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에게 별이 되자
이상.김유정 지음 / 홍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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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현대문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한국의 현대문학이 막 움트고 있던 1910년대, 바로 그때 태어난 사람 중 이상과 김유정이 있었다.(이상 1910년생, 김유정 1908년생) 20대 초중반에 활발히 글을 쓰며 문인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1937년, 같은 해 19일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두 문인은 문학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른 개성을 지니지만, 세상을 뜬 시기로 인해 함께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처럼 그들의 서거 81주기를 추모하는 책까지 출간되었다. 이상이 김유정에게 동반자살을 제의한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하지만, 20대 중반에 서로를 알게 되어 죽기 직전까지 짧은 교류를 끝으로 세상을 등진 그들이 우리의 상상만큼 강하고 애틋한 친우 관계였을까.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남긴 문학과 다른 문인들이 그들에 대해 남긴 글로서 추측해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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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학창시절 교과서 속에서 봤음직한 유명한 시나 소설의 '작가' 이상과 김유정이 아니라, '인간' 김해경(이상의 본명)과 김유정을 엿볼 수 있는 수필이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을 주로 다뤘다. 책의 구성은  <이상 다시 읽기>, <김유정 다시 읽기>, <이상 김유정을 추억하다>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다시 읽기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골수 팬이 아니라면 읽어보지 못했을 짧은 글들이 주를 이루고, 마지막 장인 <이상 김유정을 추억하다>는 당대 이상, 김유정과 교류하고 함께 작품 활동을 한 문인들이 먼저 간 그들을 추억하며 쓴 글들이 수록되어있다. 그 뒤로 에필로그로 이상이 쓴 김유정에 대한 글(희유의 투사, 김유정-소설체로 쓴 김유정론)도 실려있는데 매우 재미있다. 많은 문인들이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만큼 그와 유정 역시 그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애정 하였음을 느낄 수 있어서 유쾌하고 재미나게 풀어낸 글이었지만 (그들의 최후를 알고 읽었기 때문인지) 동시에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김유정에 대해) 이분들을 설복할 아무런 학설도 이 천하에는 없다. 이렇게들 또 고집이 세다. 나는 자고로 이렇게 교만하고 고집 센 예술가를 좋아한다. 큰 예술가는 그저 누구보다도 교만해야 한다는 일이 내 지론이다. / 다행히 이  네 분은 서로들 친하다. 서로 친한 이분들과 친한 나 불초 이상이 보니까 여상의 성격의 순차적 차이가 있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은 혹 불행히 나 혼자의 재미에 그칠는지 우려되지만 그래도 좀 재미있어야겠다. / 작품 이외의 이분들의 일을 적확히 묘파해서 써내 비교 교우학을 결정적으로 여실히 하겠다는 비장한 복안이거늘, 소설을 쓸 작정이다. 네 분을 각각 주인으로 하는 네 편의 소설이다.

(313p, <에필로그> 희유의 투사, 김유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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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김유정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보았고, 대학에 다닐 땐 도서관에서 찾은 오래된 소설집 등으로 보았다. 이 책에 실린 작품과 편지들은 본 것도 몇 가지 있지만 처음 보는 것들도 꽤 많았다. 이상의 작품은 시나 소설이나 지금 시대에 읽어도 '파격적'이나 '괴팍'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뭔가 호쾌하다 할 정도로 강한 인상의 작품이 많았는데, 그가 살던 시대의 풍경을 차분히 읽어주는 수필이나 그의 지인들이 등장하는 편지글을 보니 단지 그뿐인 사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형적인 모던보이라는 평을 듣고 다방이나 카페를 운영했을 만큼 그 당시 새로이 유입되는 문화나 언어에 민감했던 사람이었을 그의 성격은 특히 수필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소설 등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당시 일상에서 쓰인 다양한 외국어들(예를 들어 요비링=초인종, 츄잉껌, 스마일, 플래시백, 스틸 등등 - <이상 다시 읽기>, 수필 '산촌 여정' 중)이 많이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존댓말로 쓰인 수필이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그의 글은 참 다정해 보인다. 특유의 농담 섞인 말투와 무던한 듯 솔직한 그의 표현은 친한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사랑하는(했던?) 여인, 그리고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한결같다. 그의 편지를 보는 것이 특히 즐거웠다.


 

자주 편지나 하오. 나는 아마 좀 더 여기 있어야 되나 보오. 참, 내가 요새 소설을 썼소. 우습소? 자, 그만둡시다. -이상 1936년 6월

(163p, <이상 다시 읽기> 김기림에게 3 中)  

이틀이나 걸려서 이 글을 썼다. 두서를 잡기 어려울 줄 알지만, 너 같은 동생을 가진 세상의 여러 오빠들에게도 이 글을 읽히고 싶은 마음에 감히 발표한다. 내 충정만을 사다오. / 닷샛날 아침, 너를 사랑하는 큰 오빠 쓴다.

              - 1936년 9월 《중앙》 (184p, <이상 다시 읽기> 여동생 김옥희에게)

 

김유정의 이미지는 모던보이 이상에 비하자면 좀 더 유약하고(실제로 폐결핵을 오래 앓아 몸이 안 좋았다.), 섬세하고 순박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남긴 편지와 그에 대해 채만식이 쓴 글을 보면 그는 누구보다 강하고 끈질겼으며 현실을 알면서도 꿈꿀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상이 남긴 글에서도 그를 '희유의 투사'라고 지칭한 걸 보면 호쾌하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바둥댈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 감상적인 사람이 되었지만 병상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하며 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면모도 갖게 된 것 같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만 속정이 깊고 눈물이 많은 것은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많은 문인들이 경제적인 이유와 그 외의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죽음을 꿈꾸던 이상과 달리 그는 건강하고 희망적인 삶을 꿈꾸며 그것을 원했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좀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늘 주위의 인물을 경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는 말 없는 우울을 낳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폐결핵입니다. 매일같이 피를 토합니다. / 나와 똑같이 우울한 그리고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그런 여성이 있다면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그를 한없이 존경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여성에게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되면 그건 연애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한 동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건대, 이성의 애정이란 여기서 비로소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후략) 

- 1936년 5월 《여성》 (217p,<김유정 다시 읽기>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 中)


 

이 책에서 좋았던 점은 낯선 수필과 편지글을 주로 수록했다는 점, 그리고 현대어 풀이가 필요한 각주를 본문 밑이 아니라 본문 안에서 괄호를 이용해 바로바로 써준 점이었다. 약 80년 전의 단어는 알듯 말듯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필요한 만큼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읽기에 좋았다. 이젠 알게 된 지 꽤 오래된 두 문인의 글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그들에게 갖고 있던 나름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그들의 친숙한 면모를 알게 된 것 같아 좋았다. 내가 현대문학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리고 살아있는 한 언제라도) 소통하거나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살아있는 대상(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작가가 남긴 편지글을 보며 나도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 답장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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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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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영화의 우울한 남자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여자라면 누구든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조건의 남자 테이트와 평범하지만 건강하고 출중한 요리 실력을 가진 케이시, 액션 영화에서 엄청난 운전 실력을 보여주며 히로인을 구해내는 멋진 남자 잭과 마을을 종횡무진하며 오토바이를 즐기고 소방관을 돕는 등 쾌활한 미인 지젤, 수수께끼투성이의 연극제작자 키트와 총명하고 우아한 미인인 올리비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열악한 연기 실력을 이용하는 데블린과 어리지만 연기에 재능을 보이며 똑똑하게 자신이 한 일을 책임지고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로리. 

오만과 편견에서 등장했던 다아시-엘리자베스, 빙리-제인, 베넷 부부, 위컴-리디아 커플이 현대에서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원작에서처럼 리지(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실제 가족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니고 인연을 이어간다. 원작을 연극으로 꾸며 각자 그 배역을 맡아 연기하게 되어 원작에서의 캐릭터처럼 서로 사랑에 빠진다. 로맨스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두 커플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데 반해, 베넷 부부와 위컴-리디아 커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재미있었다. 


베넷 부부는 어릴 적 연인이었지만 이야기의 후반까지 밝혀지지 않는 여러 수수께끼를 가진 커플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 연극 상연에 이르러서야 다시 열렬한 사랑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극적인 두 사람의 키스신을 본 여자아이들의 말이 참 재미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아직까지 저런 키스를 할 수 있을 줄이야"(본문 중 497p ) 라나. 원작에서는 스스로 신경쇠약이라 칭하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인과 부인의 무식함과 무신경함에 질려 하며 자신과 가족의 상황을 권태롭게 방관하고 있을 뿐인 무능한 남편인 두 사람이 열렬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펼쳐진다.

반면 위컴과 리디아 커플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원작에서의 그 커플에 대한 불만을 테이트를 싫어하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려 풀어낸 작가는 어찌 보면 권선징악에 가까운 결말로 돈을 위해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하거나 어리석게도 사탕 발린 말에 넘어가버린 위컴-리디아 커플에게 벌을 내린다.(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데블린의 캐릭터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이 책 외에도 오만과 편견의 패러디 혹은 팬북을 자칭하는 작품들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한결같이 위컴과 리디아 커플에 대한 불만이 투영되곤 해서, 그러한 불만을 가진 팬들에겐 꽤나 통쾌한 결말이었던 것 같다.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제로 연결된 다른 커플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부터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도피 행각이 범죄라는 해석까지 참 현실적이고 유쾌한 설정이었다.  맨 마지막 무대상연 부분은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진행이 굉장히 빠르고 배우들의 연기와 원작 해석에 대한 해설, 관중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이 바로바로 드러나서 정말 재미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으로 다섯번 이상은 읽었다. 이 책에서는 원작에 대한 해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원작 속의 명장면(다아시의 열렬한 청혼과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장면 등)들을 몇번이나 재현해주고 있어서 원작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이 책을 좋아하게 될만한 요소가 꽤 풍부했다. 원작에 등장하는 캐서린 드 버그, 조지아나 등 깨알 같은 조연들까지 이야기에 등장시켜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직접적인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는 연극이라는 장르상 원작에는 없는 추가된 연출이나,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에서 그 캐릭터에 대해 딴죽을 걸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볼만하다

 


"난 연기가 힘드네요. 내 마음에 없는 말과 감정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거짓말과 정직함 사이에서 싸우는 거군요."
"그런 거 같아요. 당신이 엘리자베스를 바라볼 때 내비치는 감정은 진짜 같거든요.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어째서 다아시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요? 누군가 자기에게 푹 빠졌다는 걸 눈치 못 챌 수가 있어요?"                        -본문 중 253p


하지만 원작만큼 장면 장면이 꽉 찬 느낌은 받지 못했고, 위컴에게 속아 다아시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려 하다 보니 데블린의 엉성한 매너와 끔찍한 거짓말에 휘둘리는 케이시의 모습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었다. 원작만큼이나 매력적인데다 섹시미까지 더해진 남자 주인공에 비해, 편견도 포함해서 자기주장과 생각에 확신이 넘치고 똑똑한 리지가 현대판에 와서는 보다 감정에 휘둘리고 엉큼한 생각에 자주 빠지는(첫 등장 장면부터!) 현실에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가 된 점도 약간은 아쉽다. 


 

그래도 로맨스 소설 특유의 달달하고 가벼운 느낌과 빠른 진행, 매력적인 등장인물 등 장르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린 소설이라고 느꼈다.(사실 고백하자면 본격 로맨스 소설 혹은 할리퀸 소설 자체를 그다지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 장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특징들을 매우 충족하고 있었다.) ​​​원작을 떠나서도 등장인물들의 매력과 작가의 필력, 유들유들한 유머와 진한 러브 신 등 과연 로맨스 소설의 대가라고 불릴만한 작가의 작품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적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데블린의 시점에서 풀어낸 그의 이야기나 여러 가지 방해공작은 이기적이고 얄미워서 악역 다운 제 몫을 다 해냈고 두 주요 커플은 이루어지기 전까지 서로 눈치를 보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호감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장면들이 매우 매력적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유쾌하고 우스워서 보는 내내 키득거리며 읽었다. 처음 받았을 때 꽤 두꺼운 책이다 생각했는데 금세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사랑 이야기는 모든 책에서 등장하는 인류 보편의 아주 중요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에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매력적인 인물들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재미있을 줄이야. 원작에서 이미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데려다 또 한번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게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이든 등장인물과 독자 간의 사랑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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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Up - 초급과 고급 과정의 실전 페미니즘
율리아 코르빅크 지음, 김태옥 옮김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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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페미니즘 활동과 목표의 종류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 수만큼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일한 페미니즘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주제도 없어요.(중략) 하지만 페미니즘의 가장 큰 과제는 왜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이죠.   (142p, Q. 페미니즘에서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요? 에 대한 '줄리 자일링어'의 답변 中)​

 

하나의 거대한 페미니즘이란 없다. 페미니즘의 흐름이나 이론에 관해서는 "불일치"라고 표현하는 게 아주 적합하다.  (본문 중 146p)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와 그 이름에 얽힌 역사와 이론 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그런 망설임은 무지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자들조차 그에 대해 위와 같은 답변을 내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고, 할 말은 많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인 만큼 책의 구성도 약간은 혼란스럽다. 크게 <01. 기초>와 <02. 동등권,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는 굵은 목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페미니즘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와 프로필, 저자가 작성한 토막토막 이어지는 본문과 다양한 통계자료, '짧고 간결하게'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개념 및 이슈 정리들이 제자리인 척 조금은 어지럽게 섞여있다.  오히려 목차에서 밝히지 않은 본문 내의 8가지 이름의 소 목록이 이 책의 내용이나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더 도움이 된다. 책의 앞부분에서 이런 정리된 목차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의 독자들이 '페미니즘의 미로'에 빠져 마음껏 헤매고 직접 여러 가지 개념이나 편견과 부딪혀 싸워 결국 실전에까지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저자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처음에는 본문과 상관없이(심지어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는 본문과 본문 사이에도)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프로필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읽다 보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내용들도 본문과는 상관없는 내용의 통계자료도 하나하나 흥미로워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나를 통째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개념이나 관련 내용들이 책 안에서 조금씩 나누어져 있어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묘한 힘이 있는 책이었다. 서평을 작성하다 새삼스레 발견한 8가지 목록을 보니 '이런 내용을 읽었구나'하며 마구잡이로 들어온 다양한 정보들을 스스로 다시 점검해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 초급반이라 자칭하는 나에게 모든 내용들이 새로웠지만 26살의 젊은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기획한 톡톡 튀는 구성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특히 소 목록 중 <8. 이제 실전으로!>라는 부분에서 제시한 '탁월한 페미니즘 아이디어 열두 가지'는 간결하게 쓰여있지만 독자들이 실제로 시행해볼 법한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이란 여성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고, 남녀의 평등권을 주장하며, 성별에 있어서 (사회, 정치적 의미로) 약자인 여성의 참여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지만, 부끄럽게도 실제로 그 '평등권'이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여러 가지 성차별을 그리 크게 느끼거나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사회의 갖가지 사건들과 주장을 듣기야 했지만 그저 남의 일인 양 흘려들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성차별의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분명히 겪었다는 걸 느꼈다. 알게 모르게 학습해온 여러 가지 편견들이 내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큰 범죄나 커다란 사건으로 번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은 분명히 사회 운동의 한 종류이지만 사소하게는 주장을 가진 일종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내 맘대로 해석해도 그리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만큼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주장과 인식, 그리고 표현 방법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 사람들은 주저한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그것은 그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이 가진 이미지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나는 한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해 종종 비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미투 운동으로 신고당할 만한 짓은 하지 마', '미투 운동 조심해라'하는 말들. 단순하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 경계하라는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미투 운동을 통해 자신의 피해 경험을 밝힌 피해자들을 자칫 가해자로 둔갑시켜 누군가의 신세를 망치게 만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뉘앙스를 풍긴다.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흘려듣는 소리라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미투 운동은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몰시키거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있어선 안될 일이지만 혹여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미투라는 이름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도 그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퍼진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이야기다. 내가 속으로 답답해만 하던 이런 부분과 관련된 내용을 책에서 찾아냈다. 권력과 관련된 치명적인 성차별에 대한 대응 및 처신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나온 내용이다. 


우리는 종종 비난받는 것처럼 히스테릭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제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해자 회원권(스위스 TV 진행자 외르크 카헬만이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 뒤 인터뷰에서 한 말로, 여성들은 항상 희생자 노릇을 하며 남성들을 가해자로 몰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옮긴이)이라는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절규 운동, 경험의 교환, 성차별의 가시화,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자의식을 가진 표현방식들이며 필요에 따라서 구체적인 행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본문 중 48p)
      
내가 아는 모든 여성들은 성별 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에 찬성하면서도, 누구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지 않는다- 미셸레 로텐   (본문 중 243p) 


누군가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아니야, 하지만...' 전술을 사용한다. 일단 부인하고 페미니즘적인 사상을 조심스레 밝히는 것이다. 서평에서는 주로 단순하게 성차별이라는 단어만으로 언급했지만 평등권의 문제에 있어서 페미니즘이 필요한 영역은 상당히 다양하다.  월급과 사회생활(직장의 유무), 몸에 대한 인식(몸매, 제모, 나이 등), 힙합과 영화에서 드러나는 단면들 등등 이 책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어느 사소한 부분이라도 누군가 더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페미니즘이 실전에서도 쓰일 수 있기를 바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므로써 나 역시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자문해본다.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으음...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내 안의 주장이 서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으니. 하지만 페미니즘이 누구나 동의하는 '평등'에 대한 바른 인식과 변화를 바라는 태도라면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 답변도 '아니야, 하지만' 전술을 써먹은 것이려나... ?) 일단은 저자가 추천한  '탁월한 페미니즘 아이디어 열두 가지' 중 "정보 얻기"부터 시작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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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담푸스 세계 명작 동화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사이토 다카시 엮음, 다케다 미호 그림, 정주혜 옮김 / 담푸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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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이 몸'이라 칭하고 인간에 대한 서슴없는 폭로를 내뱉으며 암컷 고양이 얼룩이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걸 은근히 즐기는 인물이 있다. 이 발칙한 인물은 아직 이름도 없는 '고양이'로 능글맞지만 사랑스러워서 이 책마저도 사랑하게 만든다. 원작은 나쓰메 소세키의 동명 소설이다. 책의 말미에 쓰인 엮은이 사이토 다카시의 말에 따르면 원작 소설은 제목과 내용의 파격은 물론, 소설의 문장들은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현대 일본어의 기본이 다져질 정도로 좋은 문장'(엮은이의 후기 中)이라고 하니 이 동화책의 문장 역시 원작에서의 문장을 그대로 따오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원작이 워낙 유명해서 줄거리 등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본문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동화책으로나마 실제 글을 접해보니 원작에 더더욱 흥미가 간다.


유쾌한 줄거리와 사랑스러운 등장인물, 친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꽉 찬 삽화는 동화책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특히 동화책의 장점이자 강점은 삽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의 그림은 동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 플러스 효과를 받아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림작가 다케다 미호는 <마스다 군>시리즈, <웅성웅성 숲의 고집쟁이 시리즈> 등 많은 책을 작업한 베테랑이자 유명 작가였다. 개인적 취향으로 그림을 보고 동화책을 선택하는 사람으로서 '다케다 미호'라는 이름을 기억해둬야겠다.

 

 

줄거리가 소설 원작의 부분을 취하고 있다 보니 맨 마지막 장의 마무리가 이야기로서는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장면 자체가 선사하는 유쾌한 매력을 부인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서생이라는 인물을 포함한 인간들의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하며 고정관념을 깨어주는 것이 (원작에서)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라 치면 유쾌하게 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깨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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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년 살 것 같지? - 멸종위기 동식물이 당신에게 터놓는 속마음 만화에세이
녹색연합 지음, 박문영 만화 / 홍익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멸종 위기 동식물의 이야기를 만화와 짧은 에세이에 담았다.
멸종 위기의 동물 이야기는 여러 가지 캠페인, 광고나 다큐멘터리 등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반면 식물이나 곤충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생소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이용되는 구상나무나 평창 올림픽의 유치로 스키장 부지를 만들기 위해 벌목된 500년된 보호림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들 말하는 평창올림픽의 비화가 한둘이겠냐마는, 그저 올림픽 유치 성공과 선수들의 메달 수에만 열광하며 그 외의 사항들에는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에 비해 독일의 뮌헨 주민들이 보이는 모습은 여러모로 달랐다. 국제적인 행사라는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올림픽 유치 반대 표명을 하며, 자신들이 가진 환경에 대한 자부심과 그걸 지켜나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그들이 얼마나 자각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여러 환경단체를 비롯해 비슷한 움직임을 가진 이들이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무관심한 국민들에 비해 미미한 세력이라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자연의 흔적을 보러 간 곳에는 사람들의 흔적만 가득하다 

    - 본문 중 69p (초록에세이, 산에 든다는 일)

 

"도로로 덮인 흙은 원래 우리의 땅이었어. 그러니 왜 건너냐고 묻지마"

(…) 우리가 도로에서 만난 죽음은 '생명'이었다     

       - 본문 중 80, 82p(8. 삵)

보호받고 싶은 마음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있다.  

   - 본문 중 141p (14. 점박이 물범)

 

만화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문제 되고 있는 상황이나 동물들이 입고 있는 피해를 보여주거나 경고를 날리고, 그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운동이나 작은 캠페인 등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글은 만화에서 다루었던 동식물이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겪었던 이야기들을 결부해서 조금은 더 부드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처음에 책에 그려진 만화를 보며 그림은 엉성하지만 만화 속 동물들의 대사가 참 독하다-라고 생각했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에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동물의 입을 통해 인간들에게 던지는 비아냥, 푸념, 경고, 충고, 권유, 부탁의 말들이 참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표현되어있어 가슴에 콕콕 박힌다. 처음에는 그런 표현들이 조금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의 욕심에 많은 동식물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명확히 드러나있는 사실이며 그들의 존속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도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책 속에 나오는 멸종 위기 동식물은 물론 인간 역시 자연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문 중 나오는 한 파트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본문 중 184p) 우리는 자연과 모든 동식물의 주인이 아니며 그들에게 여러 도움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그들을 마음대로 휘젓고 이용해 이득을 취할 권리를 가진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책의 제목처럼 인간들은 모두 천 년 만 년 살 것 같은가? 언젠가 인류가 멸종 위기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너무 늦다. 지금부터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일단 알게 되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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