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미술 - 그라피티에서 거리미술까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42
스테파니 르무안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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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알차다는 표현이 딱 맞는 책이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알지 못했지만 총서라길래 나름대로 백과사전 같은 두꺼운 책을 상상했는데 도착한 책은 손바닥 사이즈의 아담하고 얇은 책이었다. 가벼워서 이동할 때 자주 들고 다니며 읽었는데 다양한 작품들이 사진으로 많이 실려있고, 도시 미술의 기원부터 맨 마지막 도시 미술가들의 생생한 인터뷰까지 읽는 내내 흥미진진해서 생각보다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아무래도 시각자료에 자꾸 눈이 가서 설렁설렁 읽었는데, 내용을 얼핏 보니 왠지 제대로 흐름을 짚어보고 싶어 나중에는 다시 처음부터 내용을 정리해가며 정독해서 읽었다. 중간중간 낯선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본문 내에서 가볍게 해설되며, 책의 맨 뒷장의 용어설명에서 보충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도시 미술이라고 했을 때 딱히 감이 오지 않는다면 그라피티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물론 그라피티가 거리미술의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큰 축들 중 하나라는 것은 명백하고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향 또한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도시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는 친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현대 도시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도시 미술을 마주하고 있다.(광고, 포스터, 벽화, 그라피티, 조형 전시물, 건축 설치물, 플래시몹을 포함한 퍼포먼스-해프닝- 등등)  19세기 말, 추정하기로 1960년대즈음 꽃 피우기 시작한 이 장르는 50여년 동안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을 거쳐 다이나믹한 역사를 겪어왔다. 민중의 낙서에서 출발해 반체제, 회화 탈피를 부르짖던 반항적 성향이 더해지고, 단순한 정치적 선전물을 넘어, 예술이 아닌 반달리즘으로 몰아가는 언론과 정부의 탄압을 이겨내고, 여러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대중문화로서 인정받기까지, 도시 미술의 기원과 흐름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 흔적을 고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낙서는 반달리즘과, 그리고 민중의 가장 속되고 외설스러운 표현과 연결된다. 낙서의 첫 번째 기능은 낙서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 테지만 그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긴장이나 갈등의 상황 속에서 표현하게 해 주는 기능도 갖는다.

(본문 중 22p, 도시 미술의 기원- 민중들의 낙서 본능)

내가 생각하기에 도시 미술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전문 예술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익명의 '민중'의 손에서 그려진 '낙서'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 낙서가 예술로 관심받고 작품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예술과 삶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상황주의자들의 강박이 반영되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예술분야에서는 이전의 존재한 어떤 성향이나 장르에 대한 저항과 반발로 새로운 장르가 개척되는 것이 흔한데에 비해 일반 민중이 누리고 자유로이 행했던 하나의 행위에서 시작되었고, 그에 전문예술가들이 합세해 반항적인 성향이 더해지고 더욱 큰 세력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독특하다. 후대에 예술가들이 여러 가지 목적(상업성 탈피, 반체제적 메시지 전달, 정치적 선전 등등)을 위해 거리로 나왔던 것처럼, 초기 낙서의 기능 역시 자신의 존재 표명과 의견의 표현이었다는 점을 보면, 예술가가 아닌 민중들도 할말이 많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책을 다 읽고 난 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에도 관심이 갔다. 아주 깊고 전문적으로 파고들지는 않더라도 관심 있는 분야에서 단단한 기초 상식을 쌓기에 아주 괜찮은 책인 것 같다. 책의 사이즈와 분량 때문에 아주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기엔 적합하지 않겠지만, 한 인물, 하나의 장르, 하나의 사건 등을 주제로 책 한 권을 뚝딱 읽어버리기에 너무 좋은 것 같다. 책 뒷면 책날개에 쓰인 142권의 제목들을 보니 다양한 주제 중 관심 가는 것들이 제법 많다. 세로로 쓰인 소개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우리 인간의 지적 호기심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발간될 것입니다." (책날개,  디스커버리총서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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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기적의 영어회화 다이어리
영어콘텐츠연구소 지음 / 넥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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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할 때 '하루에 한 문장씩'이란 계획은 누구나 한 번쯤 세워봤을 것 같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 시행하기엔 막연하기만 하다. 그 한 문장은 매일 어디에서 따올 것이며 어떻게 공부 기록을 남기고, 누가 매번 그 '하루'를 체크해주겠는가. 이 책은 그 막연하기만 한 계획에 현실성을 부여해준다. 하루하루 암기할 문장을 던져주고, 공부하기 싫은 주말엔 지난 한 주 동안 공부한 것을 복습 및 확인시켜주는 간단한 테스트도 준비되어있다. 최근 영어에 열을 올리시는 어머니와 함께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무료로 제공되는 mp3 파일은 페이지마다 오른쪽 상단에 제시되어있는 QR코드를 이용하면 된다. 스마트폰이 흔해진 만큼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QR코드지만 나도 엄마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조금은 낯설게 mp3 파일을 찾아 들어보았다. 하루 3번 읽어보라는 가이드의 말처럼 제시된 문장이 3번씩 반복되는 파일이 각각 하나, 일주일치(5문장으로 이루어진 대화) 문장이 연결된 채 읽어주는 파일이 하나씩 있다. 어떤 페이지에 있는 QR코드를 읽어도 각 날짜를 찾아서 들을 수 있다. 폰마다 다른 건지 어머니 폰과 내 폰에서 보여주는 화면이 약간 달랐는데 파일 하나씩은 다운로드할 수 있지만 전체 파일(한 달 치, 혹은 일 년 치)을 다운받는 버튼을 찾지 못해서 아쉬웠다. 

아직 새해가 되지 않았지만 후에 혹시라도 밀릴 것을 감안해서 며칠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손바닥만 한 캘린더북은 거실 TV 옆에 세워두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공부하기로 정했다. 정신없는 아침은 각자 자율적으로 저녁엔 식사시간 이후로 될 수 있으면 함께. 쭉 내용을 미리 훑어보니 어려운 단어도 별로 사용하지 않고 실제로 이용하기 좋은 간단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편이라 그리 부담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마음에 들었다. 당장에 사용하기에 좋은 문장들을 찾아내기도 하고(예를 들어 can you help me set the table? - 이 책을 붙잡고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 마침 저녁식사 전이었다), 일주일 공부하고 나선 한 문장씩 암기해서 정말 대화처럼 주고받아보자 다짐도 했다. 시작 이틀째인 오늘까진 순항 중. 누군가와 함께 읽고 공부하니 조금은 덜 외롭고, 의욕도 샘솟는다. 어머니와 함께 하니 내가 더 자주 읽어주고 가르쳐주는 입장이 되어서 암기가 잘 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서평을 쓰기 위해 꼼꼼히 책을 훑어보자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게끔 구성된 널찍한 공백이 마음에 들었고, 문장 밑에 마치 달력 일러스트라도 되는 것 마냥 그려진 그림들이 귀여웠다. 그림은 위에 제시된 대화에 매치되는 것들이어서 문장이 잘 암기되지 않을 때 커닝 페이퍼처럼 슬쩍 바라보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학습을 위한 책이다 보니 독자들의 꾸준한 노력이 중시되겠지만, 내용이 참 알차고 비주얼도 훌륭한 책인 것 같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영어책보다 노란색이 발랄하게 느껴지는 이 책의 인상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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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맑음 - 일본 아이노시마 고양이섬 사진집
하미 지음 / 반정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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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일본 아이노시마 고양이섬 사진집. 부제와 저자의 프롤로그(들어가며)에 쓰인 그대로 일본에 고양이가 많기로 유명한 아이노시마 섬에 가서 만난 고양이들의 사진이 가득한 책이다. 자유로이 바닷바람을 쐬고 관광객들에게 먹이를 바라는 듯 빤히 눈맞춤을 하는 길냥이들부터 목걸이를 메고 집사(주인)의 자전거 옆을 지키거나 나른하게 햇볕을 쬐는 집냥이들까지 한 섬에 살고 있는 다양한 고양이들의 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책. 


바닷가나 항구, 방파제로 둘러싸인 길의 맞은편, 그리고 섬에 흔히 있을법한 야트막한 돌담, 혹은 마을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가, 풀이 무성한 산길로의 초입 등 작은 섬의 다양한 배경 안엔 그만큼 다양한 고양이들이 있다. 섬안 곳곳에서 마주한 고양이들을 담아내며 작가는 사진 안에 혹은 사진 옆에 짧은 글도 보탰다. 여행자가 고양이를 마주하며 던질법한 혼잣말이나, 고양이에 빙의하여 그 고양이의 속마음을 상상하여 적은 것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냥, -옹 하는 끝말을 붙여 쓴 내레이션 같은 글귀들은 오글거려서 대충대충 넘어갔는데, 그보다는 고양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나 저자의 생각을 담은 글들이 더 좋았다. 담담하게 길고양이들의 상처에 대해 언급하고 고양이가 가득한 섬을 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풀어내는 글들이 더 담백하게 와닿았다.


병들고 약한 고양이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먹이를 구하기도 어렵고, 숨어있을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녀석들은 경쟁자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료가 항상 채워져 있는 항구 근처를 떠나지 못한다.     - 본문 중 88p

오후는 대부분의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
그들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곧 섬을 떠나야 할 여행자는 자꾸 욕심이 난다.
한 녀석이라도 더 눈을 맞추고 싶은...                -본문 중 173p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사진의 구도상 메인 피사체인 고양이가 한가운데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흔한데, 두 페이지에 걸쳐 하나의 사진을 보여주는 경우 고양이의 얼굴이나 몸이 접혀서 보인다는 점이 안타깝다. 사진의 사이즈가 줄어들더라도 한 페이지로 깔끔하게 편집해서 넣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그리고 장점이랄지 단점이랄지 애매하지만 전문작가의 사진집이라기보단 그저 고양이가 좋아 죽겠는 한 집사의 블로그 같은 느낌이 강하달까. 사진 프레임 안에 직접 개입해있는 글 때문일 수도 있고, 고양이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어쩌면 대놓고 B-Cut이라는 목차를 마련해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을 마지막에 보여준 탓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친숙하고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읽다 보면 고양이가 가득한 섬으로 나도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고양이에 빠지고 싶은 날 가볍게 펼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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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푸른 봄 1
지늉 지음 / 책들의정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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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키에 웃는 얼굴로 완전 무장한 채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예쁨 받길 원하는 신입생 여 준, 훤칠한 키에 잘난 얼굴에도 늘 피곤하고 화난듯한 인상으로 퍽퍽한 삶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복학생 남수현.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하나도 닮은 바 없는 두 사람이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그것도 좋은 인연이 되기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는 팀 과제로. 두 주인공의 첫 만남과 대학생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나름대로의 사교와 방어법을 익혀가는 과정을 보니 대학교 다닐 때의 난 어땠더라 하는 생각과 이어져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이 책은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었던 작가의 데뷔작이다. 그림의 첫인상은 단순히 예쁘다- 정도였는데 다 읽고 나니 엉성한듯하지만 다채롭게 변하는 인물들의 표정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향적인 것과 내향적인 것의 갭이 있기 마련인데 주인공인 준은 그 갭이 매우 큰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외향과 일치하게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성격도 갖고 있지만 가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 외로움과 타인에 대한 포기가 큰 것을 속으로 숨겨가며 살고 있다. 부유하지만 냉정한 가족들과의 짧은 만남으로 드러난 것은 준이 가지고 있는 상처의 일부분이겠지만 그로 인해 흔들리고 힘들어하는 준의 이야기가 절절했다. 준과 반대로 수현은 겉과 속의 갭이 아주 작은 사람 같다. 거짓말이 싫고, 기분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필터링 없이 그대로 표출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가 그렇게 사교를 위한 사소한 거짓말이나 예의상 하는 빈말조차 하지 않는 성격이 된  바탕엔 그런 사소한 부분을 챙기기엔 그의 생활(아직까지 드러나기엔 주로 경제적인 면에서)이 너무나도 팍팍해 지쳐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런 두 사람의 갭이 외향적인 특징들을 정반대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비슷한 내향적인 면을 지녔을 것 같다. 준이  수현을 보고 처음부터 '나와 닮은 사람일지도' 하고 느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사실을  전 3권으로 나온 완전 소장본의 제1권에 담긴 내용만으로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완전히 파악하기는 무리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두 청년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다.  


이야기의 앞부분이다 보니 주인공을 필두로 그 외 여러 등장인물들이 가볍게 소개되고 있지만,  아직 본격적인 갈등이나 큰 줄거리의 전개가 시작되지 않았다. 표지에 쓰인 "우리 집 룸메 조심"이란 문구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한집살이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두 사람이 얼른 룸메이트가 되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친해졌으면 좋겠다. 타인 없이 두 사람만이 주고받던 핑퐁 같은 대화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였기에. 2권, 3권에서 가까이 보면 아수라장일지라도 멀리서 보면 푸른 봄과 같이 싱그러울 그들만의 대학생활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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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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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이렇게 총 3부로 구성된 책은 각 부가 서로 다른 주인공,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내세워 각각의 이야기가 무관한 듯 독립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끈처럼 이어진 이야기이며, 다른 듯 보이지만 여러가지 공통점과 반복적인 질문들이 등장해 3부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꽁꽁 묶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방대하고 철학적이며 현실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이야기였다.
1부의 주인공 토마스는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연달아 잃고, 직장(정확히는 직장인 박물관에서 파견보낸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로 알게된 기이한 십자고상을 찾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높은산으로 머나먼 길을 떠난다. 2부에서는 브라간사(포르투갈의 높은산 인근지역)의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로조라가 하룻밤새 겪은 환상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앙과 미스테리 소설을 탐닉하던 그의 아내가 알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 하는 밤 그의 아내와, 죽은 남편의 시신을 이끌고 온 한 노부인이 차례로 그를 방문한다. 3부의 주인공은 캐나다 상원의원인 피터 토비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지인의 권유로 휴가를 떠났다가 들린 미국의 영장류연구소에서 한 침팬지와 깊은 교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꽤나 충동적인 결정으로 침팬지 '오도'를 사들이고 그의 부모가 살았던 터전이며 자신의 출생지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이민을 결정한다.
일부뿐인 줄거리지만 이 세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찾아낸 공통점은 죽음, 신앙, 침팬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주인공 세 사람은 모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거나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신앙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을 주고 받으며, 침팬지라는 유인원이(운명적이거나 충격적인 만남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중간에 등장하고, 사건이 시작되는 배경은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포르투갈의 높은산을 마지막 배경지로 삼는다.(다만 두번째 이야기만은 시체로 등장하는 라파엘 카스트루의 출신지이자 살아온 곳의 배경으로 나올 뿐이다.) 맨 처음 나는 각 부의 제목에 등장하는 "집"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단순한 줄거리와 제목만으로 이해했을 때 1부의 '집'은 죽음으로서 헤어지게된 사랑하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었으며, 침팬지의 형상을 한 십자고상을 찾아냄으로써 파괴되어버린 예수라는 고상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다. 2부에서의 '집'은 마리아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죽은 남편의 시체(온갖 오물과 새끼곰(=잃어버린 아이)과 침팬지를 품고 있는)였으며, 3부의 '집'은 침팬지 오도와 함께 정착하게 된 포르투갈의 높은산에 자리잡은 현실적인 집 혹은 자신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한 안도감 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피터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침팬지 오드와의 삶을 선택하고 남들이 그 이유를 물어올 때 스스로도 잘 대답하지 못하지만 이미 오드가 자신의 삶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테레사의 말이 옳다. 오도는 그의 삶을 차지해버렸다. 그녀는 오도를 닦아주고 보살펴준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피터는 침팬지의 기품에 감동받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이다. 
  "테레사, 누구나 상황이 납득되는 순간을 찾고 싶어하잖아. 난 그곳을 떠나와 여기서 항상, 매일매일 그런 순간들을 발견해."    (본문 중 366p)

소중한 사람을 잃고 외로움과 괴로움에 휩쓸린 사람이 그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삶으로의 의욕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자신을 삶을 차치해버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세 사람은 그 발견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토마스와 피터가 실재적으로 포르투갈의 높은산으로 떠나는 여행을 감행한다면, 에우제비우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살다가 자신을 찾아온 노부부와의 만남과 부검과정에서 벌어진 몽환적인 환상들을 통해 내면적인 여행을 거친다. 토마스와 에우제비우가 그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슬픔과 절망을 느꼈다면 피터는 다행스럽게도 '오도'를 만났다.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앞서 발견한 공통점들은 '집'과 더불어 죽음과 삶의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비유로도 보인다. 너무나 다르지만 어쩌면 단 하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풍성하고 매력적으로 이끌어낸 작가의 솜씨가 감탄스럽다. 이 책은 절대 도중에 끊어서는 안된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온전히 읽고 난 후 몇번을 되짚어보고서야 완벽히 감탄할 수 있다. 이 책을 온전히 읽고 소개할 수 있으려면 나도 몇번의 완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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