의 시초는 시극이었다. 김경주의 시극운동이 무얼까 너무나 궁금했는데, 마치 르네상스처럼 다시 극의 기원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인걸까. 하지만 그가 쓴 글은 복고풍의 전통 시극의 난해하거나 옛스러운 말투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현대에서 쓰이는 시를 극에 투영한 말그대의 현대의 시극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상상한대로 시가 주는 울림이 연극이라는 상연방법을 만나 더 거대하게 울려퍼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경주의 시극과 시극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이제부터는 이 작품에대해 이야기하자.

 

 

 

이 작품에는 총 3명의 인물이 나온다. 김씨, 파출소직원, 사내. 배경은 폐기된 해수욕장의 파출소. 김씨는 다리가 없어 매일 길가에서 동냥을 하며 먹고 사는데, 눈이오는 추운날 바다로 기어가던 김씨를 파출소직원이 업어 파출소로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사람은 파출소에서 몸을 녹이며 대화를 시작한다. 이 연극의 대부분은 이 두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가장 낮은 장소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김씨와 아무도 찾지 않는 파출소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파출소 직원의 대화는 진지하고 시적이며 동화적인 면모도 보인다. 눈과 바닷가라는 배경은 이러한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준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여주고 보듬어주고 존재를 긍정해주며 삶의 진지한 것들(사랑, 가족, 인생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높낮이나 처지에 상관하지 않고 한 사람이 묻고 다른 한 사람이 대답한다. 각자의 이야기는 평가되거나 반박당하지 않고 그저 긍정되거나 감탄(혹은 격려)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방식의 대화가 순식간에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다.

 

김씨는 두 다리와 아내를 잃었고 파출소 직원은 아들과 직장을 잃었다. 무언가에 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상실을 경험한 두 인물은 이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서로에게 닿게되고 그 장면은 독자에게 큰 감동을 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상연하는 걸 보고싶다는 마음과 실제로 상연이 가능한 걸까 하는 의심이 맞부딪혔다. 소설에서 느꼈던 치밀하면서도 극적인 여러 장면과 감동을 영화화된 작품에서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느끼긴 어렵다. 하지만 이 시극은 연극상연을 위해 쓰여진 글의 장르이기도 함으로 장르의 변환에도 고스란히 이 감동을 느낄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총 3막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허희가 각 막에 붙인 이름과 부제를 첨부한다. 내용과도 너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져서 애초에 작가가 붙여놓은 걸 내가 놓친건 줄 알았다. 맨앞에 쓰여진 책 자체에서 내놓은 몇줄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막. 타락천사(
墮落天使) : "다리는 어디로 갔을까요? 전 제 다리를 어디에 두고 온 걸까요?"
2막. 취생몽사(醉生夢死) : "죽은 새가 땅에 내려와 눕지 못하고 하늘을 맴돌고 있어요."
3막. 화양연화(花樣年華) : "어둠속에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금만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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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된 생각들 - 어느 날, 그림 속에서 피터가 말을 걸었다
전현선 글.그림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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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가 된 인물과 대상(물건) 등에 대한 소개, 그로 파생된 다양한 장면과 이야기 그리고 그림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다소 난해하지만 일정하게 이어진다. 그림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피터는 그녀가 좋아하는 도록의 화가인 피터도익에서 이름을 따왔고 뮤즈인 동시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인 '어린시절의 외삼촌'의 외양을 띠고 있다.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피터라는 캐릭터는 저자의 수많은 그림 한가운데 들어가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저자가 상상해낸 모험의 세계를 대신 체험한다. 그림 > 작품소개 혹은 이 역순으로 이어지는 고리타분한 해설서가 아니라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그림의 해설 및 소개를 다채롭게 꾸며내는 점이 참신하다.

 

 

  소설이나 영화는 일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 평화롭고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모험담으로 바뀌어버린다. (94p)

 

 

막연한, 뚜렷하게 묘사할 수 없는 동화적인꿈.
그 꿈을 더 이상 내 안에 가두어둘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그리기 시작했다. (205p 꿈의 기록)

 


일상의 한부분이 예술로 이어지는 어찌보면 작가만이 느낄수 있는 개인적인 한 순간을 글로 보여준다. 헌데 그 과정이 과장되거나 굉장히 특별한 순간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쓴 것이 재미있다. 영감을 받은 순간과 그게 곧 상상과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려져있다. 문득 피카소가 생각났다. 피카소는 그림도 뛰어났지만 자신의 작품을 팔때 자기PR이 굉장히 뛰어났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자체가 자기표현의 하나임으로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그림으로써' 말하고 소통하려한다. 그 작품을 누군가에게 이해 혹은 설득시키기 위해 설명을 해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예술로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사람이 많을지 궁금하다.(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림으로서 표출해낸 것을 다시 글로써 풀어내는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림과 글 양쪽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작가도 화가도 표현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특유의 감수성을 지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림과 글의 이중표현을 걸출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편하지 않게 풀어내는데 성공한 것 같다. 그림은(문외한이지만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 작가가 그렸다는 것은 알 정도로는) 특유의 분위기와 작풍,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가 있고. 글은 딱딱하거나 헤세가 드러나지 않고(자기작품이니 자랑하고 싶지 않을까 싶은 맘에) 매끄럽게 읽힐정도로 가볍고 담담하게 쓰여졌다.

 

 

그림 중심으로 글이 쓰여있지만 그림만을 보기위한 책이 아니라 좋았다. 그림과 그 그림 바탕에 있는 이야기에 익숙하게 만들어놓고, 이제는 마음껏 해석해보라는듯 에필로그에 몰아넣은 그림들이 본질은 그림을 드러내고 싶은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림 혹은 예술 에세이는 특정 분야에 한정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 글로서의 매력과 그림을 받쳐주는 부수적요소로의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미술분야에서 작가 스스로가 만들어낸 친절한 안내서 같은 책이 앞으로도 더 만들어진다면 작가와 관객간의 소통이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작가인 전현선작가의 그림은 진한 색채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생동감넘치고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그림이 작가의 말처럼 꿈에서 동화에서 출발한 모험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림 혹은 그림속의 구성요소들이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점을 염두하고 그림 구석구석을 상상하며 보았더니 그림만 다시 보아도 책이 참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좋았던 그림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이 <하이얀 밤에>라는 작품은 은하수에 대한 같은 동경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조금은 독특한 인물들로 구성된 낯선 그림들 중에 유난히 친숙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해설도 더할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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