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의 바다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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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남들이 보지 못하는 바다유리 속 형상을 보고 남들은 듣지 못하는 바다의 속삭임을 듣는 15살 소녀 헤티. 폭풍우와 함께 모라섬에 찾아온 노파와의 알수없는 감정교류 끝에 노파의 집을 찾아주려 험한 바다로 나선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속에서 헤티가 느끼는 고독감은 섬사람 특유의 그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어른들이 섬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어도 헤티는 그에 수긍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 '바라선 안되는 걸 소망'(291p)하곤 한다. 그랜디 할머니, 맥키 아저씨, 탐을 비롯해 헤티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녀의 주변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몽상가적 감각으로 제 스스로에게만 기대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폭풍우와 노파의 등장으로 섬사람들은 섬에 불어닥친 위기를 정체를 알수 없는 노파의 탓으로 몰아간다. 그 가운데 꿋꿋하게 노파를 변호하고 보호하는 것은 헤티와 그녀의 든든한 지지자들 몇 뿐이다. 그들의 갈등이 거세지는 와중에도 노파는 아무런 말이 없고 그녀의 정체 또한 오리무중이다.

 

 

노파의 정체는 소설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나는 읽는 내내 그녀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말을 알아 듣는지 할 줄은 아는지, 머나먼 섬에서 왔다고 하니 언어가 다른건지, 퍼 노인의 주장처럼 악을 몰고 온 환상적인 존재인지 혹은 어떤 사연을 지닌 현실적인 존재일지, 헤티의 고독과 몽상과 도전과 모험담에도 그를 앞도하는 노파의 존재는 내게 너무나도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책의 곳곳에는 노파의 정체 외에도 이런 미스테리한 요소들이 꽤 많이 있다. 노파와 헤티의 관계, 헤티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다유리 속 형상과 바다의 속삭임, 헤티의 가족, 퍼 노인의 과거 등등(사실 헤티라는 인물 자체의 설정도 그렇다). 안타깝게도 이 중에서 명확하게 원인이나 설명이 따라오는 것은 매우 적다. 하지만 이런 것들 대부분이 헤티가 더 넓은 세계로의 한걸음을 내딛도록 그녀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헤티를 몽상가라고 했다. 헤티가 본 장면들은 모두 환영이라고, 바다유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종류가 다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에 끊어졌지만, 그 느낌만큼은 이후로도 헤티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지금, 헤티의 인생은 다시금 어떤 변화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헤티는 바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으로 이미 그것을 느꼈다. 이것은 새로운 징후였다. (본문 중 7p)

 

처음 바다에서 속삭임을 들었을 때 헤티는 오래전부터 그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어느 한 부분에서는 이미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본문 287p)

 

 

 

 

 

우리나라에서 팀보울러의 소설은 성장소설로 불린다. 다 자라지 못한 소년 소녀들이 환경이나 고난에 의해 휩쓸리면서 타고난 기묘한 감각이나 재능, 그리고 주변인물의 도움과 약간의 운을 발휘해 그 상황을 벗어난다. 이전에 읽었던 그의 <소년은 눈물위를 달린다>라는 작품이 떠올라 앞서 말한 특징들이 유사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새삼 느꼈다. 조금은 정석적이다 싶은 스토리 전개이지만 팀보울러만의 감성과 신비로운 분 위기가 더해지니 그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크나큰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이번 소설은 소녀가 겪는 고난이 바다와 섬이라는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 모든것을 잘 버텨준 주인공이 더욱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외형적으로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되는 10대의 한창에서 그들이 겪는 모험과 사랑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그립고 애틋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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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렉트 in 런던 - 두근두근 설레는 나만의 런던을 위한 특별한 여행 제안 셀렉트 in 시리즈
안미영 지음 / 소란(케이앤피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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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 1년간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골라 찾아간 곳이 영국의 런던. 말 그대로 여행이 아닌 '살아보고자'하는 마음으로 간 그 도시는 갈길이 바쁜 여행객의 마음으로는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도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조금은 느긋하게, 하지만 처음 가본 곳이니 만큼 조금은 의욕적이게 이방인의 마음으로 런던을 맘껏 즐기고 재주껏 소개한다. 저자의 개인적인 감상이 듬뿍 들어있지만 런더너를 꿈꾸는 이들에게 상당히 부합하는 감상이라 거슬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적으로 꼼꼼하게 관광지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일반 관광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약간의 사담이 들어간 실용성높은 가이드 북, 지금껏 본 여행서들 중에 가장 흥미롭게 그리고 공감하며 읽었다. 특히나 실제로 보고 매료되었던 사람으로서 맨 처음 소개되는 빅벤에 대한 묘사에서부터 깊은 공감을 표한다.

 

그러므로 런던 체류 중 "그곳(국회의사당과 빅벤)에 언제 가는 게 좋을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언제든! 낮에는 다이내믹한 하늘 아래 건물의 세밀한 디테일까지 볼 수 있어 좋고, 밤이 되면 아름다운 조명이 연출해 내는 근사한 야경이 비현실적인 기분마저 느끼게 해주어 좋다고. - 본문 중29p

 

 

개인적으로 영국에서 머문 경험이 있는데, 여행이라기에도 애매하고 공부를 하러간 것도 아니었다. 물론 관광 및 유럽여행을 겸한 것이었지만 타 유럽국가보다 오래 머물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덕에 타국에 있다는 이질감을 조금은 덜어내고 머물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잠시 살다오게 된 영국은 내게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주 게으르게 가끔은 의욕적으로 친구에게 의존하거나 아주 가끔 독립적으로 런런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머무는 경험은 단순히 여행으로 다녀온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기억과 감정과 여운을 남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을 많이 되살릴수 있었다. 저자가 런던에 살다온 해는 2013년, 마침 내가 다녀온 때도 그와 가까운 2012년즘이었다. 친숙한 기억과 마주치고 맞장구치고 그와중에 가보지 못한 부분들을 아쉬워하며 이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론 넉넉하지 못했던 자금탓도 있고 뮤지컬과 영화 외에 다른 공연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해서 저자가 공연관람에 대해 쓴 부분이 유독 인상깊었다. 반면 내가 특히 좋아라했던 런던의 공원들과 마켓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기본적인 인상과 설명은 모자라지 않게 담겨있으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부분 중에 취향껏 골라잡아 기억하고 실제 영국에서 체험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으리라.

 

가장 근사한 런던의 얼굴을 만나고 싶다면 일단 공연 한 편 볼 것을 권한다. 유럽에서도 문화의 중심도시로 꼽히는 만큼, 일 년 내내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지는 이 도시는 창작자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관객들의 열정이 어우러져 서서히 이방인마저 동화시키는 매력을 갖추었다. (공연 관람으로 '런던다움'을 즐기다) -본문 중 57p

 

물론 나도 안다. 런던을 방문한 이들에게 "공원에 가보라"는 말이 다소 심심하게 들릴 것이란 사실을. 하지만 런던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공원을 거니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는 그곳의 풍경을 눈에 담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웰컴 투 그린시티) -본문 중 213p

 

 

여행책자에 실리는 뻔한 사진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의 생생한 사진이 담겨있는 점이 좋았고, 현재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게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여러 앱이나 웹사이트를 소개한 것도 특징적이다. 구체적인 여행루트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저자 본인이 어느 한 곳을 들리게 된 경로나 그 곳을 본 후 함께 즐기기 좋은 여러 코스를 반복적으로 언급해주고 있어서 관심가는 부분을 주의깊게 읽고 체크해두면 좋을 것 같다. 각 파트의 제목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있지만 영국의 랜드마크(대표적이고 역사적인 건축물들)/공연관람/문화활동(갤러리등 아트관련)/마켓/쇼핑/공원/음식/펍과 바/축제를 순서대로 다룬다. 책 한권에 담기에는 그 세부적인 내용들이 얼마나 많겠냐만은 추리고 추려 담겨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나하나의 소개글에 대해서는 분량적인 면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없지않지만 그래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이 런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궁금하고 관심가는 것들 뿐이라 감안해가며 읽었다. 목차에서 관심가는 부분만을 골라 읽기에 바쁜 두꺼운 여행책들보다는 한번에 훅 읽어내릴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런던의 모든 모습이 담겨있다는 과장된 표현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자 본인이 겪은 부분을 토대로하여 리얼 런던을 추구하며 쓴 책이라는 건 인정, 그리고 한껏 즐기고 돌아온 저자의 실속있고 흥겨운 팁이 가득한 책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런던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가본 사람도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여행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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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영어 한 줄 (스프링)
유서영 그림, 김진경 캘리그라피, 이영욱 옮김 / 소라주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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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있는 모든 명언이 지금의 나에게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여러번 보고 또 볼수록 좋은 것이 명언이 아닌가. 언젠가 우연히 펼쳐놓은 페이지의 명언 한줄이 그 날의 나에게 정말 힘이 되는 한줄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 왠지 힘이 난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땐 생각보다 큰 사이즈에 조금 놀랐다가, 묵직한 느낌의 책을 들고 한장 한장 위로 넘겨가며 그림과 글을 감상하기에는 이 정도 사이즈가 알맞는구나 하고 느꼈다. 보통의 책처럼 한번에 읽어내리기엔 조금 어려운 구조일지 모르지만 매일매일 하루를 보낼때마다 책 한장을 넘겨 다음 페이지를 보기에는 참 좋다.

 

두꺼운 종이의 재질은 여러번 책을 넘기고 마음껏 색칠을 할 수도 있다. 길다란 책의 한 페이지에는 2장으로 분리할 수 있는 경계와 절취선이 있다. 그냥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지만 한번 꾹접어서 뜯어내면 깔끔하게 분리된다. 캘리그라피와 일러스트가 없는 뒷면에는 파스텔톤으로 물감이 동그랗게 번진것 같은, 혹은 붓으로 한획에 덩그라니 그려놓은 것 같은 단순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 엽서나 편지지 사이즈와는 다른 정사각형의 편지지가 되겠지만 메모나 편지를 써서 보내기에 아주 좋을 것 같다. 일부러 이런 다양한 의도로 편집되어 나온것 같아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용도로 쓸모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독서, 명언 읽기, 영어공부, 색칠놀이, 캘리그라피 따라하기, 엽서만들기, 편지쓰기 등등.

 

 

 

 

I'm as proud of what we don't do as I am of what we do - Steve Jobs (왼,)
I'm a slow walker, but I never walk - Abraham Lincoln (오, 위)

 

 

 (왼쪽부터 순서대로 각 페이지의 뒷면 / 책 맨 뒤에 제시되어있는 일러스트 색칠본 / 직접 싸인펜으로 칠한 페이지)

 

 

맨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글과 구조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쭉 읽어보았다. 일반적인 책의 구조와는 달라서 그 점이 재미있었고, 그 다음에는 내용적인 면에서 맘에 들거나 맘에 들지 않는 명언들을 골라내며 읽었다. 명언의 출처가 하나하나 쓰여있는데, 몇세기전의 고전명작을 만들어낸 철학자나 작가들부터 현대의 유명 CEO, 정치가들, 방송인들까지 명언의 주체들의 범위가 참 넓다고 느꼈다. 마음에 드는 명언들에 그리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고, 같은 그림체에 반복되는 오브제(주로 꽃을 중심으로)이지만 다양한 매체들과 결합시켜 풍성한 그림들을 만들어놓았다. 일러스트의 선이 굵직해서 색연필보다 싸인펜을 쓰고 싶어져 몇가지 없는 색색의 펜을 모아 색칠을 해보았다. 컬러링북을 그리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초심자들에게 좋은 책이라고 느낀점이 마치 팁처럼 그림 안에 몇가지 색이 이미 칠해져있는 경우도 있고, 책의 맨 뒤에는 몇가지 그림의 색칠완성본 샘플도 작은 사이즈로 실려있다. 정 막막하다 싶으면 참고로 보고 그 그림들부터 연습하면 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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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얼리스트 X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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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잡지를 보면 '이 옷 사고싶다'하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책을 보다보면 '아 이렇게 입고싶다' 하고 감탄하게 되곤 한다. 표지부터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또렷히 마주치는 눈빛, 짙게 칠해진 입술, 꼿꼿하게 세운 옷깃과 정갈하게 넘긴 머리카락까지. 하지만 책을 넘기니 표지만큼이나 자신만만한 얼굴들과 사진이 찍힌든 말든 자신이 표현해낸 스스로의 자존감과 개인적인 미적감각 등이 참으로 눈부셨다. 각 개인의 인생이 어찌되었건 그가 찍은 사진속엔 다양한 인물과 스타일이 등장한다. 교복을 입은 어린 아이부터 대도시의 멋쟁이들, 전통복장이나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나 슈트를 차려입은 노신사들, 과감한 노출을 한 사람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정해놓은 범위나 특정 대상이 없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인 스타일을 장착한채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찍혀있다. 그들 중 진지한 표정이나 뽐내는 얼굴은 있더라도 인상을 쓰고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사진속 인물이 꼬질꼬질한 작업 복을 입고 힘들게 일하던 중이라하더라도 스콧슈만은 그 순간의 그의 모습(외모,스타일,배경,당시의 상황까지 모두 통틀어서)에서 영감을 받고 관심과 호감과 조금의 경배를 포함한 사로잡힌 마음으로 그 사진을 찍었을 테니말이다.

 

 

 

 

 

패션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옷뿐 아니라 헤어스타일, 악세서리, 분위기, 눈빛, 그리고 인생 이야기가 담겨있다. 가장 인상적인 사진을 뽑자면 등을 시원하게 보여주고 주황색 치마를 펄럭이며 자전거를 타는 여인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과 '유에'라는 사람의 정면 사진이다. 이 책에는 글이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고른 두가지 사진은 그나마 저자의 부연설명이 들어있는 사진들 중 하나이다. 패션사진을 보면 전체의 분위기를 보고, 마음을 끄는 포인트를 발견하고, 다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훝어보며, 그 후에 세세한 부분을 관찰한다. 하지만 보통 앞의 두 과정만을 거치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의 사진들은 앞서 설명한 4가지의 과정을 전부 사용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스콧 슈만이 그들의 스타일과 패션을 찍어 상상의 인생을 그려본다고 한 것처럼, 사진마다 그들의 인생을 알려주는 힌트가 곳곳에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도 꽤 많다. 늘씬한 뒷태와 원색의 치마에 눈길을 빼앗기기 쉽지만 잘 살펴보면 그녀의 다리가 의족인것을 알수 있다. 이 사진을 찍기위해 뒤에서 열심히 쫓았다던 슈만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세세하게 사진을 보지 않고 지나갔다면 어쩌면 이 사실을 끝내 알지못하는 독자도 있지 않을까. 유에의 사진은 사진만으로도 굉장히 묘하지만 그 옆에 쓰인 글이 그 사진을, 사진 속 인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이 사진들에 등장하는 옷들은 사진 속 상황과 그 인물의 성격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진들을 정리할 때 나는 끊임없이 '이 사람의 인생은 어떨까?' 하며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은 즐겁고 어떤 것은 슬프지만 그게 인생 아닌가. 심지어 상상한 인생이라도 말이다. - 본문 중 4p

 

 

 

 

 

 

비가 오는(혹은 왔던) 날씨, 까맣고 조금은 각이 진 비닐을 뒤집어쓰고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은 내게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사진속 비닐이 바람에 휘날린 우비일지 정말 말그대로 비닐 봉투일지, 어쩌면 비닐같아 보이는 멋진 겉옷일지 알길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비닐봉투 같아보이는 우비를 뒤집어쓰고 로마시내를 돌아다닌 적이있기 때문이다. 트레비분수 앞에서 찍은 사진속에 난 상반신을 파란 봉투안에 담아놓은 채로 당당하고 즐거운 자세와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다. 당시엔 비가 아니라 눈이 왔었다. 그 사진은 지금보아도 웃음이 난다. 이 사진 속 여자는 어쩌다 그 비닐을 뒤집어 쓰고 걷게 되었을까. 나만큼이나 그 옷과 날씨와 상황을 즐기고 있었을까.

 

그가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가 없을 땐 아이폰을 사용한다거나,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을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따라 간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꾸준한 영감을 주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 사진을 찍는 등 자유롭고 순간적인 작업 과정을 거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스콧슈만과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가 한국에 여행을 왔고 나에게 잘 어울리게 차려입은 옷에서 그의 관심이 동할만한 포인트가 있다면 나도모르는 새 사진이 찍히겠지. 그것도 아주 근사한. 만약 내가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면 그가 원하는 사진을 손에 넣을 때까지 조금 더 나를 따라 다니겠지- 즐거운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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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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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살 리코쿠를 화자로 한 첫번째 글부터 30대의 리코쿠를 화자로 한 마지막 글 사이에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한다. 물론 그 화자들이 이야기하는 시점 또한 다양하다. 196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을 아우르는 꽤나 긴 시간동안 서양식 대저택을 거점으로, 그 안에서 자라고 저항하고 독립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야나기시마 일가로 편입되거나 태어나거나 혹은 스쳐가게 되는 다양한 인연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 집안의 이야기는 묘하다. 화목하고 평온해보이지만 평범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사연들이 꽤 많다. 책의 맨 처음에 리코쿠를 중심으로 야나기시마 일가의 가족관계를 아주 간결하게 써 놓은 페이지가 있다. 알아보기 쉬운 가족도가 아니라 굳이 글로 풀어놓은 것은 각각의 혈연관계 및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타고난 성향이나 독특한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다양한 인격과 성격을 지니게 된다. 리코쿠의 형제들만 보더라도, 우등생스타일에 살가운 성격을 지닌 노조미, 고집센 무뚝뚝이 고이치, 총명한 외톨이 리코쿠와 정원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우즈키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과 영향을 주고 받았을지언정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다. 한 일가를 내세워 가족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보이는 이 책은 실은 가족 구성원 각 개인의 스토리를 묶어놓은 것과 다름없다. 중심이 되는, 가족이 모이는 장소(대저택)는 중요한 영향력과 이야기를 모으는 역할을 하지만, 그에 영향을 받고 그 안밖을 누비며 자라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각각이다. '가족이라 해도 결국은 모두 혼자가 아닌가'라는 작가의 말은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가족안에서의 고독이나 고립이 아닌, 각자 개성과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사람으로서의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거기서 우리 가족만의 유행어랄까, 일종의 암호 같은 것도 생겨났다.

"가엾은 알렉세이에프"

"비참한 니진스키"

라는 것이 그중 하나이며,

"라이스에는 소금을"

도 그중 하나다. 전자는 우리가 어릴적에 누차 들었던 엄마의 선조들 일화에서 비롯된다. (...) 그날밤 우리는 두 남자를 위해 건배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들어온 교훈은 순수하게 슬픔을 표현하기 위한 암호가 되었다. (본문 중112-4p)

 

 

개성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보니 그에 대한 애정이 가는 것도 막을수 없지만 야나기시마 일가 자체가 가진 환경적인 특징도 눈길을 끈다. 고지식한 할아버지(다케지로)와 러시아인 할머니(기누)의 삼남매(기쿠노,유리,기리노스케), 그리고 기쿠노와 도요히코의 아이들(리코쿠를 포함한 사남매)까지 3대에 걸쳐 모인 이 가족은 그들 나름의 규칙과 비밀, 그리고 버릇(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되물림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대학이전의 교육은 학교를 가지 않고 오로지 집에서 이루어진다거나, 야나기시마의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1년간 해외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나, 서로의 슬픔을 표현하거나 위로하고자 할 때 하는 오로지 가족만이 알고있는 말버릇이라던가(가엾은 알렉세이에프/비참한 니잔스키- 의미는 다르지만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라는 표현 역시 그들만의 암호이다).

 

 

"엄청 근사한 집이었어요, 그렇죠?"

다카오가 뭔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따뜻한 기분이 들고, 거기에 내 스스로 당황하고 있었다. 미혼인 채 아이를 낳는 데에는 적지 않은 각오가 필요했을 테고, 더구나 본부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환영받았을 리 없다. 하지만 한곳에 모여 손을 흔들고 있던 그들은 행복한 대가족처럼 보였다.

나는 차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교통안전 부적 주머니를 바라본다.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본문중 416p)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고 1부터 23까지 숫자와 시점으로만 제목이 붙은 이야기들은 한 편마다 화자가 달라져서 이번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할까 호기심이 동해 책을 끊어읽기가 참 힘들었다. 교차되는 시간과 시선들 사이에서 많은 인물들의 연결선을 찾아 다시 정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가출, 방황, 불륜, 이혼, 독립, 유학 등등 단어로 나열해놓고 보니 자극적(이라기보단 조금 불편한)이고 쉽지 않은 사건들이 이 이야기에는 정말 많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당사자나 그 가족의 반응은 격하지 않고 조금은 미지근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들도 당황하거나 화를 내기야 하지만 그 상황이나 감정을 풀어내는 그들의 어조는 차분한 감이 있다. 오히려 외부의 시선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할때 그 화자들이 차분하고 당연스레 그 문제를 받아들이는 일가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거나 격노한다. 독자는 방관자이면서도 어느새 그 가족에 동화되어 담담하게 그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항상 함께하고 소중히 여기지만 100퍼센트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가족이 아닐까. 대저택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은 시간이 흐르면서 확대되고 분리되고 축소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각자가 분리된다 해도 그들이 한 가족이었던 것만은 확연한 사실이기에 그 가족은 자신안에서 하나의 역사로 남게된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장소는 이 이야기 내내 듬직하고 조금은 쓸쓸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점과 점을 세로로 연결하는 거란다."

노무라씨는 그렇게 말한다. (...) 일은 여기저기에서 한꺼번에 일어난다. 점과 점을 세로로 연결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인 듯하다. / 그리고 세로로 이어진 점과 점은 물론 가로로도 흘러간다. 엄청난 기세로, 절대적으로. 어느 누구도 멈추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역사의 일부란다." (본문 중 53-4p)

 

 

묘한 일이지만 이 방에 있다 보면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가 있다. 정원을 뛰어오는, 운동화를 신은 어린 우즈키의 발소리며 진즉에 돌아가신 아라키 씨가 미는 손수레의 덜그럭거리는 소리, 중국 방에서 어른들이 마작 패를 휘젓는 소리, 누군가의 당구공을 때리는 소리. 여름 오후에 창문을 열어둘 때면 벌의 날갯짓 소리며 나무를 다듬는 가위질 소리에 섞여 들리는 할아버지의 해먹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테라스에서 일광욕 중인 외삼촌의 포터블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킹크스며 스몰 페이시스의 노래가 머리 위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헬리콥터 소리처럼 내 귀에 띄엄띄엄 와 닿는다. 그것들은 내가 아니라 이 집의 기억이리라. 왜냐면 내가 알리 없는 소리-개들의 짖는 소리, 정원에서 열린 듯한 파티의 떠들썩함, 어린 노조미 언니와 치하루 언니가 나누는 비밀 이야기며 키득키득 웃는 소리-까지 가끔 방에 가득 차기 때문이다. (본문 중 579-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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