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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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영화의 우울한 남자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여자라면 누구든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조건의 남자 테이트와 평범하지만 건강하고 출중한 요리 실력을 가진 케이시, 액션 영화에서 엄청난 운전 실력을 보여주며 히로인을 구해내는 멋진 남자 잭과 마을을 종횡무진하며 오토바이를 즐기고 소방관을 돕는 등 쾌활한 미인 지젤, 수수께끼투성이의 연극제작자 키트와 총명하고 우아한 미인인 올리비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이 목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열악한 연기 실력을 이용하는 데블린과 어리지만 연기에 재능을 보이며 똑똑하게 자신이 한 일을 책임지고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로리. 

오만과 편견에서 등장했던 다아시-엘리자베스, 빙리-제인, 베넷 부부, 위컴-리디아 커플이 현대에서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원작에서처럼 리지(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실제 가족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니고 인연을 이어간다. 원작을 연극으로 꾸며 각자 그 배역을 맡아 연기하게 되어 원작에서의 캐릭터처럼 서로 사랑에 빠진다. 로맨스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두 커플은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데 반해, 베넷 부부와 위컴-리디아 커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재미있었다. 


베넷 부부는 어릴 적 연인이었지만 이야기의 후반까지 밝혀지지 않는 여러 수수께끼를 가진 커플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 연극 상연에 이르러서야 다시 열렬한 사랑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극적인 두 사람의 키스신을 본 여자아이들의 말이 참 재미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아직까지 저런 키스를 할 수 있을 줄이야"(본문 중 497p ) 라나. 원작에서는 스스로 신경쇠약이라 칭하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인과 부인의 무식함과 무신경함에 질려 하며 자신과 가족의 상황을 권태롭게 방관하고 있을 뿐인 무능한 남편인 두 사람이 열렬하게 서로를 사랑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펼쳐진다.

반면 위컴과 리디아 커플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원작에서의 그 커플에 대한 불만을 테이트를 싫어하는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려 풀어낸 작가는 어찌 보면 권선징악에 가까운 결말로 돈을 위해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하거나 어리석게도 사탕 발린 말에 넘어가버린 위컴-리디아 커플에게 벌을 내린다.(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데블린의 캐릭터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이 책 외에도 오만과 편견의 패러디 혹은 팬북을 자칭하는 작품들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한결같이 위컴과 리디아 커플에 대한 불만이 투영되곤 해서, 그러한 불만을 가진 팬들에겐 꽤나 통쾌한 결말이었던 것 같다.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제로 연결된 다른 커플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부터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도피 행각이 범죄라는 해석까지 참 현실적이고 유쾌한 설정이었다.  맨 마지막 무대상연 부분은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진행이 굉장히 빠르고 배우들의 연기와 원작 해석에 대한 해설, 관중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이 바로바로 드러나서 정말 재미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으로 다섯번 이상은 읽었다. 이 책에서는 원작에 대한 해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원작 속의 명장면(다아시의 열렬한 청혼과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장면 등)들을 몇번이나 재현해주고 있어서 원작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이 책을 좋아하게 될만한 요소가 꽤 풍부했다. 원작에 등장하는 캐서린 드 버그, 조지아나 등 깨알 같은 조연들까지 이야기에 등장시켜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직접적인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는 연극이라는 장르상 원작에는 없는 추가된 연출이나,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에서 그 캐릭터에 대해 딴죽을 걸고 투덜거리는 장면도 볼만하다

 


"난 연기가 힘드네요. 내 마음에 없는 말과 감정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거짓말과 정직함 사이에서 싸우는 거군요."
"그런 거 같아요. 당신이 엘리자베스를 바라볼 때 내비치는 감정은 진짜 같거든요.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어째서 다아시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요? 누군가 자기에게 푹 빠졌다는 걸 눈치 못 챌 수가 있어요?"                        -본문 중 253p


하지만 원작만큼 장면 장면이 꽉 찬 느낌은 받지 못했고, 위컴에게 속아 다아시에게 매몰차게 대하는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려 하다 보니 데블린의 엉성한 매너와 끔찍한 거짓말에 휘둘리는 케이시의 모습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었다. 원작만큼이나 매력적인데다 섹시미까지 더해진 남자 주인공에 비해, 편견도 포함해서 자기주장과 생각에 확신이 넘치고 똑똑한 리지가 현대판에 와서는 보다 감정에 휘둘리고 엉큼한 생각에 자주 빠지는(첫 등장 장면부터!) 현실에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가 된 점도 약간은 아쉽다. 


 

그래도 로맨스 소설 특유의 달달하고 가벼운 느낌과 빠른 진행, 매력적인 등장인물 등 장르의 장점을 아주 잘 살린 소설이라고 느꼈다.(사실 고백하자면 본격 로맨스 소설 혹은 할리퀸 소설 자체를 그다지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 장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몇 가지 특징들을 매우 충족하고 있었다.) ​​​원작을 떠나서도 등장인물들의 매력과 작가의 필력, 유들유들한 유머와 진한 러브 신 등 과연 로맨스 소설의 대가라고 불릴만한 작가의 작품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적 유쾌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데블린의 시점에서 풀어낸 그의 이야기나 여러 가지 방해공작은 이기적이고 얄미워서 악역 다운 제 몫을 다 해냈고 두 주요 커플은 이루어지기 전까지 서로 눈치를 보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호감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장면들이 매우 매력적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유쾌하고 우스워서 보는 내내 키득거리며 읽었다. 처음 받았을 때 꽤 두꺼운 책이다 생각했는데 금세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사랑 이야기는 모든 책에서 등장하는 인류 보편의 아주 중요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에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매력적인 인물들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재미있을 줄이야. 원작에서 이미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데려다 또 한번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게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이든 등장인물과 독자 간의 사랑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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