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디자인 강의 with 인디자인 - 10년차 디자이너에게 1:1로 배우는, 개정판
황지완 지음 / 한빛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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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기 전에는 편집 디자인에 쓰이는 '인디자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포토샵 등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이나 기초부터 알려주는 입문서 혹은 자격증 책을 떠올렸는데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편집디자인"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내용도 있었다. 인디자인을 사용할 때 유용한 환경설정에 관한 팁이나 자주 쓰이는 기능들에 대한 설명과 각 단축키도 알려준다. 자격증 책에서 흔히 보이는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은 사진들도 여러 장이다. 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듯이 이 책에도 실전사례와 그것을 연습하기 위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단순히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업무에서 진행되는 모든 프로세스를 알려주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 중 한 가지로써 인디자인에 대한 활용팁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편집 디자인에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들이 쓰이고, 보통 편집 디자인을 배운다 하면 포>일>인 순서로 배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단계인 포토샵을 배우고 있어서 인디자인을 이용해 책을 만드는 구체적 과정이나 기술들이 정말 궁금했다. 이 책은 내가 궁금해했던 그 업무를 직업으로 삼아 10년 경력을 쌓아놓은 출판 인쇄 쪽의 편집 디자이너가 직접 썼다. 실무에 유용할 팁을 잔뜩 실었고, 초보자들에겐 영 감이 오지 않을 여러 종이나 글씨체, 후가공 기술 등에 대한 샘플을 책 속에 직접 넣었다. 맨 처음 책을 펼치면 본문 대신 나오는 샘플들은 정말 신기했다.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어설프게 책마다 종이의 차이가 있다는 건 느껴도 그 각각의 이름이나 특성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맛보기 정도이긴 하지만 각 종이의 이름과 함께 간략한 설명도 쓰여있어서 한장한장 만지고 넘겨보며 그 내용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다양한 종이들과 함께 첫 페이지에는 형압, 먹박, 금박, 은박 등 후가공을 담은 페이지도 있는데 본문을 읽다보면 그 이름 하나하나의 해설을 찾아낼 수 있어서 본문을 읽을 때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뒤표지에서 알려주고 있는 실무 흐름을 따라 책의 내용이 진행된다. 책의 목차는 참 세세하게 나누어져 무려 8페이지나 되는데, 크게 2가지 파트로 나뉜다. 간략하게 줄여 설명하자면 파트 1에서는 편집 디자인의 프로세스, 인디자인 활용법을 먼저 설명하고 종이, 그리드, 타이포그래피, 표, 색상, 사진과 일러스트, 출력/인쇄/제책이 각 챕터로 나누어져 설명되고 있고 파트 2에서는 실무 예제와 과정 설명이 들어있다. 각 단계에서 알아야 할 정보 역시 많지만 문외한의 시점에서 봤을 때 흥미로운 부분도 정말 많아서 즐거웠다. '종이들의 이름은 예쁘지만 한국어로 된 이름은 없네', '인쇄 언어에서 일본어가 정말 많이 쓰이는데 콩글리시처럼 섞인 단어일까 아니면 온전한 일본어일까' 등등 소소하고 쓸데없는 감상들을 던지며 읽기도 했다. 사진과 일러스트 부분에서는 포토샵에서 배운 기본 지식들이 나오기도 해서 알고 있는 것에 반가워하며 읽었고, 실제 출간된 책들의 실전사례를 볼 땐 디자이너에게 제공되는 제작 의뢰서의 형식과 내용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는데 내용이 흥미로웠고, 단순히 폰트의 종류뿐 아니라 자간, 행간, 단어들의 간격, 정렬 등등 세세한 부분까지 그 효과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모두 편집 디자이너의 일이었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책 한 권이 나올 때 인쇄되는 글자, 선, 그림, 사진, 단락의 모양 등등 모든 것에 많은 정성과 세세한 센스가 깃들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 종이의 촉감과 질감, 책이 가진 특유의 종이와 잉크 냄새 등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 로망이 만들어지는 현실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그 점이 재미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실무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 구체적 과정은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난 그냥 이 책이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동안 잘 몰랐던 여러 요소들의 세세한 정보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의 의도대로 편집디자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고, 꼭 전문인이 아니더라도 일인 출판이나 자신의 책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나처럼 그냥 책이 어떻게 디자인되고 만들어지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추천. 책이 꽤 크고 무게가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읽을 맛 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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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길을 잃었어 I LOVE 그림책
조쉬 펑크 지음, 스티비 루이스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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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집 근처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공립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뉴욕 공공 도서관같이 커다란 규모의 도서관에는 왠지 모를 로망을 품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커다란 사자 석상 두 마리가 입구를 지켜주는 뉴욕 공공 도서관은 미국에서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하얀 대리석 건물로 지어졌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한 번쯤 꼭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다. 이 그림책의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은 바로 그 뉴욕 공공 도서관이고, 주인공은 그 도서관의 명물이기도 한 돌사자들이다.

 

 

 

 

인내(Patience)와 용기(Fortitude)라는 이름의 두 사자는 사람이 없을 때 슬며시 눈을 뜨고 서로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는 단짝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아침해가 뜨고 도서관의 문이 열리기 전에 언제나처럼 그 자리로 돌아와 도서관 경비를 하는 일이 두 사자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 인내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걸 알게 된 용기는 인내를 찾아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도서관 안을 헤매는 동안 도서관의 몇몇 공간들과 특징적인 조형물 등이 자연스레 소개되는데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과는 달리 도서관 안의 방은 너무도 많아서 위치라던가 규모가 쉽게 상상되지는 않는다. 개수대에 있는 청동 사자의 도움의 얻어 도서관 내의 지도를 얻게 되었을 땐 내가 대신 그 지도를 펼쳐보고 싶었달까. 혹시나 책의 말미에 도서관 내부 지도가 실제로 실려있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없어서 아쉬웠다. (대신 책 속에 등장하는 '방문객을 위한 안내서와 지도'가 한국어 버전이라는 디테일에 조금 웃었다.)         

 

 

 

 

단순하고 평화스러운 이야기에 다정하고 서로를 아끼는 주인공들은 조금 심심할 수 있지만 뉴욕 공공 도서관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해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좋았던 것 같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시리즈를 보면서 난 '도서관이 살아있다'도 있을 법 한데라는 상상을 했었으니까.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에 대한 보충 설명이 본문 뒤에 간략하게 나와있기는 한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실제 '뉴욕 공공 도서관'이 많이 궁금해졌다. 집 근처에 큰 규모의 도서관이 없는 경우 이런 큰 도서관에 대한 흥미를 당겨줄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조금 더 호기심이 생기게 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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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마음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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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먼 곳이 보인다! 하며 기쁘게 소리치고, 기쁨의 피루엣을 비롯한 춤을 추다 결국 쿵! 나무에서 떨어져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코끼리가 있다. 그 코끼리가 살고 있는 숲속,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를 익히 알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이 '내가 코끼리라면' 하고 가정해보는 이야기. 그리고 매일같이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길 반복하다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가 본문의 이야기다. 이번 책의 그린이도 김소라 작가로 그녀만의 귀여운 동물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좋은 동물들(비버, 멧돼지, 고슴도치 등)과 자신이 너무나도 싫은 동물들(바퀴벌레, 해파리)의 극과 극에 달하는 상상이 재밌었고, 숲속 동물들뿐 아니라 찻잔, 중력, 나무좀, 맘모스 등 생각지도 못한 서술자들의 등장이 신선했다. 각 동물들의 너무나도 다른 성격과 관계를 파악해가는 것도 좋았는데 예상치 못한 찐한 관계성을 가진 짝꿍들을 가진 동물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등장했던 두 짝꿍 지렁이와 두더지, 달팽이와 거북이가 그들인데 대화를 가만히 읽어보면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절절한 연인 사이 같기도 하다. 코끼리가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는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 이어진 둘의 대화는 아주 애틋했다.

둘은 서로에게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두더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지렁이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결국 한 번은 땅속 깊은 곳에서 심하게 부딪쳤다. "그렇다면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더 이상 구멍도 못 파고, 그래서 내가 너를 떠나거나 너를 잊는 일도 때로는 가능하다는 거야?"

두더지는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야, 너는 쓰러질 리 없고,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너를 잊는 일도 절대 없을 거고." 지렁이가 말했다. "알아, 지렁이야. 나도 잘 알아." 두더지도 말했다.  

- 본문 중 35p

내가 코끼리라면, 하는 가정에 대한 여러 동물들의 대답 중 가장 공감했던 건 향유고래의 답이었다. 자신은 향유고래이며, 코끼리가 아니고, 코끼리가 될 이유도 없다는 것. 그래서 코끼리가 된다면 무엇을 할지에 대한 대답은 정말 모르겠다는 한마디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잊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잊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헤엄치는 것에만 집중하는 향유고래의 모습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르지만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고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고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꿋꿋하게 나무를 오른다. 이런 코끼리의 행동은 버릇, 고집, 뚝심, 신념 어떤 말로 표현해야 맞는 걸까. 그리고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도드라지는 다람쥐의 특별성.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상냥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람쥐는 가만히 코끼리의 고민과 질문들을 들어주다 그저 "응"하고 긍정의 대답을 해준다. 코끼리에게 진심이 담긴 편지도 쓰지만 그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코끼리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애타는 한숨을 내쉬는 장면도 귀여웠다.

 

 

떨어지는 것은 부스러기 같은 거야.

아픔도 그래.

계획도, 약속도, 상식도, 후회도, 수치심도

다 부스러기와 같아.

그러나 나무에 오르는 건 안 그래.

춤을 추는 것도,

이른 아침 나무 꼭대기 위에서

멀리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도.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5p

나는 옳은 결정을 좋아하지 않아. 

이제야 알겠어.

현명하고, 신중하고, 숙고 끝에 내린 결정들.

 

나는 잘못된 결정이 좋아.

즉흥적으로 내린,

매일 되풀이하는 그런 결정들.

 

 - 본문 <잠 못 이룬 밤에 코끼리가 끄적거린 일기> 중 197p

 

 

코끼리의 일기는 혼잣말 같기도 하고 가끔은 마치 시 같기도 한데 그 내용은 온통 나무에 오르고, 춤을 추고, 떨어지는 이유와 그 안에서 얻는 아픔과 행복에 대해 고찰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삶의 모든 것이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삶일까. 이 책은 만약이라는 가정법과, 질문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제목으로 내세운 '코끼리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참 어렵다. 많은 동물들이 대답을 하지만 그 대답은 일반론도 정론도 되지 못하고, 그저 자신과 코끼리에 대한 즉각적인 생각을 뱉어낸 것으로 독자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서 생각하게끔 만들 뿐이다. 내가 코끼리라면, 그것도 온몸에 멍이 들고 뼈가 부러져도 계속해서 나무에 오르는 코끼리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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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씽 인 더 워터 아르테 오리지널 23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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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묻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묻으려 하는 시체는 3시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이다. 누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그 시체를 유기하려는 자는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다소 차분하고 세세한 데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서술은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섬뜩하기도 하다. 이야기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고 그 결말을 맞이하기까지의 과거를 풀어내는 방법은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한 구성이지만, 작가의 필력과 이야기 진행의 완급조절 실력은 수준급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신혼여행을 가 우연히 발견한 캐리어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돈과 다이아몬드를 가지기로 마음먹은 에린과 마크. 그들이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그 가방 안의 물건들을 영국으로 가져와 처분하는 과정이 이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에린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본문은 그 주요 줄거리 외에 그녀가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이야기(교도소에서 출소를 앞둔 세 사람을 출소 전부터 그 이후까지를 관찰, 인터뷰하는 내용)를 번갈아 들려준다. 초조한 마음으로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 굴면서 돈과 보석에 관한 처리를 진행하는 이야기는 스릴러에 걸맞은 재미도 주지만 그 과정 자체는 조금 뻔한 면도 있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그 사이에 들어가는 에린의 다큐멘터리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의 완급조절을 해주는 동시에 두 이야기가 나중에 어떻게 합쳐질 것인지 호기심을 당겨주는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크와의 관계와 돈에 관해 집중한 본 이야기보다 다큐멘터리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세 인물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제각각이면서 출소 후 '새로 시작할 인생'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에린과 공통점이 있는 게 재미있었다.

내 말은, 나를 보라는 것이다. 9일 만에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자 도둑이 되었다. 앞으로 5년 후에 내가 어디 있을지, 어떤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감옥에 들어가 있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본문 중 287-8 p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양의 책을 몰아치듯 다 읽고 나서 천천히 다시 책을 훑어보고 메모한 페이지를 다시 눈여겨보자 책 전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뉘앙스가 있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인용된 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 속 한 문장 '내가 미소 지으면, 그 미소가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잠겨들 텐데, 그게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홀리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 후 그녀의 방을 보면서 에린이 한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인데 에린과 마크가 느닷없이 돈과 보석을 발견해버린 것처럼 이 스릴러 속 주인공들이 또 언제 어떤 격변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준다. 그리고 이런 긴장감이 스릴러, 미스터리 같은 장르의 책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이 책의 저자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작가는 배우로도 활동한 적 있는 캐서린 스테드먼인데 내년에도 출간 예정인 책이 있다고 하니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미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에린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책이 과연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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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블루스
마이클 푸어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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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누가 그랬던가,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 혼자서 9,995권의 책을 쓴 사람이 있다. <환생 블루스>의 주인공 마일로는 수많은 환생을 거쳐 그 환생의 수만큼의 책을 축척해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천 권의 종합본이나 요약본의 장점은 역시 방대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마찬가지로 각각의 생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소 정신 산만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책안의 세계에서 한 영혼이 환생을 거듭하는 이유는 이상적인, 완벽한 생을 살아냄으로써 우주(오버소울)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 마일로는 9,995번의 생을 살고서도 완벽한 생이란 것을 이루어 내지 못한 모질이일지도 모른다. (마일로는 '오랫동안 완벽함에 저항'해 온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

 

"대체 누가 완벽한 삶이 이상적이라고 한 거야? " 그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나의 불완전한 삶을 좋아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 마일로가 물었다.

(본문 중 79p) 

 

과연 어떤 삶을 '완벽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 쓰인 완벽한 삶은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관점인 것 같아 사실 그리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마일로가 귀뚜라미로 태어난 생에서 자신을 사로잡아 나무 새장에 가둔 인간 여자아이를 위해 귀뚤귀뚤 울어주고 소녀의 사랑을 얻어낸 생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라 평가되어 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생이라면 조금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수지)이 그에게 보여준 완벽한 생의 한 가지 예는 가축으로 태어나 제 발로 아주 가난한 가족에게 찾아가 식량이 되어주는 삶이었기에 조금 혼란이 왔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아무 계산 없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 완벽한 삶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희생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였고, 그 어떤 존재의 희생을 통해 행복이나 사랑 등 그에 준하는 것을 얻는 존재는 인간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엔 왠지 찜찜했다. 

   

"완벽함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내게도 사랑이 있어!" 마일로가 항변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잖아."

" '사랑'과 사랑에 빠지는 게 항상 같은 건 아니야. " 수지가 말했다.

"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적인 거라고. 일종의 화학작용이야. '사랑'은 우주적이지. 나도 역시 당신을 사랑해."                                  (본문 중 102p)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두 가지 궁금증이 계속됐다. 마일로와 수지의 러브스토리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일로는 1만 번의 생을 다 써버리기 전에 완벽함에 다다를 수 있을까? 마일로가 거쳐간 여러 가지 생의 이야기나 잠시 사후세계에서 머무는 동안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가면서도 이 두 가지 질문에 대답이 궁금해 계속 책장을 넘긴 것 같다. 이미 완벽에 대한 정의나 그에 다다르기 위한 룰이 정해진 세상에서 그에 구애받지 않고 마이웨이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려 고군분투하는 마일로는 참 독특한 존재였다. 가벼운 러브 판타지를 생각하고 읽었는데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보단 좀 더 방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한 책이었다.

두께는 있지만 이야기는 술술 읽히는 편이고 다양한 마일로의 생에 경악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며 그럭저럭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책 속 세계의 설정들을 나에게 빗대어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한 영혼이 완벽함을 이루어내 오버소울의 조각이 되기까지 만 번의 삶이 가능하다면, 과연 지금 내 영혼은 몇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걸까. 아주 망쳐버린 생이 아닌 이상은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날지를 본인 스스로가 정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완벽한 생이란 것을 바로 이루어내지 못하는 걸까. 이전 생은 지금에 가까운 현재였을까 아니면 과거? 혹은 미래? 나라면 다음 생에서 어떻게 태어나면 좋을까. 이번 생이 끝나고 내가 얻게 될 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등등. <환생 블루스>는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환생에 대한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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